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치우는 일도 업무의 일부? 오지 근무의 특권 [보그(Vogue) 춘양]

김은아 2022. 12. 24.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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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양 서벽리에 수북히 쌓인 눈, 싫지만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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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아 기자]

시루떡에 쌀가루 뿌리듯 눈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린다. 내가 근무하는 곳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해발 600고지에 위치한 깊은 산골이다. 서벽이라는 지명은 푸른 옥이 많이 나는 옥석산의 서쪽에 마을이 위치한다 해서 붙었다.

서벽리는 봉화읍에서는 24km, 춘양면에서는 11km 떨어진 곳에 있다. 서벽에서 춘양까지는 굽이굽이 1차선 도로가 나 있어 춘양면내까지는 차로 25분, 읍내까지는 50분이 걸린다. 춘양면과는 온도차가 3도 이상 나고 읍과는 3~5도 이상 차이가 나니 같은 춘양이라고 해도 이곳은 정말 청정한 고산지역, 오지인 셈이다.
 
▲ 수목원에서 내려다 본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전경 해발 600고지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서벽리 마을 전경이다.
ⓒ 김은아
우리 회사는 눈이 오면 전 직원이 부서별로 맡은 영역을 제설하는데 부서를 옮기기 전에는 딱히 눈 치울 일이 없어서 타부서 직원들의 애로 또는 눈 치우는 기쁨(?)을 잘 알지는 못했다. 그저 누군가 치우는 눈, 누군가 치워놓은 길을 안전하게 사용할 뿐 그 눈을 치우는 일을 해보리라곤 생각을 못 했다. 역시 사람은 무엇이든 해봐야 맛을 안다. 우리 부서 업무 중 주요 업무는 민원 처리이다. 

늘 민원인의 처지에서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작은 것 하나라도 주머니 뒤집어 세탁하듯 이리저리 살피고 또 살피는 것이 일상이다. 그러다 보니 눈이 내리거나 비가 오면 우리는 정말 바빠진다.

수목원에는 관람하다 비가 내리기라도 하면 우산을 가져달라고 아우성치는 민원인들이 있기에 비가 오면 우산을 배달하는 것도 우리의 일상이다. 때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민원인들이 좀 더 편안할 수 있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눈이 오는 날은 또 다르다. 근무하는 우리도 또 방문객들도 안전사고에 노출될 수 있으니 건물 앞, 주요 전시원의 눈을 치워 안전거리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실 집에서도 눈을 치워본 일이 없어 눈 치우는 일이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난생 처음 써보는 넉가래라는 넓적한 삽으로 눈을 밀면서 힘을 잔뜩 주니 항상 눈을 치우고 나면 팔과 허리가 뻐근하다. 해보지 않은 일이니 만큼 나의 눈 치우기는 상당히 어설펐다. 

아침 출근 중 자신 있게 길을 걷다 보면 보기 좋게 엎어졌다. 눈 덮인 노면 위로 단단한 빙판이 있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우아하게 엎어진 것이 아니었다. 누가 볼까 부끄러웠다. 그럴 일도 아닌데 말이다. 아픈 것은 뒷전으로 미루고 퍼뜩 자리를 털고 일어나 총총총 걸어 사무실에 도착했다. 

오전 9시가 되면 우리 모두는 손바닥이 빨갛게 코팅된 면장갑을 낀 후 넉가래, 삽, 빗자루를 들고 우리의 영역으로 간다. 능수능란하게 눈을 치우는 나의 동료들은 이 겨울을 매우 능숙하게 다루는 듯하다.

넓은 면적을 신속히 처리하기 위해 동료들은 '짱구'를 잘 굴려 넉가래를 이어붙이고 달린다. 쌓인 눈은 넉가래 앞면으로 밀고, 노면의 얼음은 넉가래를 뒤집어서 민다. 밀고 남은 얼음 부스러기와 눈가루는 빗자루로 쓱쓱 민다.
 
