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삼한데 먹먹하다…한석규의 요리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정성이 들어간 음식은 간을 세게 하지 않아도 맛있다. 드라마도 음식에 비유할 수 있다면, 왓챠 오리지널 시리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는 바로 그런, 삼삼하지만 정성이 깃들어 감칠맛 나는 집밥에 빗댈 수 있을 것이다. “맛있는 음식은 마음으로 만들어진다”는 극중 대사를 그대로 닮아, 화려한 비주얼이나 자극적인 전개 없이 그 안에 깃든 마음만으로 관객을 울린다.
지난 1일부터 매주 2화씩 공개 중인 이 드라마는 인문학자 강창래 작가가 2018년 펴낸 동명의 에세이가 원작이다. 20여년간 출판 편집기획자로 일하고 『인문학으로 광고하다』(2009), 『책의 정신』(2013) 등을 쓴 강 작가는 출판계 동지이자 30년을 함께 산 아내가 암에 걸리자 난생 처음 제대로 부엌에 발을 들이고 요리에 나섰다. 그 과정 하루하루를 담담히 써내려간 페이스북 글은 곧 에세이집으로 엮여 출간됐고, “침샘과 눈물샘이 동시에 젖는다”(서효인 시인)는 추천의 글대로 수많은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이호재 감독이 연출하고, 국민배우 한석규와 김서형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는 남편이 화자인 원작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되 약간의 극적인 설정만 추가됐다. “콩나물과 시금치나물, 이 둘이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로 시작하는 책과 똑같이, 드라마도 나물 요리를 준비하는 창욱(한석규)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그렇게 아픈 아내를 위해 소금과 간장, 기름을 최대한 쓰지 않으며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는 창욱의 모습을 중심으로, 자신이 대표를 맡고 있던 출판사 일을 정리해나가는 아내 다정(김서형)과 고3 아들 재호(진호은)의 이야기가 조금씩 교차된다. 원작에는 자세히 서술되지 않은 아내와 아들의 시선이 더해지면서 각자 앞만 보고 달리던 세 가족이 어떻게 서로를 돌아보고 이해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가족 드라마로 이야기가 확장됐다.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는 국내에서 자주 만들어지는 장르가 아닌 음식 드라마로서의 완성도도 훌륭한 편이다. 원작에 등장하는 60여가지 음식 가운데 몇 가지를 추려 매회 간단한 음식, 메인 음식 하나씩 요리하고 맛보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굴러간다. 3회 ‘굴비하세요!’ 편에서는 당근·감자·양파 등을 푹 고아 끓여낸 채소 스프와 바삭하게 구운 굴비 구이가 주요 메뉴로 등장하는 식이다. 흔한 ‘먹방’에서 보이는 맵고 짜고 단 음식들 대신, 보글보글 끓고 있는 천연색의 식재료와 완성된 요리를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진다.
시한부 주인공이 등장하는 여느 이야기와 달리 억지로 슬픔을 짜내지 않는다는 점 또한 이 드라마를 드물게 귀한 작품으로 만든다. 드라마는 그저 매 끼니를 소중하게 챙기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연스러운 먹먹함을 선사한다. 다정이 아들과 여행 갔던 제주도 바다 이름을 내내 떠올리지 못하다가 남편이 해준 돔베국수를 먹고 기억해내는 장면이나, 입원한 다정이 대패삼겹살을 간절히 먹고 싶어 해서 병원 주차장에서 몰래 구워 먹으며 온 가족이 행복해하는 장면 등은 밥 한 끼 먹는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감동을 준다. 다정의 병세가 악화하면서 창욱이 며칠에 걸쳐 준비한 탕수육을 먹지 못하게 된 에피소드는 애달픈 긴박감마저 자아낸다.
한석규와 김서형은 각자의 장점이 고스란히 빛나는 연기로 작품을 견인한다.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2’ 이후 2년여 만에 돌아온 한석규는 그만의 나긋나긋하고 정갈한 목소리로 드라마 전체의 결을 차분하게 만든다. 감정이 과잉되지 않았는데도 인물의 심경이 그대로 느껴지는 그의 내레이션을 듣고 있으면 이 드라마는 어쩌면 한석규 없이는 성립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간 주로 강인한 인상의 캐릭터를 선보여온 김서형은 이번엔 암 환자인 아내이자 엄마를 연기하지만, 그 속에서도 그가 지닌 특유의 단단함이 살아 숨 쉰다.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출판사를 걱정하는 모습이나, 죽음 앞에 담담하다가도 울컥 두려움을 느끼는 장면 등에서 특히 그의 연기 내공이 느껴진다.
22일부로 8화까지 공개된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는 총 12부작으로, 매주 목요일 2부씩 공개된다. 추운 연말연시, 자극적인 드라마에 지쳤다면 정성만으로 맛을 낸 보양식 같은 이 드라마로 속을 달래주어도 후회는 없을 것 같다.
남수현 기자 nam.soohyo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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