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104m, 나지막한 산따라 펼쳐지는 보물같은 풍경

글 최은정 사진 유승현·조치원 2022. 12. 23.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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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TMI] 별마루 '겨울 은하수' 따라... 인천 수봉산 둘레 마실길

골목을 걷는 것은 동시대를 기억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이다. 그 안에 우리네 삶의 오늘과 내일, 어제가 있다. '골목길 TMI'는 골목의 새로운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다. 이번엔 인천 수봉산 자락의 오래된 마을을 느리게 걸어보았다. 은하수 쏟아지는 골목의 풍경들이 말을 걸어오며 다정한 길동무가 돼 주었다. <기자말>

[글 최은정 사진 유승현·조치원]

 수봉산 둘레 마실길에서 마주친 풍경들. 수봉산별마루를 흐르는 은하수, 기찻길 옆 공원, 알록달록 벽화 등 골목의 풍경들이 다정한 길동무가 되어준다.
ⓒ 굿모닝인천
 
 수봉산 둘레 마실길에서 마주친 풍경들. 수봉산별마루를 흐르는 은하수, 기찻길 옆 공원, 알록달록 벽화 등 골목의 풍경들이 다정한 길동무가 되어준다.
ⓒ 굿모닝인천
 
인천 미추홀구 한복판에 서 있는 수봉산은 해발 104m의 나지막한 산이다. 사방으로 뻗은 산자락은 용현1·4동, 도화1동, 주안2동과 맞닿아 있다.

산비탈엔 키 작은 집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피란민들이 흘러들어 오고 일자리를 찾아 몰려온 노동자들이 정착하면서 만들어진 풍경이다. 사람과 화물이 오가는 인천항과 경인고속도로, 수도권 전철 1호선이 가까워 많은 것이 생기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지역 예술가들이 마을 탐색단을 꾸려 '수봉산 둘레 마실길'을 만든 때는 2020년 여름이다. 2년 동안 지역을 구석구석 누비며, 익숙해서 오히려 간과해 온 가치를 주민들 스스로 발견해 냈다. 마실길 지도 한 장 들고 동네를 걷다 보면 아름다운 사람들과 골목의 가치를 알려주는 보물을 만나게 된다.

기찻길 옆 놀이터, 주인공원
 
 주인공원 입구의 공공미술 작품 '공존 트리'. 450여 개의 새집이 모여 마음의 공동체이자 공존의 나무를 이루고 있다.
ⓒ 굿모닝인천
 
 지금은 사라진 남인천역의 풍경을 담은 벽화. 오래된 구옥, 침목의 흔적 등 옛 풍경이 남아 있다.
ⓒ 굿모닝인천
 
가난했던 시절, 기찻길은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였다. 소녀들은 널뛰기나 고무줄놀이를 했고 사내아이들은 못이나 병뚜껑을 철로 위에 얹어놓은 채 열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천천히 지나가는 화물차 칸에 올라타는 간 큰 아이들도 있었다.

1985년 열차는 멈춰섰다. 덜컹덜컹 동네 아이들을 불러모으던 기찻길 따라 '주인공원'이 이어졌다. 주안역과 남인천역 사이를 오가던 주인선이 미군 전용 화물을 싣고 달리던 길이다. 폐선로를 따라 걷다 보면 과거 군용 화물열차가 다니던 시절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기찻길 옆 골목에는 아직 군데군데 구옥이 남아 있다. 공원 입구에 자리한 '톰 소여의 오두막'으로 불리는 이층집은 벽화 뒤에 동화 속 풍경처럼 서 있다. 1983년에 지은 '제물포맨숀', 오래된 이발소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택가와 이어진 공원에는 운동기구와 평상이 있어 동네 어르신들이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장소로 인기다. 반려견과 산책하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골목 풍경을 찍고 있는데 아이들이 순식간에 렌즈 안으로 들어왔다. '남인천역 벽화' 앞에서 천진난만한 웃음을 흩뿌린다. 기찻길 옆은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들에게 최고의 놀이터다.

오아시스 쉼터, 카페 '나무아래'
 
 키 큰 나무에 둘러 싸인 카페 '나무아래'
ⓒ 굿모닝인천
 
동네를 걷다 우연히 발견한 카페, 나무아래. 2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을 감싸 안은 커다란 나무 사이로 커피 향이 그윽하다. 10년 전 PC방이던 건물 1층에, 미추홀구에서 나고 자란 주인장이 카페를 열었다.

"골목이 밝아졌다고 다들 좋아하셨어요. 이왕이면 우리 마을을 위한 공간이 되고 싶었어요."

