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나는 조인성과 결혼했다

2022. 12. 24.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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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31일, 내 나이 서른아홉의 마지막 날에는 프랑스 파리에 가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나면 꼼짝없이 마흔이 돼야 하지만, 만 나이를 사용하는 그곳에서라면 여전히 삼십대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비교적 가까운 다른 나라에 가더라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야 있겠지만 낭만의 도시 파리 정도는 가 줘야 울적한 기분을 상쇄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년부터 우리나라에도 만 나이가 도입된다고 하니 비싼 돈 들여 파리까지 날아갈 필요가 없게 됐다. 국민의 회춘에 힘써주는 국가에 감사하기는 하나 인생의 목표를 잃어 다소 허탈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나와의 약속이 파투 났으니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것이 당연지사. 그날 어디에서 무얼 하면 좋을지 상상의 나래를 다시금 펼쳐 보았다. 월세살이를 벗어난 나는 내 집을 마련하게 된다. 거실 창문 밖, 우뚝 솟은 여러 그루의 나무 사이로 햇살이 기분 좋게 부서져 들어온다. 열 명은 너끈히 앉을 수 있는 넓은 테이블에 홀로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는데 때마침 흰 눈이 풀풀 내린다. 어디선가 흰 당나귀가 응앙응앙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긴 한데, 이건 상상이 아니라 망상이잖아!

파리로 여행을 다녀오는 건 기백만원이면 해결될 일이다. 물론 통장이 가벼운 내게 적은 돈은 아니지만 12개월 무이자 할부의 도움을 살짝 받는다면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널따란 테이블이 들어갈 만한 집을 사려면 억 소리가 여러 번 나는 돈이 필요하지 않은가. 출생의 비밀이 밝혀져 유산을 상속받는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으나 막장 드라마 속에서나 벌어지는 사건이 내 인생에 일어날 리 없으므로 망상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언젠가 방송인 전현무가 했던 말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꿈이 없는 것도 비참하지만 안 되는 꿈을 잡고 있는 것도 비참하다.

지금까지 벌어온 돈과, 현재 벌어들이는 돈과, 앞으로 벌 수 있는 돈을 머릿속으로 더해보다가 더 비참해지기 전에 서둘러 꿈을 놓아버렸다. 그러고는 솔잎을 먹고 사는 송충이처럼 이불을 둘둘 말고서는 몸을 잔뜩 웅크렸다. 불만족스러운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휴대전화 속으로 숨어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쓸데없는 영상을 보며 시간을 죽이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내 마음을 더 잘 안다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를 격려하기라도 하는 듯 동기 부여 영상을 추천해 줬다.

영상의 내용을 요약해 보자면 이렇다. 이루고자 하는 바를 소리 내어 말하라. 단 ‘무엇을 원한다’고 말하지 말고 ‘이미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공간처럼 존재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원하는 미래는 이미 존재하니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이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목표가 이뤄질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삶이 펼쳐질 것이다. 어린 시절, ‘은하철도 999’를 보며 우주 어딘가에 또 다른 내가 살고 있을 거라 굳게 믿던 내 모습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이다지도 정성스러운 헛소리는 처음이라 구시렁거리며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다음 날,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새벽 요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갑자기 귤이 먹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연 마트가 없었다. 간밤에 봤던 영상이 생각나서 장난삼아 작게 외쳐 보았다. “나는 귤을 먹었다!” 그런 스스로가 퍽 우스워 킥킥대는 와중에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현관문 앞 음식 확인 요망.’ 근처에 사는 언니가 아침 수영을 가는 길에 먹을거리를 두고 간 것이다. 집에 도착해 가방을 열어 보았더니 아니 글쎄 굴비며 고등어와 함께 귤 한 봉지가 들어 있지 뭐란 말인가!

이건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원하는 삶이 펼쳐질 수 있다는 작은 신호일까? 아무래도 전자에 가깝겠지만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라 했다. 그리고 그 반복을 만들어 내는 건 온전히 내 몫이었다. “나는 설거지를 했다!” 일단은 외치고서는 미뤄뒀던 설거지를 했다. “나는 샤워를 했다!” 또다시 외치고서는 곧바로 욕실로 들어가 구석구석 몸을 닦았다. 말하는 대로 이뤄지는 기적을 맛본 나는 신이 나서 한 번 더 외쳤다. “나는 조인성과 결혼했다!” 으응, 너무 멀리 갔나? 안 되면 될 때까지, 나는 조인성과 결혼했다!

이주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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