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운동의 퇴조와 언양소년회 1차 격문 사건

이병길 2022. 12. 2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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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식민시대 언양ㆍ울산지역 소년운동사(22)

[이병길 기자]

1930년대 방정환의 죽음과 소년운동의 퇴조

식민당국은 1929년 말부터 식민 지배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되는 언양지역 사회운동단체들을 탄압했다. 몇 년 동안 지속되었던 언양야학이 강사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1931년 10월 폐쇄되었고 언양의 농민조합은 1928년 3월에 관변단체인 농업청년회를 개조, 연합시켜 조합으로 조직했다. 주로 소작관계 개선투쟁 등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고 조합원은 200여 명에 이르렀다. 경남지역 조선농민총동맹에도 가입했다.

1929년 세계경제대공황을 겪은 일본은 경제적 위기의 해결 방안으로 대륙침략을 감행했다. 전쟁과 함께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통치 방식도 변화해 농촌진흥운동과 중견인물 양성을 통해 촌락에 대한 지배를 강화했다. 1930년대 이후 일본의 식민지배 방식의 변화로 인해 지역 사회운동은 힘을 쓸 수 없었다. 1933년 초 언양의 농민조합도 해산 조치가 내려졌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1928년 5월 5일을 "아동애호데이"로 정하여 어린이날 행사를 경성교육회 주최, 경기도 교육회와 적십자사 그리고 애국부인회, 조선아동협회, 기타 부인회를 후원으로 하여 관변적으로 점차 변질되었다. 1930년대 전시체제기에는 5월 5일부터 11일까지를 "아동애호주간"으로 설정하여 사실상 어린이날 행사는 금지되었다.
 
▲ 1929년 어린이날 행사 -전국적으로 어린이 행사가 부분적으로 진행되었지만 일제의 탄압과 운동 세력의 분열이 있었다.(출처 :조선일보, 1929.05.07.)
ⓒ 조선일보
1929년 제7회 어린이날 기념행사를 천도교소년연합과 조선소년운동총동맹이 따로 진행했다. 1929년 5월 언양소년회에서 10일 전부터 어린이날 축하식 준비를 하여, 4일 준비가 완료되었는데 울산경찰서에서 돌연 금지명령을 내렸다. 울산 역시 복병, 축등, 축기 등을 준비하였으나 금지당하였다. 전국 많은 지역에서 5월 5일 어린이날 행사가 금지되었다. 10월 18일 언양불교소년회는 창립 6주년 기념 가극회를 개최하였다. 천진한 소년소녀의 유희와 합창 독창이 있은 후 '어떠한 제복의 인정(人情)' 연극을 하는 데 언양주재소 임석 경관의 제지로 중지되어 해산을 당하였다.

1930년 재경성일반소년운동단체대표자연합회가 결성되었다. 1931년 전조선어린이날중앙연합준비회가 결성되었다. 정홍교, 방정환, 고장환이 중심이 되었다. 조선소년운동총동맹 산하 단체의 반대가 있어 <전조선어린이날중앙연합준비회 반대동맹>이 결성되었고, 극단적으로 밀양소년동맹은 어린이날 폐지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어린이날 행사는 계속되었다.

조선소년운동총동맹에서 천도교소년회와 방정환은 물러났다. 당시 천도교 신파는 일제와 타협 협력하는 가운데 천도교청년당을 통한 천도교 중심의 독자적인 활동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자치운동을 추진하였다. 민족주의를 이기주의의 대결정으로 보고 '범인간적 민족주의'를 주장하며 '세계일가주의('世界一家主義)'를 주장하며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비판하였다. 이런 선상에서 항일 독립 추구적 소년운동전선에서 일탈한 것이었다.

천도교 구파가 대동단결론에 따라 다른 사회세력과의 연대를 통한 일제와의 비타협적 정치투쟁에 주력하면서 천도교단 밖에서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하지만 신파는 청년, 소년운동의 이론가였던 이돈화・김기전 등은 일제와 타협을 통해 천도교의 독자적 활동을 하였다. 그들은 독립보다 실력양성 우선주의자들이었다. 그럼에도 1928년 천도교소년연합회는 조선소년운동총연맹과 같이 어린이날 행사를 하였다. 1929년과 1930년 천도교소년연합회에서 어린이날 행사를 대대적으로 하였다. 민족운동으로서의 소년운동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게 되고 영향력도 적어지게 되었다.

