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놀라운 기적의 순간들
[이준목 기자]
▲ tvN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인간 잡학사전>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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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奇蹟. Miracle), 사전적인 의미로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 '신(神)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 등을 뜻한다. 보통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서 기대하기조차 힘들거나 아예 불가능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경우를 뜻하며 주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기적은 우리의 삶과 일상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며, 과연 어떤 성향의 인간들이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12월 23일 방송된 tvN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인간 잡학사전>에서는 '기적을 만든 인간'을 주제로 잡학박사들의 열띤 토론이 펼쳐졌다.
오늘의 주제가 '기적'이라는 이야기를 처음 듣고 김상욱은 "기적같은 건 있어도 기적은 없다"고 주장했다고. 김상욱은 "'기적이 뭘까?'라고 생각했다.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현상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런 건 없다. 있다면 그건 실수나 착시일 뿐"이라며 과학자다운 반응을 보였다.
김상욱은 "만일 '가능한 기적'이 있다면, 자연법칙을 깨는 건 아니지만 '일어날 확률이 너무 적은데 발생한 것'"을 꼽으며 복권이 연속적으로 다섯 번 1등을 할 확률을 예로 들었다. 심채경은 이에 덧붙여 "복권이 몇 번째 당첨됐을 때부터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디서부터 기적인지는 인간이 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기적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활용된 분야로 '종교'를 꼽았다.
심채경은 기적의 의미가 시대에 따라 변해가는 과정에 주목했다. "과거에는 기적은 신이 내려주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기적을 행할 수 있다. '기적의 공부법', '기적의 계산법'같은 표현들이 나오고, 오늘 아침에 4시에 기상했다는 것을 미라클 모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기적의 의미가 과거에 비하여 개인적으로 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상욱은 크리마스와 기적이라는 주제에 어울리는 인물로 역시 산타클로스를 꼽았다. 산타의 모티프가 된 인물은 기독교의 성인인 성 니콜라우스(270-343로 추정)로 튀르키예 남부에서 거주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베푸는 일에 앞장서며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니콜라우스의 사후에 그가 떠난 12월 6일을 축일로 정하여 선물을 주는 풍습이 생긴 것이 크리스마스의 기원, 세인트 니콜라스의 네덜란드식 발음이 '산타클로스'로 이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산타클로스와 '크리스마스의 기적'
인류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산타라는 주제를 흥미롭게 연구해왔다. 산타클로스가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준다는 이야기는, 전 세계에 걸쳐 오랜 세월 동안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아이들을 속인 거짓말이자 사기극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물'의 의미가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 과거에 선물이란 직접 마련한 것을 주는 과정이었다면, 19세기 이후로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돈으로 물건을 사서 남에게 주는 것이 보편화됐다. 그리고 그 선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문(감사, 애정표현 등)'이 말로서 더해지면서, 단지 '물건'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특별한 선물을 주고받는 의식이 이루어지는 것.
김상욱은 "산타 이야기는 지금도 아이들을 속이고 있다. 이 방송은 아이들이 보면 안 된다. 15금으로 해야 한다"고 너스레를 떨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왜 산타라는 신화에 열광하는가.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산타 신화를 어린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통과의례'적인 성격이 있다고 설명했다"고 밝혔다.
