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원짜리 '데미안' 때문에 책방을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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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섭 기자]
▲ 강화도 북단 숭뢰리의 농가 주택에 자리 잡은 평화책방. 이곳에서 북의 개풍군이 바라다 보이는 해안 철책까지 걸어서 20분 거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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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Gregor Samsa)는 불편한 꿈에서 깨어나, 침대에 누운 자신의 몸이 흉측한 곤충(Ungeziefer)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가인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런 내용을 써도 된다는 사실을 몰랐구나, 진작 알았다면 오래 전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 텐데"라는 반응을 보였고, 곧바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인생길에 석양이 비출 무렵인 작년 여름, 강화도 농가주택을 개조해 책방을 내자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 여러 명이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어떤 계기로 책방을 냈나요? 오래된 계획이었나요? 마르케스처럼 그럴듯한 '계기'가 있는지 떠올려 봤다.
▲ 서가에 꽂힌 오래된 <데미안>(학원사, 1984년 초판 5쇄, 값 1999원)을 보는 순간, 바로 이 책 <데미안> 때문에 강화도 농가주택에 책방을 열게 됐다라는 생각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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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동파 같은 눈에 보이는 이유 말고 또 다른 심층적인 계기, 당사자도 그동안 잊고 지내온 어떤 내면적인 원인도 있지 않을까? 책방을 하게 된 원인과 계기를 떠올리는 데 무려 31일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책꽂이를 만들고, 책을 정리하던 어느 날 빛바랜 표지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맞아 바로 저 책 때문이었어. <데미안>을 보는 순간 10대 시절부터 즐겨 외우던 구절,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보낸 쪽지글이 떠올랐다. 바로 <데미안>과 바로 이 문장이 나로 하여금 강화도에 책방을 열게 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데미안의 답장이었다."
독일의 소설가 헤르만 헤세(1877~1962)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9년에 발표한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데미안>을 읽지 않은 사람도 이 말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내 인생 통틀어 두 번 본 소설은 몇 권 안 되며, 세 번 읽은 건 <데미안>이 유일하다. 10대에 처음 읽고, 20대에 다시 봤고, 30대에 번역본 <데미안>의 책장을 넘기다가 언젠가는 원문으로 읽고야 말리라는 허황한 포부를 세우고 독일어판을 샀으나, 책꽂이에 오랫동안 꽂아두기만 했다.
20여 년 만에 다시 <데미안>의 책장을 넘기니 그야말로 감개가 무량했다. 책꽂이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마치 60살이 다가오면서 얼굴에 피기 시작한 검버섯처럼 곰팡이 자국이 군데군데 보이는 <데미안>을 보는 순간 '아프락사스' 이름을 떠올리며, 그 마법의 주문 같은 문장을 이십여 년 만에 다시 되뇌었다.
아프락사스는 헬레니즘 시대 그노시스파의 신인데, 선과 악을 결합한, 악마이기도 한 신이다. 기독교에서 볼 땐 사탄이다. <데미안>을 '폭풍우 치는 밤 등대의 불빛'이라 했던 심리학자 융은 아프락사스는 삶과 죽음, 저주와 축복, 참과 거짓, 선과 악, 빛과 어둠의 대립하는 성격을 동시에 지닌 존재로 봤다.
뒤표지에 헤르만 헤세의 유화 그림이 있는 <데미안>(학원사, 1984)의 서문 첫 문장을 읽었다. 나는 정말 나 자신으로부터 저절로 우러나오는 인생을 살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렇게도 어려웠던가?
헤세가 <데미안>을 발표한 것은 그의 나이 42세인 1919년이었다. '저절로 우러나오는 인생'을 사는 것은 헤세가 살아온 20, 30대에도 어려운 일이었고, <데미안>을 쓰던 40대 초반에도 마찬가지이고, 50, 60대라 해도 똑같이 어려웠을 것이다.
