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신림동 고시촌에 가봤습니다 [우리 도시 에세이]
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고시촌이 과연 꿈꾸는 자들의 공간이었을까? 본디 입신양명은 사회나 국가에 좋은 일을 한다는 뜻이었으나, 어디 세상이 그렇게 한가하기만 하던가. 오래전부터 이미 출세의 다른 이름으로 변질하였다.
등용문이라 했다. 시험을 통과하면 살아서는 부와 권력, 사회적 지위는 물론 죽어서도 명예를 오로지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너도나도 이 관문을 통과하려 모든 걸 걸고 매달릴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이렇듯 등용문을 통과한 동량들은 대체로 초심을 잃었고 특권의식에 사로잡혔다. 최근의 일이 아닌, 뼛속 깊이 내려오는 DNA다.
특권의식을 넘어 지배의식마저 갖기 일쑤다. 2022년 대한민국을 호령한다는 군상 면면을 보면, 이 암담한 현실이 어디에서 연유하였는지 쉬이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과거(科擧)가 뿌리이니 이미 1천 년을 넘겨 온 의식으로 모두를 가르고 지배하는 경계선이었다. 과거시험이 일제 강점기에는 고등문관시험으로, 해방 후에는 고등고시로 변모했을 뿐이다.
▲ 도림천 신림동 고시촌은 좌측 대학동과 우측 서림동 너른 공간에 퍼져 형성된 특이한 공간이었다. |
ⓒ 이영천 |
신림동은 1960년대 도심에서 밀려난 빈민이 이룬 공간이다. 바뀌기 전 숫자로 나열된 동 이름은, 밀리고 밀려 마을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연유하였다. 1975년 우리나라 최고 학부라는 서울대학이 이곳으로 이전해 온다. 서울대의 존재는 이곳에 '고시촌'이라는 특이한 공간을 창출해냈다.
▲ 녹두거리 신림동 고시촌의 중심을 형성하던 녹두거리. 1980년와는 대조적으로 한적한 모습이다. |
ⓒ 이영천 |
고시촌의 마을 이름은 대학동으로, 행정구역으론 서울대학을 망라하는 넓은 공간이다. 관악산에서 발원한 구불구불한 도림천을 사이에 두고, 고시촌은 맞은 편 서림동에도 퍼져있었다. 1980년대를 지나며 대학동 골목을 '녹두거리'로 불렀고 '독재 권력의 주구가 되려 한다'며 이곳 수험생을 비아냥대기도 했다.
소설가 이호철이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소설을 신문에 연재하던 때인 1966년, 서울 인구는 377만 명이었다. 한강 이북과 영등포를 망라한 공간에 한정된 숫자이니 지금 보아도 가히 만원이다. 전쟁이 끝난 1954년 124만, 1959년 200만, 1967년 400만, 1970년 500만이니, 불과 16년 만에 380만 명이 서울로 몰려든 셈이다.
이는 전적으로 사회변동으로 인해서다. 여기에 폭발적 인구 증가를 상징하는 베이비붐도 같이 밀려온다. 1963년 서울시는 행정구역 확장으로 이에 대응한다.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은, 변두리에 빈민촌을 형성한다. 당장 생계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거주 공간 확보와 안정된 취업,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이 우선이다. 하지만 나라는 폭발적으로 몰려드는 인구를 수용할 능력도 생각도 없었다.
서울은 빈민이 점거한 도시로 변해간다. 산등성이를 비롯한 빈 땅이 판잣집으로 꽉 들어찬다. 이들은 주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두꺼운 종이상자·루핑·목재·아연철판 등을 사용해 집을 짓는다. 무척 열악한 주거환경이다.
1961년 8만 8천여 동, 1964년 11만 6천여 동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상황에서 도로 및 상하수도 등 기반시설은 그림의 떡이다. 하물며 위생을 따질 계제인가? 나라는 이들이 사는 집에 '무허가 불량 주택'이라는 영광스러운 딱지를 붙여 준다.
빈민촌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환경이 열악했다. 비바람도 막아내지 못한다. 분뇨는 일상적으로 발에 차인다. 마시는 물은 말할 것도 없고 생활 쓰레기는 그 자체로 재활용품이다. 빨래와 목욕은 언감생심이다. 위생은 물론 난방과 기초 생활도 해결 난망이다. 거지 떼가 몰려 사는 모습 다름 아니었다.
▲ 도림천(1977) 수해를 당했는지 곳곳이 부서진 도림천 모습. 개울물로 머리감기와 빨래 등을 해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 서울역사박물관 |
봉천동과 신림동, 미아리와 상계동이 대표적이다. 정착촌은 그 자체로 빈민의 장소이동에 불과했고, 이들 정착촌을 기점으로 주변으로 더 넓은 빈민촌이 확장되는 빌미를 제공한다.