1930년대에 오면서 천도교 신파는 사회주의 노선과 주도권 싸움에서 본격적인 사상논쟁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천도교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어느 하나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고 때론 '동도주의' 또는 '범인간적 민족주의'를 표방하였다. 이때부터 소년운동에서 독자노선을 걷게 되어 오월회 주도의 조선소년운동총연맹과 결별하였다. 천교도 신파는 당시 신간회와 맞서면서 천도교청년당을 조직하고,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추구하는 가운데 천도교소년회도 독자노선을 걸었다.

1931년 7월 23일 "짓밟히고 학대받고 쓸쓸하게 자라는 어린 혼을 구원하자"던 소파 방정환이 33세의 젊은 나이로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사망하였다. 방정환은 죽음 앞에서도 한결같이 "불쌍한 아이들을 남기고 간다"라고 하면서 "아직도 어린이를 위해 할 일이 많은 데 이렇게 일찍 가다니 부끄럽다"라며 어린이 운동의 앞날을 걱정했다. 방정환은 영원한 어린이였다.

소년운동에 앞장섰던 방정환이 과로로 타계하면서 방정환 없는 어린이 운동은 1931년 방정환의 사망과 함께 한 시대의 막을 내렸다. 방정환의 죽음과 함께 소년운동은 쇠퇴기, 잠복기에 접어들었다. 어린이날은 전국 각지의 소년운동단체를 중심으로 존속되었지만,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명맥만 유지하는 수난기를 맞았다.

1931년 좌우익 합작 단체인 신간회가 해산되었다. 1932년 조선소년운동총연맹은 유명무실한 상태가 되었다. 1936년 12월 23일 일제에 의해 해산되었다. 2년 후인 1938년 어린이날 행사가 폐지되었다. 1919년 3ㆍ1운동 이후 일어난 소년운동은 15여 년 동안 소년의 계몽과 인권신장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소년은 성장하면서 청년, 어른이 되면서 일부는 민족의 튼실한 구성원이 되었다. 또 일부는 민족해방운동에 헌신하였다.

언양소년회 오호근 1차 격문 사건을 일으키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들의 항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30년 1월 28일 아침 언양주재소 부근(현, 언양 하나서점 맞은 편)에 격문이 뿌려진 사건이 발생했다. 울산경찰서장과 형사대가 급파되어 언양소년회 간부와 회원 8명을 검거하고 가택과 단체 회관을 수색하였다. 주범은 언양소년회 회원 오호근(吳浩根, 18세)이었다. 제1차 언양격문 사건이다.

오호근은 훗날 소설가가 된 오영수의 셋째 동생이었다. 가리야사건으로 촉발된 이동개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연설에 영향을 받은 학생이었다. 오호근은 1월 31일 격문작성 및 산포 혐의로 울산경찰서에 호송되고 나머지 회원은 석방되었다. 울산 경찰은 오호근을 취조 한 후 2월 7일 부산지방검사국으로 이송하였다.

오영수는 우연히 1930년 1월 19일 동아일보에 「내동생」이란 동요를 '오파침'이란 필명으로 발표한다. 사건이 일어날 줄 알았을까. 동요 속의 동생이 오호근인지는 알 수 없다.

내동생/ 이동러/ 제일겁쟁이/ 순검[순경]만보면은/ 혼이나는지/ 신조차/ 내던지고/ 다라납니다// 내동생/ 그래도/ 심술은/ 구저/ 남의집호박에/ 말둑을박고/ 골목에/ 굵은돌로/ 성을싼다네//

오영수의 동생은 순검만 보면 겁을 먹고 달아나는 동네 제일 겁쟁이지만, 남의 집 호박에 말뚝을 박고 골목에 성 쌓기 놀이를 하는 심술쟁이기도 하다. 그런 동생일 수 있는 오호근이 일제의 퉁치기관인 주재소에 격문을 뿌렸다.

