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닥터님의 애장펜은 어떤 건가요?" [김덕래의 만년필 이야기]

김덕래 2022. 12. 24.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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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반 325 오션 EF촉… 한겨울에 만나는 푸른 바다

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기자말>

[김덕래 기자]

무엇이든 다 적당한 때가 있다 합니다. 유년기엔 몸을 써가며 부지런히 뛰어놀아야 제대로인 것처럼, 학창 시절은 배우고 익히는 시기입니다. 그 지식을 바탕으로 청년기를 꽃피워야 안정된 장년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매 순간 충실하게 살아도 반드시 여유로운 노년이 보장되진 않습니다.

한 시대는 마치 하나의 생명체와 같습니다. 늘 같은 모양새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조금씩 그 형상을 바꿔갑니다. 사람도 갓 태어났을 때와 다 자란 후의 외양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가치기준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생애 첫 직장에서 정년퇴직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어려운 일입니다. 아버지 세대에서 같은 자리에 뼈를 묻는 것이 끈기였다면, 근래에 이르러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곳으로 움직이는 것은 성실로 불려야 옳습니다. 나의 가치를 끌어올리는데 집중한다는 말은, 나에게 정성을 다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한자리에 오래 머무르는 이는 그저 변화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지금의 자리에서 보다 나은 내일의 나를 만나고 싶어서입니다. 반면 떠나는 이는,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만만찮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거처를 옮기는 편이 합당하다 생각해서겠지요. 그러니 어느 쪽이 더 지혜롭다 가름할 수 없는 문제이며, 굳이 격려 한 마디라도 더 보태줘야 하는 쪽은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나는 사람입니다. 안정된 터전에서 머물길 원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고, 낯선 곳에서 새로 시작한다는 건 적잖은 시련을 감내해야 함을 의미하니까요.

만년필 제조사 라반, 오래된 곳은 아니지만

'라반(Laban)'은 1980년대 초반 대만 허우통에서 출범한 만년필 제조사입니다. 40년 남짓의 그리 오랜 역사를 가진 회사는 아니지만, 만년필용 재료로 흔히 쓰이는 수지를 포함해 황동이나 알루미늄, 전복 껍데기 등 여러 소재를 사용해 펜을 만듭니다. 또 오래 사용한 듯한 엔틱 느낌의 펜에서 시작해, 펜 전체가 뼈대만 남은 것처럼 보이는 스켈레톤 라인을 거쳐, 옻칠과 금박을 쌓아 올린 우루시 만년필에 이르기까지 여러 영역을 넘나듭니다.

만만찮은 기술력을 가진 회사가 분명하지만, 100년 넘는 역사라는 두툼한 철갑을 두른 업체가 즐비한 만년필계에서 라반은 유년기를 지나는 중일 뿐입니다. 하지만 위축될 이유는 조금도 없습니다. 몸집이 크다고 약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요. 기존에 터를 잡은 업체들이 야구에서 뛰어난 선구안으로 포볼을 걸러내는 노회한 타자라면, 라반은 빠른 직구를 바탕으로 크게 휘며 떨어지는 커브나, 급하게 옆으로 꺾이는 슬라이더를 뿌리는 투수가 되면 됩니다. 볼 배합을 잘 하면 어떤 강팀과 맞붙어도 움츠릴 까닭이 없을뿐더러, 그 기세를 꾸준히 이어가면 열성팬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팬의 응원이 선수의 기를 살려주는 것처럼, 필기구 애호가들의 관심은 제조사의 심장을 뛰게 합니다.

이 펜은 2016년 출시한 이래 라반에서 가장 주목받는 시리즈인 325 오션 EF촉입니다. 라반은 펜촉을 자체 제작하지 않고, 독일의 닙 전문 업체 요보(Jowo)사의 것을 받아씁니다. 대만의 선두 업체인 트위스비와 같은 선택을 한 셈입니다. 요보의 스틸 6호닙은 단단하면서도 매끄럽게 잘 써져, 만년필에 익숙하지 않은 사용자도 편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펜촉 브랜드 명 아래 새겨진 GERMANY는 라반이 독일 만년필 브랜드란 의미가 아니라, 펜촉을 생산한 업체가 독일에 터를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브랜드명 위의 숫자 '3952'는 대만 최고봉인 위산(Yu Shan)의 해발고도입니다. 몽블랑이 자사 펜촉에 몽블랑산의 높이인 '4810'을 새기고, 플래티넘이 후지산을 상징하는 '3776'을 담아낸 것과 의도하는 바가 같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겠다는 결기의 상징입니다.
  
 위 좌 - 몽블랑 스타인웨이 F촉 위 우 - 플래티넘 센츄리 보르고뉴 F촉 아래 - 라반 325 오션 EF촉
ⓒ 김덕래
"펜닥터님은 매일 만년필 만지는 일을 하니 갖고 계신 펜도 정말 많겠네요? 다 값비싼 모델들이겠지요? 가장 아끼는 애장펜은 어떤 건가요?"

