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친구, 민주화 헌신... 박형선 해동건설 회장 별세

김동규 2022. 12. 25.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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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글] 징역 10년 선고, 11개월 수감생활도

[김동규 기자]

 고 박형선 해동건설 회장.
ⓒ 천지장례식장
지난 24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과 5·18 민중항쟁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던 박형선 해동건설 회장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70.

민주화운동가 출신 사업가였던 고인은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박기순 열사의 둘째 오빠이자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숨은 공로자다. 동시에 지난 1970년대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의 주역이었다.

지난해 6월에 박형선 선배를 인터뷰해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 이야기를 기록해 두었다. 당시 박 선배에게 "돌아가시면 공개하겠다"고 말하자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그날 이후로는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날이 무척 일찍 왔다.

지난 1970년대 당시 전남대 학생운동은 서클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특히 71학번들이 주도한 '민족사회연구소(아래 민사련)'의 활동이 주요했다. 민사련을 주도한 건 윤한봉, 박형선 등이었다. 이들은 각종 시위를 개최했고, 전남대 농과대학 학생회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이후 전남대 활동가들은 1974년에 일어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아래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다. 당시 전남대 활동가들의 민청학련 사건 연루에는 특이점이 있었다. 타 지역 활동가들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검거돼, 조직이 노출됐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시위 한 번 못 하고 검거됐다.

광주는 상황이 달랐다. 광주 활동가들은 타지역 활동가들의 검거 소식을 듣고 시위를 준비했다. 1974년 4월 3일, 박정희 정권이 긴급조치 4호를 발표했다. 박 정권은 민청학련 관련자들에게 4월 8일까지 자수하면 선처하겠다고 엄포했다.

그러나 전남대 활동가들은 자수하지 않았다. 대신 4월 9일에 전남대에서 시위를 진행하기로 했다. 골방에 모여, 눈물을 흘리며 내린 결정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문덕희, 이학영(현 국회의원) 등을 체포했고, 광주 활동가들에 대한 수사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4월 9일, 윤한봉, 박형선, 최철 등이 사직공원 팔각정에서 만나 계림동에서 전남대로 향하는 스쿨버스에 탔다. 버스가 전남대에 들어가는 길목인 옛 서방삼거리(현 서방시장)에 정차하자 박형선이 뒤차로 환승해 유인물을 배포했다. 이 모습을 본 버스기사는 아예 차를 멈춰 세웠다. 박형선은 그 즉시 유인물을 들고 학교로 뛰기 시작했다. 농대로 달려가 구호를 외치고 유인물을 배포했다. 그는 탱자나무가 자라던 온실에서 검거됐다.

이후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재판에 넘겨졌다. 박형선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이 폭동을 일으켜 국가 주요 기관을 점거하고 정권을 인수하려 했다"고 발표했음에도, 민청학련 관계자 대부분을 사건으로부터 10개월 후인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했다.

광주의 민청학련 관계자들은 석방 직후 '전남구속자협의회'를 결성했다. 이는 광주의 부문별 대표자들을 총망라한 빅텐트 단체였다. 훗날 5.18 마지막 수배자가 되는 고 윤한봉 선생이 협의회 초대 회장을 맡았고, 박형선이 2대 회장을 맡았다.

1976년 11월, 가톨릭농민회가 함평 고구마 사건 피해보상대책위를 구성했다. 당시 이 사건 해결을 뒷바라지했던 이들이 있다. 바로 윤한봉, 박형선, 이강과 같은 광주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함평 고구마 사건은 상당한 역사적 의미를 남기고 해결에 이르렀다.

그즈음 박형선은 보성건설(현 한양건설)을 창업했다. 척추와 허리가 좋지 않아 두 번의 수술을 하는 과정에서 돈을 만들어야겠다고 절감해 창업에 이르렀다. 보성건설에는 최권행, 정상용, 이양현 등이 함께 했다. 5.18 당시 민주투쟁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정상용은 보성건설 영업부장이기도 했다. 보성건설 사무실은 5.18 당시 회의실로도 활용됐는데, 창고에 무기를 쌓아두고 두 차례 회의를 진행했다.

1976년 박형선의 여동생 박기순이 전남대에 입학했다. 이후 박기순은 전남대 교수들이 박정희 군사교육에 반발해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하자, 가두시위를 주도해 학교에서 제적된다. 박기순은 이에 굴하지 않고 위장취업자가 되어 노동운동에 헌신했으며, '들불야학' 창립을 주도했다. 그러나 박기순은 들불야학 결성 직후인 1978년 12월 26일, 불의의 연탄가스 누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5.18 직후 살아남은 사람들은 박기순과 함께 들불야학에서 활동했던 윤상원이 전남도청에서 세상을 떠나자, 두 사람을 기리는 의미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어 헌정했다. 박형선 역시 5.18 민중항쟁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는 1980년 5월 17일, 계엄사에 예비검속돼 고초를 치른 후 상무대 영창에 수감된다.

민청학련과 5.18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박형선은 직후에도 사업가이자 활동가의 삶을 살았다. 5.18 마지막 수배자였던 고 윤한봉 선생의 미국 밀항을 지원하기도 했다. 5.18 당시 광주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가였던 윤한봉은 군부에게 검거되지 않고 1981년 미국으로 밀항했다. 이는 1년 뒤, 전두환 정권에 의해 발각되었다. 박형선은 또다시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박형선은 1989년 당시 임수경 방북사건으로 수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2000년이 되어서야 임수경과 마주쳤다고 회고한다. 그해 5.18 전야제 직후 '새천년 NHK' 사건이 불거졌다. 당시 박형선은 몇몇 사람들이 2차로 유흥주점(새천년 NHK)에 가려고 하자 "광주다. 오월이다"라고 호통을 친 후 몇 사람과 함께 본인의 집에서 조용히 술을 마셨다.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도 깊다. 박형선은 민청학련 사건 당시 함께 고초를 겪었던 이들의 소개로 노무현을 알게 됐다.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역 순회 경선 당시에는 광주에서 노무현 후보를 알리고 지지를 호소했다. 결국 노무현은 광주 경선에서 승리했고, 본격적인 '노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박형선은 언론으로부터 '노풍의 주역'이라는 평가받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도 전남 담양을 찾아 박형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꼭 보고 싶다,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노무현의 말은 그렇게 마지막이 되었다. 그날, 박형선은 노무현을 만나지 않았다. 세상이 보고, 언론이 보고 있다고 말했지만 박형선에게는 미처 갚지 못한 마음의 빚이 남았다.

박형선은 지난 2011년 당시 부산저축은행 불법 대출 사건에 연루돼 구속·기소되기도 했다. 그러나 2013년 대법원은 박형선의 불법 대출 등 혐의에 대해 최종 무죄 선고를 내렸다.

고 박형선 회장은 오는 26일, 국립 5.18민주묘지에 안장된다. 26일은 그의 여동생,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박기순 열사의 기일이기도 하다. 민청학련 사건과 5.18 민중항쟁에 깊이 개입했던 민주화운동가 박형선은 이렇게 영원한 안식에 들게 됐다.

민청학련 사건 당시 스쿨버스에서 내려, 전남대 농대로 뛰어가 '유신독재 타도'를 외쳤던 그 젊은 열정 그대로 박형선을 기억하고자 한다. 이 자리를 빌어,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헌신했던 고 박형선 선배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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