[박정호의 시시각각] 한 끼도 부담스러운 청춘
“학식이라도 마음 편히 먹고 싶다”는 앳된 청년의 호소에 가슴이 아렸다. 지난 17일 한 장학회의 2023학년도 장학생 선발 면접장에서다. 그 청년의 스펙은 모자람이 없었다. 외국어고를 나와 올해 서울대에 합격했다. 등록금도 전액 국가장학금으로 해결했다.
하지만 대학이 배를 채워주진 않았다.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고, 근로장학금도 받았지만 생활비는 항상 쪼들렸다. 더욱이 집안에 기댈 형편이 아니었다. 부친의 사업 실패에 코로나 펜데믹이 겹치면서 빚이 4억여원으로 불어났다. 다섯 가족 모두 신용불량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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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의 대물림’으로 변한 대학교육
이 시대 장학금이 더 절실한 이유
청년세대에 ‘양극화 짐’ 덜어줘야
」
청년은 “종일 굶은 적도 있었다”고 했다. 무거워진 마음에 친구들을 사귀는 것도 여의치 않았단다. 그래도 ‘고진감래(苦盡甘來)’를 믿는다고 했다.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해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를 풀어가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다졌다.
이날 면접에는 총 27명이 참여했다. 그들의 처지는 대체로 비슷했다. 가난한 환경, 뜨거운 학구열, 사회에 이바지하는 삶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 2007년 금융위기, 그리고 최근 팬데믹 사태까지 지난 시간 이곳에 몰아닥친 한파가 청년세대에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날개 없이 추락한 부모 세대의 초상도 엿보였다.
앞서 말한 장학회는 1983년 출발한 송원장학회다. 중화학 소재를 주로 만드는 태경그룹 김영환(1933~2014) 회장이 학창 시절 허기를 달래며 공부했던 경험을 후대에 물려주지 않게 설립했다. “사업 목적이 장학재단 설립”이라고 믿은 그가 제시한 장학생 선발 기준은 오직 한 가지. 가정 형편이 곤란하고 학업 지원이 절실한 학생이다.
이 원칙은 지난 40년간 굳건하게 유지됐다. 한 학기에 500만원, 1년에 1000만원을 대학원 석사 과정까지 지원한다. 장학회 출신 이사진이 새 장학생을 선발하는 것도 특기사항이다. 이번에 뽑힌 40기(23명) 직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총 849명에 129억7050만원이 지급됐다.
그간 장학금 성격도 많이 달라졌다. 처음엔 등록금 지원으로 출발했으나 2012년 국가장학금 도입 이후 생활비 보조 측면이 강해졌다. 요즘 대학생들은 소득분위 8구간까지 국가로부터 등록금 일부를 지원받는데, 송원장학금의 경우 국가장학금과 중복 수령할 수 있다. 사실상 생활비 지원이다.
이는 대학 신입생 구성비 변화와도 연관이 깊다. 교육이 더는 계층 이동 사다리 역할을 하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한다. 부모 소득이 대학 진학을 좌우하는 시대이지 않은가. 실제로 2020년 서울대·고려대·연세대 신입생 중 고소득층(소득분위 9, 10구간) 비율은 55%로, 세 대학을 뺀 전국 대학 평균(25.6%)의 두 배가 넘었다. 서울대의 경우 그 비율이 62.9%에 이르렀다. ‘부=교육의 대물림’ 고착화 현상이다.
서울대·고려대·연세대·이화여대 1학년생을 주로 뽑는 송원장학생의 경우 절대다수가 소득분위 1순위 아래다. 김해련 장학회 이사장은 “아직도 외부 장학금이 필요하냐고 묻는 사람이 주변에 많은데, 가난한 학생일수록 캠퍼스에서 느끼는 소외와 좌절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이게 더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10년 넘게 장학생 선발에 참여해 왔다. 해마다 세밑을 실감하는 행사인데, 늘 면접자보다 피면접자가 되는 느낌이다. 젊은이들에게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을 남겨준 것이 미안하고, 그들의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에 한 수 배운다. 그래도 송원장학생은 운이 좋은 편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또 연 1000만원의 디딤돌에 올라섰다. 최소한 ‘완전히 붕괴됐어요’에선 벗어났다.
사실 대학은 둘째치고 하루하루가 고달픈 청춘이 부지기수일 터다. 어제는 성탄절,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온 예수의 뜻을 기억한다. 각자도생의 시대, 양극화 틈새를 좁혀야 할 기성세대의 책무를 되새긴다. 가난이 복리로 붙는 새해가 되지 않기를….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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