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를 살해한 세조의 능침에서 발견한 미묘한 풍경 [중앙선 역사문화기행]
[최서우 기자]
남양주시 진접읍에서 포천시 소흘읍 방향으로 봉선사천을 따라가다 보면, 시 경계를 지나기 전 오른편에 조선왕릉이 하나 있다. 이름은 사적 제197호 광릉. 조선 7대 왕 세조와 왕비인 정희왕후의 무덤인데, 정자각(丁字閣) 너머로 V자형으로 갈라진 두 언덕 각각에 능을 구성하고 있다. 능 주변으로는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있는데 세조 사후 무려 540년 동안 훼손되지 않았다고 한다.
광릉 아래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가 있다. 원래 통일신라 시기에 건립된 운학사 자리인데, 정희왕후 윤씨가 자신의 남편을 추모해서 봉선사라고 이름 지어 능침사찰(왕과 왕비의 능침을 수호하고 명복을 비는 사찰)로 삼았다. 이 때문에 숭유억불 기조에서도 교종의 중심이 되어서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임진왜란과 6.25 전쟁으로 불타 괘불, 동종과 봉선사 느티나무만이 살아남았다. 나머지 건물은 1970년대에 재건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지난 17일 세조와 정희왕후의 장지인 광릉과 그를 추모한 봉선사로 향했다.
세조가 잠든 광릉
대중교통으로 광릉에 오려면 최근 연장된 수도권 지하철 4호선을 타고 진접역에서 내려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하는 남양주 21번 버스를 타면 된다. 차로 오는 경우 서울외곽선 퇴계원 나들목에서 47번 국도를 타고 장현 나들목에서 다시 98번 지방도 금강로를 따라가다가 오른편에 광릉으로 빠지는 길로 나가자. 봉선사천에 나란히 난 길을 가다 보면 오른편에 왕릉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입구에서 능참봉이 상주하고 제사 물품을 보관했던 재실을 지나 주변을 보니 나무들이 빽빽하다. 나무의 연령들은 500년이 넘은 것들이 많은데, 세조 사후부터 오랫동안 관리된 흔적이다. 이 정도로 울창했으면 조선조정에서도 관리에 상당히 신경 썼음을 알 수 있는데,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에 한명회가 왕께 아래처럼 아뢴다.
세조(世祖)께서는 자주 풍양궁(豐壤宮)에 거둥하여 밤을 지내며 사냥하셨으므로 짐승을 잡은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성종 17년(1486) 10월 13일 기사>
▲ 광릉 주변은 수많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있다. 무려 500년의 역사를 가진 광릉숲은 2010년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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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하면 왕위를 찬탈하고자 계유정난을 일으켜 반대 세력인 김종서와 황보인을 숙청한 데다가 조카 단종을 영월로 유배시켜 살해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말 그대로 피의 역사로 얼룩지고 시끄러웠던 삶인데, 능침 주변은 국립수목원이 특별히 관리하는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이라는 것이 참 미묘하다.
▲ 정자각을 가운데로 하여 두 능이 V자형으로 흩어진 형태를 하고 있는 광릉. 이러한 양식의 능을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라고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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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 앞에는 두 능이 보이는데, 정자각 중심으로 V자형 끝에 서로 떨어진 구조다. 왼쪽이 세조, 오른쪽이 정희왕후가 묻혀 있다. 정희왕후는 세조가 승하한 지 15년이 지난 후(1483)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에는 각 무덤 앞에 정자각이 하나씩 있었다.
그 이유는 이미 삼년상이 지난 세조의 능 앞에 치러진 제향은 길례였지만, 이제 막 국상을 치른 왕후의 제향은 흉례에 속해 서로 양립이 불가했기 때문이다. 왕후의 삼년상을 마친 후에 두 정자각을 오늘날 중앙 위치에 하나로 통합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형태의 능을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라고 하는데, 광릉이 최초의 사례다.