▲ 각양각색으로 눈을 치우는 모습들 우리들은 빗자루, 눈삽, 넉가래를 들고 밀고, 깨고, 쓸기를 반복하며 능숙하게 눈을 치운다.
ⓒ 김은아
 
▲ 넉가래를 이어붙여 눈치우는 동료들 짱구를 잘 굴렸다. 넉가래를 가로로 길게 이어서 밀면 넓은 면적도 금새 치울수 있다. 빙판길만 아니면 즐거운 달리기다.
ⓒ 김은아
그런데 이건 뭐지? 갑자기 외인구단 같은 장정 몇이 장비를 메고 나타났다. 바람으로 눈을 치우는 '블로어'였다. 타 부서 직원들이 지원을 왔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최첨단 장비에 긴 장화를 신은 이들은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정예부대 같았다. 우리의 넉가래는 바닥에 눈 자국을 남겼지만, 이들의 블로어는 눈의 흔적조차도 지웠다. 그들은 멋졌다.
시골에서 딱지치기, 구슬치기만 하고 놀다가 마치 도시에서 온 아이들이 컴퓨터 오락 게임하는 것을 처음 본 것마냥 우리는 그저 신기하게 바라봤다. 힘을 주어 눈을 밀고 쓰는 동안 그들은 한 손으로 멋지게 장비를 매고 눈바람을 일으키며 길을 내었다. 그러나, 계속 쏟아지는 눈을 막아낼 수는 없으니 우리는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을 내고 일단 철수한다. 점심이 되면 또 나가서 한바탕 눈을 치워야 하니 말이다. 
 
▲ 눈을 치우는 블로어 최첨단 눈치우는 장비를 들고 나타났다. 손에 든 넉가래가 무색하게 참으로 신기하게도 눈이 없어진다.
ⓒ 김은아
아침부터 한바탕 눈을 쓸어내고 나니 나무 사이에 내려앉은 눈이 멥쌀가루를 살살 뿌려놓은 쑥버무리처럼 보인다. 함께 쓸고 닦고 치우고를 반복하며 어린 시절 눈밭에서 놀던 때로 돌아간 듯 신이 난다. 다들 이 순간만큼은 '어서 눈을 치우자!'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눈을 치우면서 그간 못 만났던 타부서 동료들도 만나고 눈 치우는 소소한 기쁨도 누린다.
 
▲ 나무에 살포시 내려앉은 눈 황금측백과 구상나무 등 가지 사이에 쌀가루를 흩어뿌려놓은 듯하다. 꼭 쑥버무리 같다. 눈 치운 뒤에 밀려오는 허기가 그리 보이나 보다.
ⓒ 김은아
 
도시라면 경험하기 어려운 업무 일과 중의 하나다. 오지에서 근무하는 이의 혜택일지도 모른다. 눈이 오면 모두 뛰쳐나가 눈을 쓸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와 일을 한다. 그런 중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은 오지의 낭만이기도 하다. 우리는 눈도 쓸고 성탄준비도 나름 해본다.
사방을 둘러봐도 나무와 눈 천지라 이곳에서 근무하는 우리 자신이 크리스마스 트리에 알록달록 달린 장식품인 듯 느껴진다. 비록 네이비 유니폼을 입어 색채의 대조감은 없지만, 사람이 주는 냄새, 그리고 온기의 색감은 다양하니 말이다.
 
▲ 우리들의 크리스마스트리 눈 치운 뒤 손바닥이 빨간 코팅장갑도 나무에 걸어 놓으니 그럴싸하다.
ⓒ 김은아
 
▲ 눈 즐기기 짬을 내어 잠시 눈사람도 만들어본다.
ⓒ 김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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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음식의 생명은 소스이고, 사람의 핵은 생각이라고 하지요? 노동에 번외 업무라고 생각하면 하고 싶지 않겠지만, 도시의 일상에서 경험해보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소소한 삶의 기쁨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어쩌면 특권인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의 발걸음을 편안하게도 하지만 그 길을 준비하는 이의 마음도 같이 평안한다면 더욱 이상적이겠지요? 역시 인생은 누리는 자의 것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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