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심신단련] 테니스와 헤어지기 전에 결심한 것
바쁘게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어느새 40대. 무너진 몸과 마음을 부여잡고 살기 위해 운동에 나선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편집자말>
[김지은 기자]
거리두기가 해제된 오랜만의 연말이라 이런저런 약속이 많다. 얼마 전, 친했던 대학 때 친구와 만나 근황을 나누었다. 아직도 계속 공모전에 낙방하고 있다고 말하니, 친구는 날 보고 꾸준하다고 한다. 난 고개를 흔들며 대꾸했다.
"아니야, 보통 사람보다 꾸준할 뿐 정말 꾸준한 사람보다는 안 꾸준해. 그게 내 문제점이지."
난 나의 애매한 꾸준함이 싫다. 항상 '더 열심히 해야지, 이것 가지고는 아무것도 될 수 없어' 하는 목소리가 계속 날 다그친다. 한해를 돌아보게 되는 연말, 뭐 하나 만족할 만한 것이 없다.
▲ 일 년이나 배웠는데. 이런 몸치. 테니스 따위. 확 때려치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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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함'은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가치다.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에서처럼 빨리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한 걸음씩이라도 계속 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성격이 급한 나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명확한 성과가 없는 어떤 일을 꾸준히 계속하는 것이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꾸준해야지'라는 다짐으로 꾹꾹 눌러 찌부러트린다.
매일 그런 마음과 싸우고 있다. 매일 30분씩 하는 영어 음원을 들으며 '이걸로 얼마나 늘겠어'라고 지레 희망을 꺾고 일주일에 한 번 테니스 레슨을 받으며 '몸치인데 일주일에 한 번으로는 어림도 없지' 하고 생각한다.
그러던 중, 난다 작가의 <도토리 문화센터>를 보게 됐다. 예전에 난다 작가의 <어쿠스틱 라이프>를 좋아했는데 최근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에 얼른 구매했다. 일상툰만 잘 그리는 줄 알았는데 창작물도 무척 재미있다. '큭큭'대며 책장을 넘기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눈시울이 붉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도토리 문화센터 사군자 교실에 새로 온 고두리 부장에게 기존 회원들이 왜 이곳에 왔냐고 묻는다. 고두리 부장이 망설이자 강사로 일하고 있는 이강주 선생님이 대신 말한다.
"한번 해볼까, 그거면 충분해요. 저는 그림이 사람에게 이롭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괴로운 일이 될 수도 있을테지요. 그럼 언제든 그만두면 되는 거예요. 부담가지지 말아요. 취미라는 게 그래서 좋은 거랍니다. 포기해도 상처가 없지."
시작한 지 일 년 된 테니스가 늘지 않아 고민이었다. 상체가 부실한 내 체형에 맞는 운동인 것 같지도 않고 순발력도 좋지 않아 자꾸 공을 놓친다. 거리 감각이 없어 너무 공 앞으로 달려들거나 반대로 너무 뒤에 있어서 헛스윙을 한다. 지난 수업 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랠리를 많이 해봐야 거리 감각이 생겨요."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나같이 못하는 사람과 누가 랠리를 해주냔 말이다. 생각나는 딱 한 사람이 있긴 하다. 바로, 남편. 남편은 겨울은 추우니 꽃 피는 봄이 오면 상대를 해주겠단다. 아,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연습할 장소도, 상대도 없으니 실력은 그대로고 레슨 시간엔 늘지 않은 실력에 면목이 없다.
지금 다니는 테니스장은 멀어서 일주일에 두 번 가기는 힘들다. 집 근처 실내 테니스장에서 더 레슨을 받아 볼까. 하는 생각에 동네 사는 친구에게 같이 테니스를 배우자고 했다. 2:1 수업을 하면 조금 저렴하기도 하고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재미있을 것 같아서다. 친구는 테니스가 처음이지만 워낙 운동 신경이 좋아 금세 잘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제안을 들은 친구가 대답했다.
"난 배운 첫날, 너보다 잘할 자신 있는데? 괜찮겠어?"
주변의 다른 친구들도 날 말린다.
"야, 쟤랑 같이 배우려고? 그냥 따로 배워."
생각해보니, 친구에게 금세 따라 잡힐 것 같다. 에잇. 난 일 년이나 배웠는데. 이런 몸치. 테니스 따위. 확 때려치울까.
그만 둘 것을 정리하는 것도 필요
테니스를 시작한 목표는 남편과 재미있게 랠리를 하기 위해서였는데 남편은 벌써 저만큼 앞서 가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목표는 점점 더 멀어진다. 그만두려니 '꾸준함'이라는 내 기준에 턱 걸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도토리 문화센터>의 한 장면을 보며 모든 일을 '꾸준함'이라는 틀에 넣어 맞추려고 했던 스스로를 돌아봤다.
'그래, 취미는 그만둬도 괜찮지. 모든 일을 다 꾸준히 할 수는 없어. 나에게 안 맞으면 그만둬도 되는 거야.'
꾸준함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모든 일을 다 꾸준히 하려니 과부하가 걸리고 만족할 만한 것이 없고 결국은 '내가 그렇지 뭐' 하고 스스로 자책하게 된다.
난 나에게 그만둘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마음이 홀가분해지니 괜히 지금 그만두기는 아쉽다. 그렇다면 조금은 더 열심히 해본 다음 그만둘까. 친구와 다니려고 찾아 놓았던 집 근처의 테니스장에 문의했다.
레슨 시간도, 볼머신 이용시간도 길다. 앞으로 3개월은 테니스 레슨을 두 곳에서 받기로 결심했다. 그 뒤로도 별로 실력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큰 미련 없이 그만둘 수 있을 것 같다. 테니스야 뭐 취미니까.
남들 눈에 내가 '의지박약'으로 보이는 건 아닐까, 혹시 내가 나중에 후회하진 않을까. 난 왜 꾸준하지 않을까. 하는 자책감에 휩싸여 그만두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만큼은 하고 그만 두자'라고 결심하니 마음이 가뿐하다.
매년 새해가 되면 온 가족이 모여 비밀 노트에 자신의 새해 계획을 열 개씩 쓰고 테이프로 봉해 놓는다. 하마터면, 그 열 개 중 하나가 '테니스 계속하기'가 될 뻔했는데 짐을 하나 덜었다.
계속 지속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니다, 싶을 때 미련없이 그만 두는 것도 중요하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도 꾸준할 수도 없으니까. 새해가 다가오는 지금, 꾸준함을 버리고 이제는 그만둬야 할 것을 정리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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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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