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임영열 2022. 12. 24.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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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와 명곡이 되어 다시 만난 명시...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

[임영열 기자]

 김광섭 시인의 시 <저녁에>에서 영감을 얻은 김환기 화백의 점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코튼에 유채 292*216cm
ⓒ 환기미술관
   
사람들은 시계와 달력을 만들어놓고 하루, 한 달, 일 년이라는 눈금을 그어가며 영속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인위적으로 매듭짓고 있다. 하기사 인간에게 시간의 매듭이 없다면 지나간 날들을 성찰하지도, 다가올 시간을 새롭게 맞이할 준비도 하지 않을 것이다.

또 한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우는 12월이다. 쫓고 쫓기며 지나온 시간의 편린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세밑이 되면 누구에게나 심연에 묻어 두었던 회환과 함께 가슴에 사무치는 문장이나 시구(詩句) 하나쯤은 떠오를 것이다.

얼마 전 12월 초순. 태양과 지구, 달과 화성이 일직선으로 늘어서는 우주쇼가 펼쳐진다는 뉴스를 접하고 밤하늘을 쳐다봤던 적이 있다. 한참을 올려다봤지만 육안으로는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다만 겨울 밤하늘에서 무수히 반짝거리는 수많은 별들 사이로 문득 시구절 하나가 내려왔다.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그저 별이 총총했던 겨울밤. 아득히 먼 우주로부터 읊조리 듯 들려오는 시의 마지막 구절은 차가운 겨울바람만큼이나 명징하게 뇌리에 각인되어 만물의 근원은 '생성과 소멸의 연속임'을 새삼 깨닫게 해 주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던 <성북동비둘기>라는 시를 지은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은 요즘 같은 연말이 되면 많은 사람들의 인구에 회자되는 명문장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중략)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1905∼1977) 시인의 시 '저녁에' 일부. 시집 <성북동비둘기>(1969)

암울했던 구한말,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나 언론사 사장과 경희대학교 교수를 지냈던 김광섭 시인은 시집으로 동경(1938), 해바라기(1957), 성북동 비둘기(1969), 김광섭 시선집(1974) 등을 남겼다. 일제강점기 중동학교 교사 시절에 학생들에게 반일 감정을 주입했다는 이유로 3년간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수화 김환기(1913~1974)화백
ⓒ 환기미술관
 
시인과 화가와 가수

일찍이 고대 그리스의 시인 시모니데스(BC 556~468)가 "시는 말하는 그림이며, 그림은 말없는 시다"라고 했듯이 김광섭 시인의 시 <저녁에>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의 붓끝을 통해 '말없는 시'로 재탄생한다.

시인 김광섭과 화가 김환기. 1960년대 서울 성북동에서 이웃사촌으로 살았다. 문학을 사랑했던 화가는 조병화 서정주 등 여러 시인들과 교유했다. 그중에서도 중동학교 선배이면서 8살 많은 김광섭 시인을 무척 존경하고 따랐다.

1964년 김환기 화백은 뉴욕으로 떠났고 이후 시인과 화가는 서신을 주고받으며 문학과 예술 담론을 이어 갔다. 그러던 1970년 어느 날 김환기 화백은 서울의 친구 김광섭 시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뉴욕 시절 김환기 화백과 부인 김향안 여사. 김향안 여사(본명 변동림)는 시인 이상의 아내였지만 시인 이상과 사별 후에 김환기와 재혼했으며 김환기 화백의 예술적 동반자였다. 환기미술관을 설립했다.
ⓒ 환기미술관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 슬픔에 빠진 화가는 서울의 시인 친구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붓을 들었다.

고국의 그리운 친구들, 고향 신안 안좌도의 푸른 바다, 수많은 인연의 고리들은 화가의 붓끝에서 무수히 많은 점들로 변주되며 심연의 우주와도 같은 '점화(點畫)'한 점으로 완성됐다. 그림 제목은 김광섭의 시 마지막 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서 따왔다. 김환기의 점화 시리즈는 이렇게 탄생했다.

마치 무수히 많은 밤하늘의 별처럼 검푸른 점들로 가득 찬 김환기의 이 그림은 그해 한국일보에서 주최하는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이 시기에 그려진 그의 또 다른 점화 '우주'는 2019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132억 원에 낙찰되며 한국 미술품 역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우고 있다.
 
 2019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132억 원에 낙찰되며 한국 미술품 역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운 김환기 화백의 점화 <우주>(1971) 코튼에 유채 각 254*127cm
ⓒ 환기미술관
 
그런데 1970년에 죽은 줄 알았던 김광섭의 죽음은 오보였고 오히려 1974년 김환기 화백이 뉴욕에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김광섭 시인은 그 후 3년이 지난 1977년 오랜 투병 끝에 서울에서 친구의 뒤를 이었다.

시인이 세상을 떠나고 3년이 지난 1980년 김광섭의 시 '저녁에'는 유시형과 유의형으로 구성된 형제 듀엣 '유심초'의 노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재탄생한다.

가수 유심초는 이 노래 덕에 1981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남자부문 신인가수상을 수상했다. 지금까지도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하며 유명세를 타는 명곡이다. 이렇듯 잘 지어진 시 한 편은 화가의 붓과 캔버스에서 '명화'로, 가수의 목청과 음표를 빌어 '명곡'으로 재탄생하며 생성을 거듭하고 있다.
 
 1980년 김광섭의 시 ‘저녁에’는 유시형과 유의형으로 구성된 형제 듀엣 ‘유심초’의 노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재탄생했다
ⓒ KBS
 
또 한 해가 서서히 저물어 간다. 광대무변한 우주 속에서 셀 수조차 없는 무량한 경우의 수를 넘어 창백하게 푸른 '지구'라는 별에서 태어난 너와 나, 우리는 일생 동안 수많은 인연의 고리를 끼우며 살아간다.

끈끈한 혈육의 정으로 맺어진 가족, 친구, 학교 선후배, 직장 동료, 등등. 수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서 만남과 이별을 겪으며 살아가는 너 하나 나 하나는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른다. 서로에게  '생성'의 기운을 불어넣는 존재로 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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