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20조 공공건축판…파주 3억 공모에 140팀 몰린 이유
심사위원 사전 공개 철회 위기
투명한 설계공모전 찾아 쏠림현상
파주시는 인기, 조달청 외면하는 이유
최근 공사비 20조 규모(2020년 기준)의 공공건축판에 위기감이 돌고 있다. 국민 세금을 들여 한 해 수천채 씩 짓는데 명작은커녕 망작이 되기 일쑤인 공공건축물의 발주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만든 제도가 사실상 철회 위기에 놓이면서다.
수술대에 오른 것은 ‘심사위원 사전 공개 제도’다. 설계비 1억원 이상 되는 공공건축물을 지으려면 설계 공모전을 거쳐 당선작을 뽑아야 한다. 이 공모전을 투명하게 관리하기 위해 국토교통부는 2019년 심사위원 명단을 공모 시작과 동시에 공개하도록 의무화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심사가 열리는 하루 전에 심사위원을 공개하거나 아예 공개하지 않는 공모전도 많았다. 로비 우려 탓이다.
하지만 ‘깜깜이’ 심사에 대한 불만은 컸고, 대형사를 중심으로 심사위원 명단을 상시 관리하며 로비 수주를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젊고 실력 있는 건축가들이 오랫동안 공공건축 공모전을 외면한 이유다. 한 젊은 건축가는 “공모전에 참여하려면 인건비 포함해 대략 1000만원이 드는데, 짜고 친 판에 시간과 돈을 써가며 들러리를 서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냐”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심사위원 사전 공개다. 공모전을 알리면서 심사위원 명단도 공개한다. ‘깜깜이 심사’가 아니라 공정하고 능력 있는 심사위원이 심사하니 믿고 작품을 내라는 취지다. 하지만 제도가 시행된 지 3년 만에 국토부는 심사위원 공개 시점을 응모작을 제출한 뒤로 바꾸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지난 10월 열린 한국토지주택공사(LH) 국정감사에서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강대식 의원(국민의 힘)의 질의가 발단이 됐다.
강 의원은 국감에서 “건축설계 공모 과정에서 로비 수주가 심해 능력 있고 전문성 가진 건축사사무소가 아닌 학연ㆍ지연으로 로비전의 승자가 된다”며 “심사위원 명단을 공모 시점부터 공개하면서 공정성ㆍ투명성ㆍ전문성이 모두 후퇴했다”고 말했다. 심사위원을 처음부터 공개했더니 되레 로비 기간만 길어졌고, 철회하자는 주장이었다. 과연 그럴까. 파주시에서는 정반대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젊은 건축가들에게 ‘기회의 땅’으로 불리는 파주시
파주시는 요즘 젊은 건축가들 사이에서 ‘기회의 땅’이라고 불린다. 공공건축 공모전을 열기만 하면 수십명의 건축가가 몰린다. 파주시 광탄면 신산리에 지은 ‘광탄도서관’의 경우 2020년 공모전을 열 때 140팀이 응모했고, 실제로 작품을 제출한 팀도 74곳에 달해 역대 최다 기록을 세웠다. 설계비 3억원(공사비 55억원) 규모로 그리 크지 않은 프로젝트였다. 이전만 해도 파주에서 이 정도 규모의 공공건축 공모전을 열면 5팀이 응모해 3팀 정도가 실제로 작품을 내는 수준이었지만,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참여하는 건축가가 많으면 더 좋은 안이 뽑힐 확률도 올라가고, 공공건축의 질은 좋아지는 선순환이 일어난다.
그 결과를 토대로 파주는 지난 10월 전국 지자체 최초로 공공건축문화제를 개최했다. 2019년 제도를 개편한 이후 실제로 지어진 공공건축물과 앞으로 지어질 공공건축물을 시민들과 함께 경험하는 축제 한마당이 펼쳐졌다. 잘 지은 공공건축물은 시민 모두의 자산이 된다. 우대성 파주시 공공건축가(우연히 프로젝트 건축사사무소 대표)는 “공모전이 끝나면 심사위원 평가를 해서 더 공정하고 실력 있는 사람들로 파주시의 심사위원 명단을 재정비해 나갔고, 그 결과 파주의 공공건축 공모전의 신뢰도가 높아질 수 있었다”고 전했다.