또한 광릉은 조선왕릉에 또 다른 이정표를 남겼는데, 세조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라고 했다. 그래서 능에 석실 대신 관을 구덩이 안에 놓고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지는 회격으로 방을 만들었다.
▲ 멀리서 바라본 세조의 무덤. 무덤 안은 석실이 아닌 회격방으로 이뤄졌는데, 세조의 바람과는 달리 시체가 썩기 어려운 구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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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사 이야기
광릉 아래에는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가 있는데, 원래는 고려시대 법인국사 탄문이 창건한 운악사라고 한다. 이후 세종 때 선교양종으로 통합하면서 폐사되었다가, 정희왕후가 남편 세조를 추모하면서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예종 1년(1469) 89칸의 규모로 다시금 중창하면서 봉선사로 이름이 바뀐다.
▲ 500년 수령의 느티나무.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살아 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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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유억불로 가득했던 조선이었지만, 세조는 젊을 때부터 불교에 호감을 가졌다. <석보상절>을 펴낸 데다가 공자보다 석가모니가 낫다고 말했을 정도니까. 이는 왕실 집안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아들인 예종도 이곳에 직접 방문해 아버지를 추모하며 절의 현판을 직접 쓰고 동종 제작을 직접 후원했다.
▲ 보물 제397호 봉선사 동종. 두광 앞에 적혀 있는 문자는 옴(?). 그 아래 적혀 있는 산스크리트 문자는 '옴 마니 반메 훔'. 그 아래에는 한자로 명문이 새겨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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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종각 동종 주변으로 있는 형형색색의 소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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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각 뒤편 대의왕전을 지나 왼편으로 보면 석탑과 그 뒤로 팔작지붕으로 된 건물이 보인다. 그런데 현판과 기둥에 걸린 세로로 쓴 구절('이를 주련(柱聯)이라고 한다')이 우리 한글로 되어 있다는 게 상당히 특이하다. 현판은 '대웅전' 대신 '큰법당'이라고 적혀 있고, 주련은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부처님 공덕 다 말 못 하고
허공을 재고 바람 얽어도
큰 바닷물을 모두 마시고
온누리 티끌 세어서 알고
▲ 봉선사 큰법당. 현판과 주련이 한글로 된 게 이채롭다. 건물도 철근콘크리트 구조인데, 오히려 1960~1970년대를 대표하기에 등록문화재 제522호로 지정되었다. 큰법당 앞 석탑 안에는 운허 스님이 1975년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의 사리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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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과 달리 운허는 젊은 시절 독립운동가의 절개를 지키며 해방 후에도 불교계에서 큰 역할을 했다. 국내 최초로 불교사전을 편찬하고 대장경 국역사업에 힘을 쏟았는데, 큰법당은 어찌 보면 그의 인생을 축약한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1960~1970년대 기술을 대표하는 철근 콘크리트 양식으로 지어서 2012년 등록문화재 제522호로 지정되었다.
봉선사 입구 현수막을 보면 경전을 중시하는 '교종사찰의 본산'이라고 쓰여 있다. 교종 하면 옛날에 왕족과 귀족 가문들이 선호했던 종파인데, 오늘날 봉선사는 이를 뛰어넘어, 불교경전 번역과 불교 대중화의 선구자로 우뚝 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양주를 대표하는 왕릉 중 하나인 광릉. 이곳의 묻힌 세조는 계유정난이라는 피와 숙청으로 얼룩진 삶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가 이곳에 영면한 후에는 그의 생전과는 너무 다르게 주변이 너무나 고요하다. 나무들은 전란을 피해 능침을 500년 넘게 지키고 있고, 숲에는 천연기념물을 포함한 수많은 동식물들로 가득하다.
세조를 추모한 봉선사는 500년 전 예종이 후원했던 동종과 사찰 앞 느티나무와 1970년대 콘크리트 건물인 큰법당이 조화를 이뤄 능침을 수호하고 있다. 이제는 오백 년 광릉숲 전체를 보호하는 사찰로 거듭나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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