본문 종이가 누렇게 바랜 <데미안>은 단순한 책 한 권이 아니었다. 1984년 초판 5쇄, 값 1999원의 <데미안>에서 내 인생의 갈비뼈 하나, 부러져 나간 앞니 한 조각, 방아쇠를 당기던 검지 한 마디의 근수와 같은 무게감을 느꼈다. 게다가 책 마지막 장 판권에서 아내의 인장과 한자로 쓴 '惠(혜)' 사인을 발견했다.
누군가에게 도끼 역할을 한 책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라는 카프카의 표현을 빌리자면 <데미안>은 날이 잘 선 도끼였다. 그러고 보니 책꽂이에는 녹슬어 보이지만 조금만 숫돌에 갈면 날이 시퍼렇게 살아날 도끼들이 여기저기 꽂혀 있었다.
"우리는 오직 우리를 물어뜯거나 푹푹 질러대는 통렬한 책만 읽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네. 우리의 골통을 강타하여 일깨우지 못하는 책을 우리가 읽어서 뭐하겠는가? 그런 책도 자네가 쓰는 책처럼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그렇다면 내가 맹세컨대, 우리는 차라리 아무 책도 갖지 않는 편이 행복할 걸세. 물론 우리에게 그런 책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우리가 그런 책을 직접 억지로 쓸 수는 있겠지. 그러나 우리에게 정녕 필요한 책은 우리를 무참하게 괴롭히는 재앙 같은 책, 우리가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같은 책, 아무도 없는 적막한 숲 속으로 추방되어 쓸쓸히 죽어가는 살기자(殺己者) 같은 책이야. 책은 모름지기 우리의 내면에서 결빙된 바다를 쪼개버릴 도끼여야 한다고 나는 믿네."
그동안 도끼와 같았던 책이 무엇이었나 떠올려 보았다. 헤세의 <데미안>만이 아니라 소로우의 <시민의 반항>, <전태일 평전>, <붉은 바위>를 비롯해 두 손으로 내리칠 수 있는 큰 도끼와 같은 책 십여 권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중에는 저자와 주인공 이름조차 다 잊어버린 세계명작도 있을 것이다.
먼지만 쌓여가는 책, 이사 다니다 고물상에 갖다버린 책에 다시금 생명을 불어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버리고 멸한 책이 누군가에게는 보물이 되고 다시 소생하는 중고서점, 책이 돌고 도는 영원한 회귀의 현장인 책방!
이런 까닭에 <데미안> 때문에 책방을 열게 됐다고 말하는 것이다. 책방 개점은 얼핏 보면 우연이지만 결국 필연적인 선택이라는 생각도 든다. 뭐 따지고 보면 세상에서 이미 벌어진 일 중에 필연 아닌 일은 단 한 가지도 없겠지만. 처음엔 그동안 모아놓은 헌책을 주로 팔 생각이었으나 몇몇 출판사의 협조를 얻어서 새 책도 진열하고, 이름도 '중고서점'이 아닌 '책방'으로 했다.
헌책과 새 책을 함께 다루는 책방은 누군가의 도끼 역할을 한 책, 부활해서 누군가의 도끼 역할을 할 책이 모였다 흩어지는 곳이다. 사람마다 도끼 역할을 한 책은 다를 것이다. 몇몇 지인에게 기증받은 헌책을 살펴보니 저마다 책으로 그려온 내면의 지도가 다 다르다. 누군가는 사막을 여행하는 데 필요한 책이 더 소중했을 테고, 어떤 사람은 설산을 오르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을 골랐을 것이다.
▲ 어느 날 책방의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딱새 한 마리. 필자는 새를 하늘로 날려 보낸 뒤 10대 시절 ‘알을 깨고 나온 새’가 수십 년간 세상의 강과 바다, 독재와 분단의 시대를 날아다니다 철책선 위로 날아왔다는 상상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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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강화도 시민단체가 만드는 연간 잡지 <강화시선>(2022년 12월 발행)에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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