경상남도 울산군 언양면 동부리 313번지 거주하는 오호근은 보안법 위반으로 1930년 3월 11일 부산지방법원에서 1심 징역 10개월을 구형받았다. 1930년 4월 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당시 오영수는 우체국 사환으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했지만, 끼니를 거를 정도로 궁색한 생활을 하던 시기였다. 현재 오호근의 후손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1930년 4월 26일 오후 4시 그동안 신간회울산지회언양분회 설치를 경찰이 허가하지 않아 연기를 거듭하다 마침내 설치대회를 개최하였다. 장소는 언양청년동맹 회관이었고 사회는 이규경이 하였다. 이 당시 언양분회의 임원들이 바로 언양공보 출신, 언양청년회, 언양소년회, 언양사회운동단체에서 활동한 사람이 거의 전부 참여하여 그 임원 명단은 언양지역 운동가들의 현황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소년운동에서 청년운동으로 성장한 사람들도 있다. 명단은 다음과 같으며 ( )안에 그들의 출신지역과 활동 단체명을 넣었다.

△ 분회장 신주극(신학업, 언양-언양청년회, 사회주의적 농민운동)
△ 집행위원 : 이규경(상남-천도교, 시대청년회), 이동계(언양-청년회), 정병택(하북면-궁근정노동야학), 김교홍(상북면-노동야학-김찬희 자), 성헌장(상남 길천-노농합성회[북남농민조합], 정칠균, 김용대(언양소년회), 김정학(두서-구량갑자구락부, 두북노동야학연합회), 최양수(언양-어음리노동야학), 김원룡(중남면-소년회관 기성부, 중남면장), 이무종(상북-천도교, 언양노동야학연합회 총무, 시대청년회), 신근수(중남-평리노동야학, 중남소년단, 기자)
△ 검사위원 : 오문영, 김대식, 정태익, 최양수, 김용대
△ 후보 : 신주극, 이규경, 정병택

오호근의 격문사건에도 불구하고 언양소년회는 위축되지 않았다. 1930년 언양소년회 주최로 어린이날 준비를 하였는데, 5월 5일 아침부터 비가 내가 내렸다. 소년회관 운동장에는 남녀야학 노동소년소년 250여 명이 모여 어린이날 노래로 시작하여 간단한 기념식을 마쳤다. 이후 오색찬란한 표어기를 높이 들고 장엄한 악대를 선두로 하여 회관을 떠나 사정 없이 뿌리는 비를 무릅써가며 어린이날 노래와 만세를 높이 불렀다. 깃발 행렬을 오전 10시 30분에 시작하여 11시 30분까지 1시간 동안 진행한 후 행사를 마쳤다.
 
▲ 1931년 5월 3일 언양소년회 어린이날 기행렬 -언양소년회는 만세문, 격문 사건에도 움츠러들지 않고 소년운동을 계속했다. (출처: 독립운동가 이동개의 아들 이건욱 제공)
ⓒ 이건욱
 
1931년 2월 조선일보 언양분국은 분국장이 성충갑, 기자가 이동개로 바뀐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음력 보름에 조선일보 언양분국에서는 소년소녀동화대회를 개최하려고 참가통지서 등을 발송하려 하였으나 경찰 당국이 3월 1일 경계기간이라 집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3월 4일 1시에 언양청년동맹관에서 하기로 변경하였다.

그런데 이 공연은 언양소년회 해체 기념사업으로 구정월보름을 기해 언양청년동맹관에서 신춘가극을 행사하려한 것과 동일한 것 같다. 행사 실시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언양소년회가 해체된 것은 아닌 것 같다. 5월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전조선어린이날 중앙연합준비회에서는 선전지와 기(旗), 포스터를 발송하였는데 울산과 언양도 포함되었다.

언양 송재술 이발소는 5월 3일 어린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양산농민과 야학생들에 한하여 4월 24일부터 어린이날까지 10일 동안 무료 이발을 하였다. 신문에는 언양어린이날 행사에 대한 제목만 있고 보도내용이 훼손되어 알 수 없다. 하지만 깃발을 나누어 들고 행렬을 지어 만세를 높이 부르며 시내를 한 바퀴 도는 모습의 사진을 이동개는 남겼다. 이날 이후 언양소년회에 대한 소식을 더 이상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삼산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 <윤현진 평전>. 오마이뉴스에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을 연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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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울산저널>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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