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 앞둔 주택단지, 갈 곳 없는 소년의 황홀한 도전

김상목 2022. 12. 24.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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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가가린>

[김상목 기자]

 영화 <가가린> 포스터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흑백의 기록필름이 철컥철컥 소리를 내면서 돌아가기 시작한다. 막 새로 지어진 미래적인 건축양식을 갖춘 집단주거단지에 어쩐 일인지 인파가 가득하다. 누군가 차에서 주변 사방의 환호와 함께 내린다. 어디서 본 눈에 익은 얼굴이다. 대체 누굴까 기억을 더듬어본다. 역사책에서 많이 나오던 얼굴이다. 그는 바로 유리 가가린.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다. 역사적인 프랑스 방문을 기념해 파리 근교의 새 주택단지에 그의 이름이 명명되어 기념으로 방문한 것이다. 가가린을 둘러싸고 이 단지에 입주한 이들이 기념촬영에 열광하는 풍경이 이어진다.

이윽고 화면이 칼라로 전환된다. 기록필름이 촬영된 후로 어느새 반세기가 흘렀다. 가가린 주택단지 풍경은 변한 지 오래다. 파리 외곽의 쇠락하고 공동화된 흔해빠진 공동주택처럼 이곳은 슬럼으로 전락한 상태다. 주민 대부분은 가난한 이민자들로 채워져 있다. 흑인, 황인, 동유럽 계열 백인들로 가득하다. 유럽의 심각한 이민문제를 다루는 수많은 영화들에서 익숙해진 풍경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사람들은 삶을 꾸리며 일상을 영위하는 중이다.

'가가린' 단지에 사는 소년 '유리'에게 닥친 운명
 
 영화 <가가린> 스틸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이 단지에 사는 덩치 큰 흑인소년 유리는 괴짜다. 다른 또래 애들이 하릴없이 한데모여 죽치며 시간을 때우거나 허풍을 부리는 시간에 유리는 단짝친구와 함께 주택단지의 불량전기배선이나 깜빡거리는 전구를 수리하고자 이것저것 손을 보는 중이다. 물론 따로 보수를 받거나 채용된 건 아니다. 그는 자기 돈을 털어서까지 작업에 매달린다. 심지어 부속을 구해서 멈춰버린 엘리베이터도 고쳐보려 시도한다. 이제 노후화된 단지의 운명을 결정할 안전점검이 닥쳤기 때문이다.

유리는 승강기를 손보던 중에 인근 트레일러 촌에 사는 소녀 디아나와 만난다. 디아나 역시 유리처럼 전기나 기계 등속에 지식과 관심이 유별나다. 이들 일당은 디아나가 아는 고물상에게서 필요한 부품을 얻어내 단지의 공공시설 수리를 이어간다. 하지만 대다수 또래 청소년들은 물론, 성인 주민들도 그저 불평을 늘어놓기만 할 뿐 공동주거의 현안을 해결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미래에 대한 건설적인 희망을 잃어버린 채 그저 복지수당과 불안정한 일용직 일자리에 의존하는 세태 그대로인 모습이다.

마침내 지자체의 안전감독관 실사가 시작된다. 하지만 유리와 친구들이 애를 쓴 수고는 헛되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상황의 심각성을 모른 채 그저 현상유지와 민원 시위를 꾀하던 (같이 작업하던 친구의 아버지인) 다른 이웃주민이 고의로 일으킨 화재로 안전등급 위험수위 판정을 받게 된 것이다. 그 바람에 370세대, 천 명이 넘는 이곳의 주민들은 강제 퇴거조치를 당한다. 이웃들은 각자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반세기가 넘은 역사를 공유하던 공동 주거단지는 철거일자만 기다리게 된다.

하지만 유리는 떠나지 않고 남는다. 철거반원들은 안전문제와 공사 진척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눈에 띄는 잔류 주민들을 내쫓으려 시도한다. 몇몇 사람들과 철거반원들의 숨바꼭질이 계속된다. 유리는 모두가 떠나고 남은 아파트를 개조해 자신만의 아지트로 변모시킨다. 그에 의해 변형된 주택단지의 일부 공간은 초현실적 풍경으로 탈바꿈되어간다. 소녀 디아나와 전에는 데면데면하던 소년 달리도 유리와 합세한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더 이상 이 곳에 머물 형편이 못 되어 떠나게 된다. 그리고 이제 예정된 철거일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잊힌 시대의 기억과 잔향
 
 영화 <가가린> 스틸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가가린>은 후반부에 놀랍도록 경이로운 찰나를 감추고 있다. 초현실주의적으로도, 혹은 고도로 하드 SF 이미지로도 비춰지는 체험과 함께,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이 꼴딱 멎을 만큼 매혹적인 감성을 뿜어내기 위한 연료는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다. 두 공동감독은 격동의 20세기가 언뜻 보여줬던 이성과 진보의 가능성, 그리고 그 좌절에 대한 애잔한 회한을 연소시켜 경이로운 시각적 황홀경을 선보인 것이다.

