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끌' 꿈꾼 K장녀 김고은…일상 치부 대놓고 그린 "미친 드라마" [배우언니]

나원정 2022. 12. 24.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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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언니]
'작은 아씨들' 드라마 vs 원작
154년 건너온 여성과 돈 이야기
'조' 대신 K장녀 주인공 된 이유는…
강유정 평론가 "돈의 치부 와닿아"
tvN 드라마 '작은아씨들'

“우리 사회 곳곳에 돈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흐른다. 그런 사회의 영혼은 어떤 모습일까?”(‘작은 아씨들’ 각본집)
가난과 돈에 관한 대사가 이렇게 많았던 드라마도 드뭅니다. 지난 10월 전국 11% 시청률(닐슨코리아 집계)로 종영한 tvN 12부작 드라마 ‘작은 아씨들’ 각본집(플레인아카이브)이 지난 9일 출간됐습니다. 박찬욱 영화(‘친절한 금자씨’ ‘박쥐’ ‘아가씨’ 등) 각본을 주로 써온 정서경 작가가 모성 신화를 비튼 ‘마더’(tvN, 2018)에 이어 두 번째로 선보인 드라마인데요. 19세기 미국 동명 소설 속 가난한 기독교 집안 자매들을 21세기 한국 무대로 옮겨와 재벌 비자금 700억원 횡령 사건의 주인공으로 그려냈죠.
“가난하게 컸니? 너무 잘 참아서.” “내가 언니 등골을 빼면 나중에 어떻게 갚아? 언니는 이미 병신이 돼 있는데.” “사랑은 돈으로 하는 거야.” 이런 극중 대사가 지금껏 회자됩니다. 지난 10월 언론 인터뷰에서 정서경 작가는 “요즘은 어딜 가도 주식, 아파트, 코인 등 돈 이야기를 인사처럼 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돈에 대해 대놓고 말하게 된 사회 분위기엔 뭔가 있었다”고 돈의 시대정신을 주목한 이유를 밝혔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탈락한 이들의 현실을 불편할 만큼 생생하게 잘 그렸단 의미에서 “미친 드라마”라는 시청자 댓글도 나옵니다.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지난달 종영 후에도 넷플릭스 TV 시리즈 중 세계 7위에 오를 만큼 해외에서도 화제였죠. 대만·인도네시아·일본 등 비영어권 넷플릭스 TV부문 9주 연속 톱10에 들었습니다. ‘돈’의 화두에 공감한 건 해외 시청자도 같았단 얘기죠.

『작은 아씨들 : 정서경 대본집 세트』. 사진 플레인

1868년 소설에선 목사 아버지, 자선가 어머니에 순응했던 네 자매가 2022년 한국 드라마에선 어떻게 도박빚을 지고 필리핀에 도망간 아빠, 막내딸 수학여행비를 훔쳐 아빠를 따라간 엄마를 둔 세 자매가 됐을까요. 중앙일보 팟캐스트 J팟 ‘배우언니’(https://www.joongang.co.kr/jpod/episode/984)가 대중문화 속 신화‧고전의 뿌리를 분석해온 문화평론가 강유정(강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와 함께, 154년 원작과 드라마 속 여성과 돈 이야기를 비교해봤습니다.

※ 주의. 기사와 오디오 모두 드라마 ‘작은 아씨들’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왜 조 아닌 K장녀 주인공 됐을까


강유정 평론가는 ‘작은 아씨들’의 성공비결로 ‘응전력’을 꼽습니다. 거대한 권력층, 양극화한 현실과 맞서 싸우려는 응전력은 ‘오징어 게임’ ‘기생충’ 등 성공한 K콘텐트에 빠지지 않는 ‘K패치’의 하나입니다. 흔히 이런 작품들이 남성 대 남성의 싸움이었다면, ‘작은 아씨들’은 자칫 식상할 법한 서민 영웅 캐릭터가 ‘성별’을 바꿔 신선해졌습니다.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첫째 인주가 자신이 다니는 회사 비자금이 든 가방을 보고 놀라는 장면. 사진 tvN
이는 원작자 루이자 메이 올콧(1832~1888)과도 관련 있습니다. 그는 여성에겐 참정권이라는 가장 기본권적인 목소리도 없던 시절, 여성 작가로서 글을 써서 돈을 벌며 이 작품으로 소녀 문학의 첫 장을 열었죠. 19세기 여성은 물려받은 재산이 있거나, 결혼하지 않으면 생계를 이을 길이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올콧은 여성에게 결혼이 생존이었던 이런 현실을 자신의 분신 같은 캐릭터인 작가 지망생 둘째 ‘조’의 입을 통해 비판합니다. “사랑이 여자가 추구할 전부란 말이 신물 난다” “나이 먹고 ‘마치 양’으로 불리면서 긴 드레스를 입고 과꽃처럼 새침해 보여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
드라마에서 세 자매가 사는 집. 왼쪽부터 미대를 지망하는 막내 인혜, 첫째 인주, 사회부 기자로 일하는 둘째 인경이다.[tvN]
소설은 주인공도 ‘조’인데요, 수차례 영화화됐을 때도 바뀌지 않은 불문율입니다. 1933년 영화에선 캐서린 헵번, 1994년엔 위노나 라이더, 2019년엔 시얼샤 로넌 등 당대 연기파 스타들이 맡았죠.
흥미롭게도 드라마의 중심축은 조를 계승한 둘째 인경(남지현)이 아닌, 맏딸 인주로 바뀌었습니다. 소설에서 맏이 ‘메그’는 예쁘게 꾸미고 무도회에 가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길 꿈꾸는 캐릭터였죠. 드라마에서 인주는 집안을 일으키려고 돈 많은 남자와 결혼했다가 실패한 이혼녀로 나옵니다. 부모 대신 동생들을 챙기는 ‘K장녀’죠.
건설회사의 ‘왕따’ 경리직원인 그가 유일하게 친했던 직장동료 화영 언니(추자현)를 통해 고액 비자금에 휘말리며 모든 사건이 시작됩니다. 주인공이 사회부 기자 인경이었다면 전형적인 재벌 대 정의파 기자의 대결 구도로 진행됐겠지만, 세 자매 중 가장 수동적이고 평범하며 회사에서도 왕따였던, 어쩌면 진실에서 가장 소외돼있던 인경이 주인공이 되면서 그가 세상에 눈떠가는 과정이 더욱 극적인 미스터리 스릴러로 전개됩니다.