한국에 몇 안 되는 희소한 만년필 수리공인 저는, 요즘 같은 디지털 세상에 만년필 고치는 일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만년필을 고쳐가며 쓰는 사람들이 정말 있느냐는 물음 다음으로 많이 받는 질문들입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 거주 중인 애호가들도 펜을 보내오는 상황이 되어, 전 세계 여러 나라의 다양한 모델들을 늘 마주하게 됩니다. 만약 만년필 소유욕이 컸다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저도 좋아하는 펜이 몇 있긴 합니다만, 내 것으로 하고픈 욕망 자체는 일반 사용자에 비해 덜합니다. 어차피 내 소유의 것이 된들 사용할 시간도 얼마 없을 테고요. 그래서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단 갖고 있는 만년필이 많지 않습니다. 또 값나가는 펜도 몇 없습니다.

때때로 제게 만년필을 선물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늘 이 펜처럼 말이지요. 어딘가 문제가 있어 제게로 온 펜이 아니라, 만년필을 통해 알게 된 인연이 보낸 펜입니다. 지난 여름의 일이니, 벌써 1년반 가량 시간이 흘렀네요. 올해도 그랬지만 작년 여름도 참 무더웠습니다. 늘 좁은 작업실에서 일만 하는 제가 답답할까 염려되어, 푸른 바다가 연상되는 이 펜을 건넨 게 아닌가 싶어요. 눈도 마음도 피곤할 때 잠시 쉬었다 가라는 듯 말이지요. 배럴 가득 푸른빛을 띄는 마블 문양을 담아, 깊은 바다 앞에 선 것만 같습니다. 그날부터 이 만년필은 제 애장펜중 한 자루가 되었습니다.
 
 배럴 전체가 푸른 빛깔 마블로 가득 찬 라반(Laban) 325 오션 만년필
ⓒ 김덕래
작업실에서 일할 때 가장 시선이 잘 머무는 곳에 보관하고, 강연 같은 외부 일정이 있을 땐 꼭 품에 넣어갑니다. 그러면 아무리 멀고 낯선 곳이더라도, 내편 한 명과 동행하는 기분이 듭니다. 지난 10월 대구에 내려갔을 때도 함께였습니다.
수성구에 있는 범어도서관에서 강연 요청이 있기도 했거니와, 대구MBC 오전 라디오 시사프로 인터뷰가 잡혀 해뜨기 전 출발했습니다. 평일 아침 8시 35분부터 9시까지 담당PD 윤창준님과 아나운서 김혜숙님이 진행하는 '여론현장'에서, 10여 분간 만년필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더러 라디오 방송에 소개되기는 했지만, 스튜디오에서의 첫 생방송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도 이 펜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며 긴장감을 덜었지요. 이렇게 때때로 만년필은 경직된 몸과 떨리는 마음 근육을 풀어주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아나운서 김혜숙님이 진행하는 대구MBC 라디오 시사프로 <여론현장> 생방송 인터뷰
ⓒ 김덕래
만년필은 투정을 부립니다

인터뷰를 마친 후, 수성구에 있는 범어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강연은 오후로 잡혀있었지만, 오전 두어 시간 할애해 방문하는 분들 펜 점검을 했습니다. 증상이 경미한 대부분의 만년필은 세척이나 펜촉 교정 등 현장조치하고, 상태가 심각한 몇 자루는 차선책을 안내했습니다. 나름의 재능기부였는데, 평일 오전 시간이었음에도 생각보다 방문객이 많아 어찌나 반갑던지요. 대구가 그저 한여름 어느 도시보다 더 무더운 곳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막상 가보니 필기구 애정하는 이들이 많은 문화도시였습니다.

만년필은 다른 필기구와는 달리, 평소보다 조금만 관심을 덜 주면 투정을 부립니다. 세척을 해도 내 맘같이 안 써지면, 가능한 한 빨리 구매처에 연락을 취해 문제를 해결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냥 서랍에 넣어버리면, 영영 좋아질 기회를 잃을 뿐이니까요.
 
 범어도서관 1층 로비에서 만년필 점검과 간단한 현장 수리 진행
ⓒ 김덕래
범어도서관에서 주관한 '수성, 감성문화를 만나다'는 지역 내 문화예술인들을 초대해 릴레이 강연을 하는 프로그램이었으니, 타 지역에 사는 저는 초대를 받은 셈입니다. '현대인을 위한 디지털 디톡스'란 주제로, 노모포비아가 일반화된 세상에서 잠시 마음 내려놓고 여유를 가지는 것이 왜 필요한지, 그럴 때 만년필이 어떤 쓸모가 있는지에 대해 소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더는 아날로그의 꼬리만을 붙잡고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디지털이 무조건적으로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니, 서로의 장점만 융합해 핵심가치에 다가서야 할 시점입니다.
 
 범어도서관에서 주관한 '수성, 감성문화를 만나다' 릴레이 강연
ⓒ 김덕래
연말이지만 설렘보다 걱정이 앞서는 요즘입니다. 연일 뉴스에선 새해에 대한 기대보다, 내년은 올해보다 훨씬 더 힘든 한 해가 될 거란 날선 보도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다고 두려워 마세요. 보장된 내일을 사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노력해도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낙심해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실낱같은 가능성마저 아예 없습니다. 만년필계 강자들 틈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제 목소리 내고 있는 라반처럼, 그야말로 주먹 불끈 쥐고 전력투구할 때입니다.
 
 김수환 추기경 잠언집 - 바보가 바보들에게 중 말 한 마디.
ⓒ 김덕래
*라반(Laban) : 1981년 '존(John)'이 세운 대만의 필기구 브랜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으나, 다양한 소재를 활용해 여러 형태의 만년필을 생산해 내는 의욕 충만한 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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