무작정 상경이 빗어낸 비극이다. 안주하지 못하는 정주 여건과 불안한 고용이 고스란히 투영된 모습이다. 못 배우고 가진 것 없이 서울로 상경한 농부가 맞닥뜨린 현실이다. 과연 서울은 도시빈민으로 꽉 채워진 만원이었다.
고시촌의 형성
▲ 그날이 오면 사회과학 서점 '그날이 오면' 모습. 경영난 등으로 녹두거리에서 맞은 편 초등학교 뒤로 몇 년 전 이전했다. 서점의 이전은 고시촌 변화는 물론 우리 사회가 변화해 온 한 단면 그대로다. |
ⓒ 이영천 |
서울대 법대 입학은 성공을 보증하는 수표에 버금갔다. 당시 사법, 행정, 외무의 '3대 고시'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학생들이 자취, 하숙하는 공간에 고학하는 고시생이 자리한다. 1970년대 말 서울대와 가까운 도림천 남북 공간이 고시생으로 점유되기 시작한다. 절간이나 궁벽한 산촌에서 행해지던 수험생활과는 전혀 다른 양태다.
이들을 겨냥한 전용 학원도 등장한다. 이런 영향이었는지, 1980년 즈음 기존 낡은 집들이 형태를 변모시켜 수험생을 수용하는 형태로 변화해 간다. 소위 절대수요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수험생 전용 고시원의 탄생이다.
자취나 하숙과는 차원이 다른 거주 공간이다. 국가고시 등을 준비하는 장기 수험생들을 주 대상으로 하였다.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한 무척 협소한 경제적인 공간구성이다. 무엇보다 저렴한 임대료에 시험을 준비할 여건을 갖췄다는 특징을 지녔다.
신림동으로 서울대 재학생이나 졸업생은 물론 고시를 준비하는 다른 학교 출신도 몰려든다. 고시생 전용 공간으로 성장이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한다. 이 공간에서 이뤄지는 정보교환이나 고단한 수험생활을 공유하는 동류의식이 이 공간을 규정짓는 특징으로 자리한다. 고시촌 특유의 정서를 뒷받침하는 시설이 뒤따라 들어선다. 고시촌 문화의 형성이다.
공간 해체와 재구성
▲ 대학동 골목 예전 모습은 간데 없고, 4~5층의 다가구 형태로 늘어선 집이 언덕 끝까지 이어진다. |
ⓒ 이영천 |
이때를 전후하여 고시원의 용도가 전용되기 시작한다. 값싼 임대료는 지불능력이 낮은 계급이 주거 용도로 점령해 나가는 요인을 제공한다. 2000년대 들어 독신 회사원이나 저임금과 비정규직 등 고용이 불안정한 노동자들이 고시원이라는 열악한 주거시설로 대거 몰려든다. 거주환경이 더 열악해는 '하방 여과'를 보여주는 현상이 이때 서울 전역에서 나타난다.
신림동도 예외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주 구성원은 수험생이었다. 고시촌이 결정적인 타격을 받아 공간 해체를 맞은 건 순전히 제도 탓이다. 행정고시는 2010년에, 외무고시는 2013년 폐지되어 5급 국가공무원 공개 경쟁 채용시험으로 바뀌었다. 사법고시는 2017년 폐지되었다.
▲ 고시촌 흔적 공간의 빠른 변화에도 불구하고, 옛 고시촌의 흔적은 아직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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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촌은 이제 명맥만 근근이 유지하는 실정이다. 열악한 대중교통으로, 고시촌 주변 임대료는 가격경쟁력이 있었다. 이런 복합 요인으로 수험생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독신 회사원이나 노동자들이 채워가는 중이다.
▲ 박종철 거리 녹두거리 인근에 명명한 '박종철 거리'의 풍경. 공사 중인 건물은 박종철 기념관으로 추정된다. |
ⓒ 이영천 |
공간이 꾸는 꿈이 실현된다면, 수만 명 젊은이가 매일 이 공간을 소비할 것이다. 골방에 틀어박혀 등용문을 통과하고자 했던 과거 젊은이의 꿈과는 차원이 다르다. 공간이 꾸는 꿈은 도전정신과 패기, 기발한 기술로 세계를 바꾸려는 것이다.
뛰어난 하나의 기술이 세계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잘 아는 사실이다. 관악산에서 흘러내린 도림천 물줄기가 한강을 넘어 서해로, 서해를 넘어 전 지구의 바다까지 스며들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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