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무자비가 아니라 긍휼의 마음으로

2022. 12. 25.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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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원·청란교회 목사, 동서대학교 석좌교수(가족생태학), 하이패밀리 대표

24일 다일공동체의 ‘거리 성탄 예배’를 다녀왔다. 영하 15도의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끼 밥을 위한 노숙자들의 긴 줄이 이어졌다. 아픈 다리를 절뚝거리며 줄을 못 찾아 헤매는 이도 있었다. 번호표를 받기 위해 내미는 손이 후덜덜 떨렸다. 그의 악 문 입도 함께 떨고 있었다. 비교적 이른 시간에 자리를 잡은 이들의 무르팍에는 담요 대신 신문이 놓여 있었다.

길거리에서 3명을 놓고 시작된 거리 성탄 예배는 올해가 서른다섯 번째다. 이제는 3000여명이 몰려올 정도로 커졌다. 실내 배식을 위한 공간도 마련됐다. 변한 것은 밥퍼 공동체만이 아니었다. 588 집창촌 골목은 어느새 번화가가 되었고 교통 요충지가 되어 있었다. 요 몇 년 새 마천루의 아파트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솟았다. 이날 따라 밥퍼 본부가 왜 그렇게 작아 보였는지.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것이 변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은 노숙자들의 배고픈 삶이었다.

내년이면 베이비 부머들의 중심축인 1958년생들이 지공선사(地空禪師·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만 65세 이상 노인)가 된다. 그들이 태어났을 때 국민소득은 81달러였다. 지금은 4만달러를 내다보고 있다. 무려 377배의 성장이다. 이런 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 기적이겠는가. 세계은행이 2019년 7월에 발표한 전년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조6194억 달러(약 1895조원)로 세계 12위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의 세계 GDP 순위가 9위로 오를 것이라는 전망치도 내놓았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한국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지위 변경을 한 것은 늦어도 한참 늦은 것이었다.

이렇듯 우리 지위가 선진국이 되었다고 해서 너나없이 모든 사람이 배고픔을 이겨낸 것일까. 여전히 ‘환과고독(鰥寡孤獨)’의 세상이다. ‘맹자’에 나오는 환과고독은 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을 이른다. 사자성어가 그 형편을 처절하게 대변한다. 鰥:홀아비 환, 寡:적을 과, 孤:외로울 고, 獨:홀로 독. 홀아비·과부, 어리고 부모 없는 사람, 늙고 자식이 없는 사람 등이다. 선진국이 되었다면서 또 다른 이면은 어둡고 암울하다. 고독사 대국이란 별명에다 자살률 세계 1위 등이 그렇다. 초고령화 사회를 눈앞에 두고 있지 않은가.

마치 건물이 높아지면 그림자도 함께 길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양극화와 가족 분화 등으로 빈곤과 결핍, 질병에 시달리다 죽음마저도 외면받는 노인들의 고립은 심각하다. 이래서 맹자에게 있어 선정(善政)의 최우선 과제는 구휼(救恤) 대책을 세우는 일이었다. 맹자는 이것을 현군의 길이라 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즉위하자마자 지방 수령들에게 환과고독 대책을 가장 먼저 주문했다.

거리 예배의 밥퍼봉사를 하겠다고 나선 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아들 넷을 신부로 키워낸 어머니가 있었다. 이춘선(1921~2015) 할머니다. 40대 후반에 열한 번째 아이로 낳은 막내가 사제품을 받고 임지(任地)로 떠나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작은 보따리 하나를 건넸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풀어봐라.”

막내 신부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바로 풀어봤다. 그리곤 목이 메어 한참을 울었다. 보따리 안에는 막내 신부가 갓난아기 때 입었던 배냇저고리와 함께 편지 한 장이 있었다. “사랑하는 막내 신부님, 신부님은 원래 이렇게 작은 사람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등 따습고 배부르다고 뻐길 일도 아니다. 내가 봉사대원이랍시고 우쭐댈 일도 없다. 그저 겸손함과 자비함으로 저들을 돌보아야 한다. 왜? 저들 속에 내가 그렇게 만나고 싶은 작은 예수가 있어서다.

“너(희)는 내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 집으로 맞아들이지 않았고 병들고 갇혔을 때 돌보지 않았다.”(마 25:42~43)

인생의 마지막 날, 듣게 될 판결문 중 하나다. 언제 내가 주님을 외면한 일이 있냐며 핏발 선 눈으로 따져 묻자 재판장(왕)이 선언한다. “내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이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일이 곧 내게 하지 않은 일이다.”(마 25:45)

이날 거리 성탄 예배의 마지막 시간, UN 인권 선언문 19조가 낭독되었다. 내가 보기에 더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의 헌법을 기억하는 일이었다.

“국가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에 터 잡은,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제10조). 나아가 헌법 34조는 이렇게 선언한다. ①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②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 ③국가는 여자의 복지와 권익의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④ 국가는 노인과 청소년의 복지 향상을 위한 정책을 실시할 의무를 진다. 5조는 이렇게 명시한다. “신체 장애자 및 질병⸱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 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그러고 보니 밥퍼 최일도 목사야말로 목민관 중에 목민관이었던 셈이다. 그의 막내딸이 고백했다. 한때는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밉기도 했다고.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야 가족에게 바치는 시간 대신 배고픈 이들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안타까운 것은 복지 한국의 대명사 격인 밥퍼가 철거 명령을 받고 사라질 위기에 있단다. 가혹한 법의 잣대 대신 구휼의 마음으로 저들을 위한 대책을 세울 수 없을까. 관계자들의 목민관 정신의 회복을 기대해 본다. 또한 밥퍼 봉사에 참여한 65만여명의 봉사자들도 ‘지못미’의 탄식으로 후회하는 일 없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자. 말로만 하는 자비를 무자비라 하지 않는가. 우리는 사라져도 다일 공동체의 밥퍼는 살아남아야 옳다. 거기에 주님의 마음과 사랑이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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