물론 단순하게 과거회귀적인 복고로 그치는 건 아니다. 온전히 잊히기엔 아까운 20세기의 어떤 기억을 소환해 21세기 인류가 직면한 보편적 사회문제와 연결시켜낸다. 그 놀라운 접속 링크는 영화 제목과 실제 배경의 기원이 된 20세기의 영웅 유리 가가린의 이름에 기반을 둔다. 그리고 그 영화적 구현은 당시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좌파정당이던 프랑스 공산당이 수권한 지자체가 야심차게 기획 건설한 결실이지만, 이제는 빛바랜 가가린 주택단지에서 미래가 불투명한 유색인종 이민자 소년 유리를 통해 이뤄진다. '유리' + '가가린', 즉 유리 가가린이라는 20세기 역사위인이 상징하던 어떤 기운이 21세기에 또 다른 유리 가가린을 통해 재현되는 과정이 영화를 만든 이들의 시선이자 목소리인 셈이다.

유리 가가린은 소련 사회주의 체제가 미국과 서방 자본주의 진영보다 더 도덕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우월하며 자본주의 체제의 폐단과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의 상징이었다. 당시 소련은 우주개발 경쟁에서 명백히 미국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가린의 우주비행은 그 화룡점정 격인 대사건이었다.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올렸다. 최초로 개 라이카를 우주에 보냈다. 그리고 인류 중 최초인 우주비행사로 유리 가가린을 배출해냈다. 당대에 국경을 초월해 인류라는 종의 대표로서 유리 가가린이라는 이름은 전 지구적 대스타였고 인류 진보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냉전 시기 우주개발 경쟁은 그저 초강대국들의 자존심 싸움을 넘어 바로 세계와 인류의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느냐를 증명하는 대리전 성격을 띠었던 셈이다. 소련은 체제경쟁에서의 우위를 과시할 겸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가가린에게 세계 곳곳을 방문하게 했다. 미국은 자존심이 상해서 그 방문을 거부했지만 서방 각국에서는 이 인류의 영웅을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영화 오프닝에서의 프랑스 방문과 가가린 주택단지 기념행사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것이다. 그 당시엔 (지금도 그렇지만) 모든 게 정치적이었다.

하지만 반세기가 흐른 뒤 그 당시의 타오르던 열망은 퇴색된 지 오래다. 처음 건설할 당시에는 미래지향적이라는 찬사와 평판을 들었을 이 공동주택단지는 지금은 하층민들의 온상으로 혐오시설 취급을 당하는 천덕꾸러기 신세다. 철거반원들은 이곳 주민들을 함부로 대하는 티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가가린 단지 뿐 아니라 인근의 유사한 동네들은 이미 차례로 철거 도상이라는 걸 영화 속 유리의 친구인 디아나 가족이 생활하는 트레일러 촌이나 그들이 부속을 구하는 제라르의 고물 창고가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렇게 한때 이상적인 도시계획의 야심찬 일례였던 실험은 허물어져 사라질 운명에 처해진 상황이다. 하지만 유리와 친구들은 그런 냉혹한 선고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보여주려 도전한다.

소년 유리의 꿈이 가가린 단지에서 신기루처럼 구현될 때
 
 영화 <가가린> 스틸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소년에겐 달리 갈 곳이 없다. 그의 유일한 피붙이인 어머니는 새 가족을 꾸렸다. 소년은 방치되어 있다. 유리의 친구와 그를 염려해주는 소수의 이웃들은 오직 가가린 단지와 그 주변에만 존재한다. 이곳을 떠난다는 것은 소년에겐 고향이 수몰되어 강제이주 당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비록 물리적으로 기거할 공간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집'이라는 정의에 부합되는 공간은 아닐 테다. 유리의 방황을 통해 영화를 만든 이들은 단순히 낡은 건물을 철거하고 근사한 새 단지를 짓는 것만으로 채워지지 못할 부분을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냉혹한 현실에 직면한 유리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저항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 저항은 좀 특이한 형태를 취한다. 파리 외곽의 빈민가를 다룬 작품들, 마티유 카소비츠의 <증오>나 레쥬 리의 <레미제라블>이 보여주던 무정부주의적 혼돈과 일탈이 뿜어내던 풍경처럼 파괴적인 방식과는 동떨어져 있다. 대신에 미학적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마술적 리얼리즘이나 초현실주의라는 용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이들이 제법 될 것이다.