외면받는 조달청 공모전
하지만 심사위원을 사전에 공개해도 젊은 건축가들이 여전히 외면하는 공모전이 있다. 각 정부 기관의 공공건축 건립 프로젝트를 위탁 운영하는 조달청의 공모전이 대표적이다. 파주시처럼 전담하는 부서나 전문가가 없는 지자체나 공공기관의 경우 조달청에 공공건축 설계공모전을 맡긴다. 그런데 “조달청은 안 들어가는 판이 됐다. 형식적인 심사 절차와 심사위원이 문제”(전보림 건축가)라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조달청과 화성시에서 열린 공모전의 결과를 살펴보자.
지난 7일 조달청 주관으로 대전에 지어질 국립미술품수장보존센터 공모전 심사가 열렸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조달청에 위탁한 것으로, 옛 충남도청을 미술품 수장고로 개보수하는 프로젝트였다. 국토부의 지침대로 심사위원 9명은 모두 사전에 공개됐다. 설계비 26억원(공사비 396억원)으로 규모도 크고 상징성이 있는 프로젝트였지만, 달랑 3팀만 작품을 제출했다.
조달청의 심사위원 명단 자체에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조달청은 약 240여명의 심사위원 명단을 관리하고 있다. 주로 건축계획 분야 조교수 이상으로, 스스로 신청한 이들로 꾸려진다. 설계 공모전이 열리면 이 명단에서 기계가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 참가 의향을 묻고 참가하겠다는 사람이 심사위원이 된다. ‘이 명단을 평상시에 관리해 공모전을 휩쓰는 업체들이 숱하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돈다.
국립미술품수장보존센터 공모전 심사위원의 경우 조달청이 9명 중 7명을 선정했고, 2명은 국립현대미술관 추천으로 참석했다. 등록문화재인데도 심사위원 중에 문화재 전문가는 없었다. 이날 국립현대미술관 추천으로 심사를 맡은 김인철 건축가(아르키움 대표)는 “발표자와 심사위원간의 질의응답 시간을 통틀어 5분만 준데다가, 심사위원끼리 치열하게 토론해 당선작을 뽑아야 하는데 이를 이끌 심사위원장도 뽑지 않고 공무원이 심사위원 한명씩 돌아가면서 하실 말씀 하라는 식으로 진행했다”며 “좋은 안을 뽑기 위한 심사가 아니라 행정절차에 지나지 않는 심사였다”고 덧붙였다.
이에 조달청 측은 “공평하게 하기 위해 공사금액별로 정한 시간대로 질의응답 시간을 진행하고, 토론하라고 해도 심사위원들이 잘 안 한다”고 말했다.
심사위원 제대로 구성해 공개해야 바뀐다
그런데 지난달 4일 화성시 주최로 연 ‘매송 주민편익시설’(가칭) 공모전의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설계비 6억원(공사비 120억원)의 프로젝트였지만, 124팀이 응모했고, 실제 작품도 43팀이 제출했다. 화성시도 파주시와 같은 총괄건축가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이승환 화성시 건축총괄계획가(아이디알 건축사사무소 대표)는 “화성시의 경우 건축상을 받았거나, 이전에 공모전에 당선돼 신망이 두터운 사람으로 심사위원 풀을 엄선해 꾸렸고, 로비를 받는다고 소문난 블랙리스트는 제외했다”고 말했다.
공모전에서 당선된 신호섭 건축가(신 아키텍츠 공동대표)는 “하나의 공모전에 참석하기 위해 최소 직원 두 명이 2~3개월가량 투입돼야 하는데 작은 아틀리에의 경우 심사위원, 즉 심판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신뢰가 담보되지 않는 ‘깜깜이 심사’에 뛰어드는 것은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결국 심사위원 사전 공개 제도가 제대로 효과를 내려면 공공건축물의 성격에 따라 심사위원을 구성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윤승현 중앙대 건축학부 교수(건축사사무소 인터커드 대표)는 “심사위원을 기계적으로 꾸리는 게 아니라, 공공건축물의 특성에 따라 제대로 심사할 심사위원을 뽑아 미리 공개하고 심사 과정 전체를 아예 공개해 공공건축 설계 공모 판에 로비가 발붙이지 못 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조달청 발주에서 벗어나 해외처럼 전문적인 기구가 공공건축물 설계 프로젝트를 총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함인선 광주시 총괄건축가는 “프랑스의 공공건축 전담지원 조직 ‘MIQCP’처럼 전문적인 기구가 공공건축물 발주를 맡아 로비 수주전이 아니라 제대로 된 공공건축물이 많이 지어질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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