말하자면 "좋은 일을 하면 선물을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 산타를 통하여 아이들은 상과 벌로 훈육받는 과정을 거친다. 산타를 졸업하면 진정한 어른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영하는 산타가 아이들에게 일종의 '대안적 보호자'같은 존재라고 해석했다. 가족과의 관계에 흔들리는 아이들이라고 해도 산타같이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대안적 보호자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
김상욱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대표하는 사례로 1차대전 당시 '참호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소개했다. 1914년 유럽의 한 전선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던 독일군과 연합군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극적으로 휴전을 맺고 화합했던 실제 일화였다. 서로를 죽고 죽이며 격렬하게 대치하던 양군 병사들은 서로 노래를 주고받으며 전투를 중단하고 참호에서 나와 서로 악수했고 같이 게임을 즐기며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속에서도 모두의 기억속에 공유하던 크리스마스라는 연결고리가 되찾아준 동심, 가까이서 얼굴을 맞대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소통이, 병사들에게 남아있던 인간의 본능을 일깨운 것이다. 당시 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전선에 있던 군인들에게 물었으면 전쟁은 그날 끝났을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종전으로 이어지지는 못 했다. 격노한 양군 수뇌부는 적군과 교류하는 이들을 중형에 처하겠다고 선언하며 평화의 기운이 퍼지는 것을 경계했고, 끔찍한 전투가 재개됐다. 1년 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비슷한 사태가 재발되는 것을 방지하고 양군의 적대감을 극대화기 위한 수단으로 엄청난 포격전이 벌어진다.
'전선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적개심은 커진다'라는 격언처럼, 전쟁의 양상이 근접전에서 화기를 이용한 원거리 전투로 바뀌면서 인간의 거리는 멀어졌고 전쟁은 더 잔혹해졌다. 참호의 크리스마스 일화는 지금도 우리에게 진정한 인간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진정한 기적이 아니었을까.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이 만든 기적
김영하는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을 기적을 만들어낸 인간으로 꼽았다. 남극 탐험에 도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던 섀클턴이 유명해진 이유는, 실패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생각을 전환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극 탐험 도중 부빙에 갇혀 탐험대가 위기에 처하자 섀클턴은 과감하게 도전을 포기하고 대원들의 생존을 새로운 목표로 삼았다. 섀클턴의 일기에는 "목표가 바뀌었다. 전원을 살려서 돌아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귀환하는 과정도 결코 쉽지 않았다. 새클턴은 대원들을 이끌고 수많은 위기를 넘겨야했다. 막바지에는 목숨을 걸고 작은 구명보트를 타고 1300km에 이르는 남극해를 건너는 모험을 시도한 끝에, 한 섬에 도착하여 구조대를 데리고 귀환했다. 남겨진 새클턴의 대원들은 4개월 동안 대장이 돌아올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믿고 기다리며 한 사람의 이탈자로 발생하지 않았다. 결국 섀클턴은 약속한 대로 28명의 대원을 무사히 생존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에서는 남극점 정복에 실패한 섀클턴 탐험대를 향한 비난 여론도 있었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다소 희생을 치르더라도 목표를 이루는 것이 대의라고 여겨지던 시대였고, 인간의 목숨보다도 국가의 명예를 더 중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섀클턴은 당시에는 다른 탐험가들에 비하여 저평가받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수많은 대원들의 목숨을 지켜낸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재조명되며 평가가 올라가고 있다. 대원 각자의 성향을 세심하게 파악하고, 극한 상황속에서도 예술과 감성(일기쓰기, 기념일 등)을 최대한 활용하여 대원들에게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주려고 했던 섀클턴의 리더십은 오늘날의 시선으로 봐도 시대를 앞서갔다는 평가를 받는다.
잡학박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일기 쓰기의 순기능을 극찬했다. 심채경은 섀클턴의 사례를 비유하여 "일기 쓰기는 생존에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하면서 "제가 어릴 때 쓴 일기는 데스노트 수준이다. 힘들었던 일을 일기에 적는 것만으로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호는 "나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곧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라면서 "나에 대한 애정이고 삶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호는 기적을 만든 인간으로 빅터 프랭클(1905-1997)을 꼽았다. 정신과 의사인 프랭클이 2차대전 당시 나치 수용소에 끌려갔던 경험을 집필한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프랭클은 여기서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남겼다.
