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동네 빵집서 살래요”
노동 문제와 연계한 새로운 불매 운동 행태
SPC그룹 계열의 빵 공장에서 20대 청년 노동자가 사망한 뒤 두 달 넘은 시간이 흘렀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SPC그룹 브랜드들은 크리스마스 시즌 상품을 발표하고 있지만 한쪽에선 여전히 SPC 불매운동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작은 움직임이 SPC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에 힘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소비자들이다.
서울 소재 대학에 다니는 여대생 박세희씨(24)는 파리바게뜨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친구로부터 ‘크리스마스 당일 하루 매출이 1000만원에 육박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불매를 지속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파리바게뜨는 SPC그룹 대표 계열사 중 하나다.
그는 23일 “평소 크리스마스에는 가족끼리 집에서 가까운 파리바게뜨 케이크를 사 먹곤 했는데, 이번에는 개인 카페에서 구매하려 한다”고 전했다. 박씨는 “요즘엔 SPC 대체품을 자연스럽게 찾고 있는 것 같다”며 “지금은 굳이 가까운 곳에 파리바게뜨가 있더라도 다른 곳을 찾아보는 습관이 생겼다”고 전했다.
또 다른 여대생 박윤서씨(20)는 지난 10월 대학생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 ‘SPC 제품 먹자고 할 때 마찰 없이 거절하는 꿀팁’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적극적인 불매운동을 유도했다.
박씨는 글을 쓴 이유를 묻자 “지인들이 매장을 가자고 할 때 제가 썼던 방법이 잘 먹히는 것 같아서 다른 학우들에게도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그는 “노동자 대우를 제대로 하지 않고 불공정하게 하는 등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방식은 더 이상 소비자들이 그냥 넘기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기업에 전할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이 불매라고 생각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씨는 평소 SPC 브랜드인 파리크라상의 케이크를 즐겨 먹었지만,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사 먹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자주 사용하는 배달 앱이나 멤버십 앱에 SPC 제품 할인 쿠폰이 자주 올라오는 것을 보고 불매 효과가 있다고 느낀다”며 “제대로 된 사과와 조치가 분명하게 보일 때까지 불매 운동을 지속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각종 커뮤니티와 SNS에는 ‘SPC 불매를 멈추지 말자’는 글이 올라오고 있다. 한 이용자는 “파리바게뜨 아르바이트를 5년간 했는데, 크리스마스 시즌 매출이 1년 전체 매출을 웃돈다. 이번 크리스마스 빵은 다른 곳에서 사 먹자”고 제안했다.
또 다른 이용자는 “(SPC 그룹이) 불매운동을 호구로 보는 건, 저거(크리스마스 매출을) 믿고 코웃음 치는 것”이라며 SPC 불매 운동이 가장 효과를 보기 위해선 크리스마스 케이크 매출에 타격을 안겨야 한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해당 트윗은 2만4000번 이상 리트윗되며 공감을 얻었다.
소비자들 중엔 “아직까지 SPC 계열 브랜드를 떠올렸을 때, 불쾌한 느낌이 든다”며 지난 10월 노동자 끼임사고 후 제품을 사 먹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는 이들도 있다.
전문가들은 크리스마스 시즌까지 계속되는 SPC 불매운동이 기존의 불매운동과는 확실히 ‘다르다’고 말한다. SPC 불매운동은 ‘제품 문제’에 주목한 기존 운동과 달리 해당 기업의 ‘노동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상품 자체의 결함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을 만드는 노동자의 권익에 중심을 뒀다.
SPC 불매운동을 촉발한 것은 지난 10월 15일 SPC그룹의 계열사 SPL의 경기도 평택시 소재 제빵공장에서 일어난 사망사고다. 당시 직원 A씨(23·여)가 근무 중 소스 배합기에 몸이 끼여 숨졌다. 해당 공장에서는 이 사고가 일어나기 일주일 전에도 비정규직 직원의 손이 기계에 끼이는 사고가 있었다. 하지만 사측에서 피해 직원이 비정규직이라며 알아서 병원을 가라고 했던 일이 뒤늦게 알려지며 논란이 더욱 거세졌다. 이에 누리꾼을 중심으로 SPC그룹과 계열사의 상품을 불매하자는 움직임이 포착됐고, 이는 본격적인 불매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이번 SPC 불매운동에 대해 “노동자들의 안전성이 담보되지 않은 것을 문제로 지적돼 일어난 불매운동”이라며 “노동과 관련된 문제”라고 짚었다.