네 자매에서 세 자매로, 트라우마의 유령


소설과 드라마의 가장 결정적 차이는 네 자매가 아닌 세 자매로 출발한다는 겁니다. 드라마 중반까지 누구도 말하지 않는 셋째의 존재는 같은 유전병을 앓는 막내 인혜(박지후)에겐 “(가난에서) 도망치라” 경고하는 유령으로 묘사됩니다.
여러 번 영화로 제작됐고, 그레타 거윅 감독이 2019년 다시 리메이크해 사랑받은 ‘작은 아씨들.’ 왼쪽부터 첫째 메그, 둘째 조, 막내 에이미, 셋째 베스다. 영화에선 원작 소설처럼 조가 극을 이끈다. 시얼샤 로넌이 연기했다. 사진 소니픽쳐스
소설에선 네 자매 중 셋째 베스가 이웃 아기를 돌보다 성홍열이 옮아 세상을 떠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강유정 평론가는 두 죽음의 차이를 이렇게 짚습니다. “베스가 이름을 남기고 죽어갔기 때문에 그 부재를 서로 위로하며 견디는 가족의 따뜻한 연대가 가능했다면, 드라마는 너무 어린 시절 아이를 잃었을 뿐 아니라 가난 때문에 병을 못 고쳐서 돈이 원흉이 됐다. 가족에겐 언어가 될 수 없는 무의식적인 상처로 남았다”라고요. 이를 “모두가 (셋째의 죽음을 위로하거나 서로 뭉치는 대신) 돈이 없음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로 펼쳐진 이유”라고 그는 말합니다.
'작은 아씨들'에서 인혜의 친구 엄마이자 재벌가 안주인 원상아는 권력을 가졌지만 오래 전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진 tvN

‘영끌’ 세대의 엔딩…아파트, 영혼의 무게


원작과 달라진 점으론 엔딩의 ‘집’도 있습니다. 드라마엔 인주가 동생들과 함께 살 ‘아파트’를 꿈꾸는 대목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극 중 “장기를 팔았으면 팔았지 꿈을 팔겠냐”란 대사에서 나온 ‘꿈’이 바로 아파트. 요즘 청년세대의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으다)’ 소원 1순위죠.
“좋은 집에 살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웬만하면 집에 오면 다 극복되니까.” 이렇게 말한 인주(오른쪽)의 고모할머니(김미숙, 왼쪽)는 막대한 부를 이뤘지만, 그로 인해 세상을 떠난다. 사진 tvN
기독교 정신이 깔린 원작에선 조가 대고모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대저택을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로 만들죠. 가족을 벗어나 베풀라고 한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기도 합니다. 강유정 평론가는 “지금의 드라마는 극 중 등장인물 뿐 아니라 시청자도 그렇게 원대한 박애주의를 볼 여유가 없는 것 같다. 그런 판타지를 펼칠 경우 말도 안 된다며 시청자가 이탈할 수 있기 때문에 현실에 묶인 결말로 애당초 박애주의의 가능성을 차단한 게 아닌가 씁쓸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돈에 대한 철학적이거나 현학적 얘기가 아니라 오히려 돈을 아주 세속적으로 따라가는 게 통한 것 같아요. 일상의 치부에 가까운 이야기까지 노골적으로 했던 게 대중에게 와 닿았다고 생각합니다.”(강유정 평론가)

24일 '배우언니' 팟캐스트 '작은 아씨들' 편(하단 영상)에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과 좋아요, 댓글은 방송 제작에 큰 힘이 됩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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