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닥터님의 애장펜은 어떤 건가요?" [김덕래의 만년필 이야기]
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기자말>
[김덕래 기자]
무엇이든 다 적당한 때가 있다 합니다. 유년기엔 몸을 써가며 부지런히 뛰어놀아야 제대로인 것처럼, 학창 시절은 배우고 익히는 시기입니다. 그 지식을 바탕으로 청년기를 꽃피워야 안정된 장년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매 순간 충실하게 살아도 반드시 여유로운 노년이 보장되진 않습니다.
한 시대는 마치 하나의 생명체와 같습니다. 늘 같은 모양새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조금씩 그 형상을 바꿔갑니다. 사람도 갓 태어났을 때와 다 자란 후의 외양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가치기준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생애 첫 직장에서 정년퇴직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어려운 일입니다. 아버지 세대에서 같은 자리에 뼈를 묻는 것이 끈기였다면, 근래에 이르러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곳으로 움직이는 것은 성실로 불려야 옳습니다. 나의 가치를 끌어올리는데 집중한다는 말은, 나에게 정성을 다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한자리에 오래 머무르는 이는 그저 변화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지금의 자리에서 보다 나은 내일의 나를 만나고 싶어서입니다. 반면 떠나는 이는,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만만찮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거처를 옮기는 편이 합당하다 생각해서겠지요. 그러니 어느 쪽이 더 지혜롭다 가름할 수 없는 문제이며, 굳이 격려 한 마디라도 더 보태줘야 하는 쪽은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나는 사람입니다. 안정된 터전에서 머물길 원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고, 낯선 곳에서 새로 시작한다는 건 적잖은 시련을 감내해야 함을 의미하니까요.
만년필 제조사 라반, 오래된 곳은 아니지만
'라반(Laban)'은 1980년대 초반 대만 허우통에서 출범한 만년필 제조사입니다. 40년 남짓의 그리 오랜 역사를 가진 회사는 아니지만, 만년필용 재료로 흔히 쓰이는 수지를 포함해 황동이나 알루미늄, 전복 껍데기 등 여러 소재를 사용해 펜을 만듭니다. 또 오래 사용한 듯한 엔틱 느낌의 펜에서 시작해, 펜 전체가 뼈대만 남은 것처럼 보이는 스켈레톤 라인을 거쳐, 옻칠과 금박을 쌓아 올린 우루시 만년필에 이르기까지 여러 영역을 넘나듭니다.
만만찮은 기술력을 가진 회사가 분명하지만, 100년 넘는 역사라는 두툼한 철갑을 두른 업체가 즐비한 만년필계에서 라반은 유년기를 지나는 중일 뿐입니다. 하지만 위축될 이유는 조금도 없습니다. 몸집이 크다고 약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요. 기존에 터를 잡은 업체들이 야구에서 뛰어난 선구안으로 포볼을 걸러내는 노회한 타자라면, 라반은 빠른 직구를 바탕으로 크게 휘며 떨어지는 커브나, 급하게 옆으로 꺾이는 슬라이더를 뿌리는 투수가 되면 됩니다. 볼 배합을 잘 하면 어떤 강팀과 맞붙어도 움츠릴 까닭이 없을뿐더러, 그 기세를 꾸준히 이어가면 열성팬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팬의 응원이 선수의 기를 살려주는 것처럼, 필기구 애호가들의 관심은 제조사의 심장을 뛰게 합니다.
▲ 위 좌 - 몽블랑 스타인웨이 F촉 위 우 - 플래티넘 센츄리 보르고뉴 F촉 아래 - 라반 325 오션 EF촉 |
ⓒ 김덕래 |
한국에 몇 안 되는 희소한 만년필 수리공인 저는, 요즘 같은 디지털 세상에 만년필 고치는 일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만년필을 고쳐가며 쓰는 사람들이 정말 있느냐는 물음 다음으로 많이 받는 질문들입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 거주 중인 애호가들도 펜을 보내오는 상황이 되어, 전 세계 여러 나라의 다양한 모델들을 늘 마주하게 됩니다. 만약 만년필 소유욕이 컸다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저도 좋아하는 펜이 몇 있긴 합니다만, 내 것으로 하고픈 욕망 자체는 일반 사용자에 비해 덜합니다. 어차피 내 소유의 것이 된들 사용할 시간도 얼마 없을 테고요. 그래서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단 갖고 있는 만년필이 많지 않습니다. 또 값나가는 펜도 몇 없습니다.
▲ 배럴 전체가 푸른 빛깔 마블로 가득 찬 라반(Laban) 325 오션 만년필 |
ⓒ 김덕래 |
▲ 아나운서 김혜숙님이 진행하는 대구MBC 라디오 시사프로 <여론현장> 생방송 인터뷰 |
ⓒ 김덕래 |
인터뷰를 마친 후, 수성구에 있는 범어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강연은 오후로 잡혀있었지만, 오전 두어 시간 할애해 방문하는 분들 펜 점검을 했습니다. 증상이 경미한 대부분의 만년필은 세척이나 펜촉 교정 등 현장조치하고, 상태가 심각한 몇 자루는 차선책을 안내했습니다. 나름의 재능기부였는데, 평일 오전 시간이었음에도 생각보다 방문객이 많아 어찌나 반갑던지요. 대구가 그저 한여름 어느 도시보다 더 무더운 곳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막상 가보니 필기구 애정하는 이들이 많은 문화도시였습니다.
▲ 범어도서관 1층 로비에서 만년필 점검과 간단한 현장 수리 진행 |
ⓒ 김덕래 |
▲ 범어도서관에서 주관한 '수성, 감성문화를 만나다' 릴레이 강연 |
ⓒ 김덕래 |
▲ 김수환 추기경 잠언집 - 바보가 바보들에게 중 말 한 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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