부수현 경상대 심리학과 교수 역시 SPC 불매운동에 대해 “열악한 근무 환경 속에서 희생당한 노동자에게 진심으로 공감하고 그 죽음을 슬퍼하는 과정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기업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게 된 운동”이라고 보았다.
노동운동의 성격을 띤 불매운동에 가장 힘이 되는 것은 일반 시민들의 연대와 지지다. 노동자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직접 사용자를 압박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부당한 일이 (시민들에게) 알려지고 공감되면,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같이 해결하자’는 움직임이 만들어진다”며 시민들의 연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누구라도 길거리에 다친 채 있으면 시민들이 모여서 그 사람을 챙기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며 “이번 SPC 노동자 사망사고를 접한 사람들이 함께 느낀 분노와 공감대 형성이 불매 운동의 배경이 됐다”고 분석했다.
인권단체 청년유니온은 해당 사고 직후 불매운동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청년유니온은 ‘파리바게뜨 노동자 힘내라 청년공동행동’ 등 청년단체들과 함께 파리바게뜨 노조탄압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제품 불매운동을 시작했다.
나현우 청년유니온 사무처장은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SPL 산재 사망사고 이전에 SPC 그룹에서 노조 탄압이 있었다”며 “사회적 합의가 있었음에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사회적 책임이 큰 기업일수록 그 책임이 따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내버려 두고 있는 것에 문제의식이 있었다”고 했다.
나 사무처장은 SPC 사태에 대해 “사람이 빵을 만든다. 기계 같은 경우 공정 속도를 빠르게 할 수 있지만,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사실 야간 노동, 고강도 노동인데 사람을 더 뽑으면 돈을 더 써야 하니 적게 투입하고, 안전 관리하는데도 비용이 드니 관리하지 않는 총체적인 문제 속에서 SPL 사망 사건이 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산재사고 이후 해당 기업이 매출 하락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참사의 원인을 바라보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불매운동의 양상과 원인은 다양하지만, 결국 기업에 분노하고 불매운동을 이끄는 것은 모두 소비자의 몫이다. 국민일보가 만난 소비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불매운동이 노동자 권익 보호에 기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파리바게뜨 제빵기사들에 대한 처우 논란이 불거졌을 때부터 불매운동을 했다는 윤모씨(31)는 “초반에는 파리바게뜨, 던킨도너츠, 배스킨라빈스 등 잘 알려진 브랜드들을 찾지 않는 방식으로 불매운동을 했지만 현재는 SPC 관련 계열사 제품도 모두 소비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며 “빵이나 식품을 살 때면 무조건 제조원, 제조사를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SPL 산재 사망사고 이후 SPC 브랜드 불매 운동을 시작했다는 우모씨(22·여)는 “불매운동으로 타격을 입고 경각심을 가지길 바란다”며 “이렇게 대응해서는 사람들이 SPC 제품을 소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SPC 사측이 노동자들을 잘 대우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 SPC 불매운동이 달라진 소비자들의 행태를 반영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영애 인천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요즘 소비자들은 예전처럼 수동적이지 않고, 물건을 시장에 내놓은 대로 그저 구매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기업이 사회적 역할을 잘 수행하면 소비자들은 크게 칭찬해주기도 하고, 돈쭐(돈으로 혼쭐내준다는 의미)을 내기도 한다”고 전했다.
부 교수는 SPC 불매운동이 일시적인 운동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고 있어도 여전히 산업현장에서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고 있다”며 “젊은 노동자들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죽어 나갈 것이다. SPC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들이 산업 현장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성영 이지민 인턴기자 onlinenews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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