그는 서구의 빈집점거운동이 그 파생양식으로 그들만의 도시문화예술을 선보이는 것과 유사한 방법론을 취한다. 그의 요람이던 주택단지의 기원이 된 인물과 그의 이상을 기념하려는 추모의 행위와도 통하는 듯 보인다. 자신만은 여전히 남아서 존재하고 있는 이 공간은 적막한 우주와도 흡사해 보인다. 그는 기왕 자신만의 우주에 남겨진 김에 자기 보금자리를 마치 우주정거장처럼 변신시킨다. 전기를 끌어오고 물을 모아서 온실을 만들고 벽을 터서 연속된 통로를 만든다. 따스한 색깔의 조명과 싹을 튼 화초와 작물들이 소년에게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마법 주문처럼 기능한다. 철거와 폭파만 기다리던 낡은 시멘트와 콘크리트 덩어리에 빛과 온기가 감돈다.

하지만 소년의 힘만으로 거대한 단지를 부활시키거나 파괴를 막아낼 권능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단지는 파괴되고 소년의 희망은 예정된 좌절을 맞이할 판이다. 그렇게 유리의 애잔한 희망과 노력은 열매를 맺지 못할 운명이다. 유리 가가린의 조국 소련이 맞이했던 '역사의 종말'처럼 그렇게 말이다. 최후의 순간 유리의 곁에 남는 건 버림받은 떠돌이 개 '라이카' 뿐이다. 의미심장한 나머지 이마를 탁 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최초로 우주를 체험했지만 끝내 지구로 살아서 귀환할 수 없었던 모스크바 골목길에 살던 떠돌이개의 이름 아닌가. 그렇게 영화는 지난 세기의 이상과 그 종언을 소년 유리와 개 라이카, 그리고 가가린 주택단지의 운명으로 빚어낸다. 그렇게 영화는 비장한 장송곡으로 끝나려 하는가.

일체의 이론은 회색이요, 푸르른 것은 오직 생명의 연대
 
 영화 <가가린> 스틸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물론 다행히도 그런 묵시록적인 비전이 두 감독이 보여주려 한 선택지는 아닌 것 같다. 인류의 미래가 정해진 역사법칙 대로 진보할 것이라는 이념적 확신은 20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파산했다. 우리는 모두 1991년에 그 판정이 선고된 것을 알고 있다.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자부심 넘치는 이념은 실패로 끝났다. 유리 가가린은 자신의 이름을 딴 주택단지 방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사고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상징했던 소련은 무너졌고 프랑스 공산당 역시 초라해진 지 오래다. 도입부의 기록영상이 보여주던 비전은 좌절로 막을 내린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선의와 희망만은 여전히 유효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영화를 만든 이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본래 <가가린>은 2014년, 공동감독들이 친하게 지내던 활동가들에게서 막 (영화 속 상황처럼) 주거부적격 판정을 받고 철거 예정이던 가가린 단지를 다큐멘터리로 기록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그 직후 15분 남짓한 단편 버전 <가가린>이 탄생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2019년 늦여름에 이 오래된 단지는 현실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다수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고향'이 사라지는 순간을 함께 지켜봤다고 전한다. 그리고 장편으로 변신한 <가가린>이 영상화된 기념비처럼 그 공간을 추억하게 된 셈이다.

많은 사연을 담은 채 어떤 사회이건 공동체를 향한 지향과 약자에 대한 연대를 포기해선 안 된다는 의지를 <가가린>은 너무나 인상적인 엔딩으로 노래한다. 그렇게 유리 가가린이 특유의 해맑은 미소와 함께 표상했던, 체제와 이념을 뛰어넘어 전 인류를 하나로 묶어주며 같은 곳을 보게 했던 이상은, 반세기 후 (비록 너무나 미약한 우애와 연대의 실낱같은 재연일 뿐임에도) 여전히 불씨 혹은 씨앗으로 우리 곁에 실재한다. 포기해선 안 될 것이 있다는 호소와 함께 말이다.
 
<작품정보>
가가린 Gagarine
2020|프랑스|SF
2022.12.22. 개봉|98분|12세 관람가
감독 파니 리아타르, 제레미 트루일
주연 알세니 바틸리(유리 역), 리나 쿠드리(디아나 역)
출연 자밀 맥크라방(오삼 역), 피네건 올드필드(달리 역),
파리다 라우아디(파리 역), 드니 라방(제라르 역)
수입 및 배급 (주)엣나인필름
 
2020 73회 칸영화제 공식초청
2020 25회 부산국제영화제 월드시네마
아테나국제영화제 감독상
포뢰섬국제영화제 신인감독상
뤼미에르시상식 데뷔작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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