프랭클은 수용소에서 여러 인간군상들을 만났다. 삶의 의지를 잃고 자살한 사람. 근거없는 희망에 빠졌다가 더 큰 좌절감으로 병을 얻어 사망한 사람도 있었다. 프랭클은 이를 통하여 '정신이 무너지면 육체도 망가진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프랭클이 악몽같은 수용소에서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해오던 연구를 완성하겠다는 의지였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프랭클은 수용소에서 틈틈이 원고를 적으며 연구를 이어갔다.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소소한 목표'가 한 사람에게 삶을 지탱하는 동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프랭클은 생전 인터뷰에서 "추구해야 할 삶의 의미가 있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 깨닫는다면, 더 이상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거나 그로 인하여 건강이 나빠지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심채경은 '의미 강박'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를 드러내기도 했다. 최근 젊은 이들 사이에서는 의미를 찾는 것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분위기도 있다. 심채경은 "의미를 갖는 것 자체가 삶의 목표가 되는 것 같고, 의미를 강요하는 분위기에 고통받는 사람들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김영하는 "의미를 요구하는 질문 자체가 어른들의 목적을 가지고 사용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모두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하지만, 단지 드러내서 말하고 싶지 않은 것 뿐"이라고 해석했다.
차별과 불평등에 시달린 여성 과학자들
심채경은 비극적인 저주를 이겨내고 기적을 이뤄낸 로블링 가문의 이야기를 선택했다. 로블링가는 19세기 중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기술과 설계로 오늘날 뉴욕의 상징인 브루클린 현수교를 건설한 가문이다. 워싱턴 로블링은 현장에서 측량 작업 중 선박사고로 사망한 부친의 뒤를 이어 수석 엔지니어로 브루클린 현수교 프로젝트를 물려받았다. 워싱턴 역시 다리 건설 중 화재 등 여러 사건사고를 겪었고 본인은 감압병에 걸려 반신불수가 되는 비극을 맞이했다.
거동이 불편해진 워싱턴을 도운 것은 바로 아내인 에밀리 로블링이었다. 처음에는 남편의 지시를 대리해서 전달해주던 에밀리는, 어느새 본인도 전문가가 되어 직접 건설을 주도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고 보수적인 정서가 지배하던 시대에, 에밀리는 남편의 이름을 빌리기도 했지만 결국 본인의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건설현장을 진두지휘하며 가문의 대업을 완성했다. 현장에서 일하던 남성 노동자들도 언제부터인가 에밀리가 지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의 능력을 존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고.
다리는 온갖 우여곡절 끝에 결국 14년 만에 완공되며 세상의 빛을 볼수 있었다. 브루클린 다리 앞에 설립된 명판에는 로블링 가문의 이름이 새겨져있고, 그중 에밀리 로블링의 이름이 맨 위에 올라 있다. 최근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플라자가 설립되기도 했다. 다재다능했던 에밀리는 다리 완공 후에도 뉴욕대 법학 학위를 받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이어갔다. 심채경은 로블링가가 브루클린교 건설을 통하여 이룬 의미에 대하여 "미래를 앞당긴 기적"이라고 정의했다.
김상욱은 남성 중심의 과학계에서 훌륭한 여성 과학자들이 뛰어난 능력에도 차별과 불평등에 시달리며 빛을 보지 못 했던 어두운 역사를 언급했다. 독일 출신의 리제 마이트너(1878-1968)는 핵분열 연구의 창시자로 꼽히지만, 같은 연구를 했던 남성 학자들이 노벨상을 받을 때 그녀의 이름은 포함되지 못했다.
미국의 유명언론인 <뉴욕타임스>는 몇 년전부터 'Overlooked(쓰지 못한 부고)' 시리즈를 연재하며 중요한 업적을 이뤘지만 당대에 조명받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중 다수가 여성이었다. 또한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에밀리 로블링은 물론, 한국의 독립운동가인 유관순 열사의 이름도 언급됐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김영하는 가장 놀라운 기적으로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꼽았다. 우리 모두는 1억 마리에 이르는 정자에서 출발하여, 오늘날 세상에 태어난 80억에 이르는 전 세계의 인구의 하나가 됐다.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이하여 지금 태어나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스스로가 기적의 주인공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축하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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