나무를 가꾸고, 매일 마당을 쓰는 덕분에 골목 한 귀퉁이가 환하게 밝아졌다. 카페 밖에도 벤치를 두어 마실 나온 사람들에게 '오아시스 쉼터'가 돼 준다.

카페 인기 메뉴는 생등심돈가스와 자몽에이드다. 재료 구입부터 조리까지, 주인장의 정성과 손맛에 절로 입소문이 났다.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고. 수봉산을 거닐다 우연히 들렀다가 단골이 된 경우도 있다. 그렇게 카페 나무아래는 사랑받는 공간이 됐다.

▶미추홀구 수봉안길 32 | 032-873-2175

뜨끈한 정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수봉목욕탕
 
 50년째 성업 중인 '수봉목욕탕'
ⓒ 굿모닝인천
 
한때 전성기를 누렸던 제물포시장 광장을 지나치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굴뚝이 눈에 들어온다. 1990년대까지는 흔했지만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대중목욕탕 굴뚝이다. '수봉목욕탕'은 대를 이어 50년째 성업 중이다. 열탕·온탕·냉탕 3개가 있다.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면 수증기처럼 예전 정취가 모락모락 피어난다.

1971년에 문을 연 건물은 옛날 목욕탕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간판 옆에 달린 '목욕합니다'란 표시등이 뱅글뱅글 돌아가는 모습에 어린 시절 할머니와 손잡고 목욕탕 가던 추억이 떠오른다.

"원래는 1층만 목욕탕, 2층은 여관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인천에 숙소가 별로 없어 전국체전 때면 선수단이 머물다 가곤 했어요. 1990년대 들어 목욕탕이 대형화되며 1층을 여탕, 2층을 남탕으로 개조했어요. 4개월 이상 걸린 큰 공사였어요."

수십 년째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탕을 청소하고 뜨끈하게 달구는 주인 부부 덕분에 지금까지도 동네 단골들이 애용하고 있다. 길손들에게 아랫목이었고, 동네 사랑방이었던 수봉목욕탕은 오늘도 따뜻한 온기를 내뿜으며 주민들을 기다린다.

▶미추홀구 수봉로 49 | 032-875-5693

하늘에서 만난 세상, 수봉전망대
 
 온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수봉전망대
ⓒ 굿모닝인천
 
마실길은 수봉산으로 이어진다. 마을 카페에서 골목길을 걸어 내려오면 영산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초입의 '지누골 정자쉼터'와 시니어 바리스타가 일하는 '수봉별마루도너츠카페'가 이정표가 돼 준다.

카페 앞에서 수봉산 송신탑을 올려다보면, 1976년 창건한 '영산정사' 건물이 보인다. 산비탈의 가파른 계단을 끼고 있는데, 색색으로 칠해 '타일계단'이라 부른다.

계단을 한 칸 한 칸 오르자 온 동네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 높지 않지만 가리는 건물이 없어 아기자기한 마을부터 하늘 끝까지 탁 트인 조망이 압권이다. 사람의 발길이 드문 편이라 싱그러운 흙냄새, 풀 내음이 콧속을 파고든다. 오롯이 혼자여도 괜찮고, 좋은 이들과 함께 오르면 더욱 정겨운 길이다.

▶미추홀구 수봉로 95번길 끝
 
 수봉별마루로 오르는 데크 길
ⓒ 굿모닝인천
 
- 숭의4동 마실길(총길이 4.6km, 약 3시간 소요) : 제물포역에서 시작되는 숭의4동 마실길은 주인선의 역사부터 익히게 된다. 폐선로의 흔적을 따라 걷다 보면 군용 화물열차가 다니던 시절을 추억하게 된다. 제물포시장의 너른 광장을 지나 수봉산마루를 향해 발을 옮기면 오래된 의상실, 목욕탕, 마을 카페 등 평범해서 더 특별한 공간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수봉산과 도심을 넘나들며 이어지는 길따라 잊고 살던 감성이 새살처럼 돋아난다.

- 용현1·4동 마실길(총길이 2.3km, 약 2시간 소요) : 수봉산 송신탑 불빛 아래, 색색의 기와지붕을 얹은 집이 서로 껴안고 기대어 산다. 아리마을, 푸른마을... 한국전쟁 때 피란 와 산동네에 자리잡은 오래된 풍경이다. 마실길은 수봉산의 오래된 맛집 '불티나왕돈까스'에서 시작해 용현1·4동의 오래된 골목을 구석구석 걷는 코스다. 알록달록한 벽화 골목, 담벼락 아래 옹기종기 내놓은 화분, 문 앞에 의자를 내어 놓은 풍경에 걷는 내내 따뜻함이 몽글몽글 피어 오른다.

굽이굽이 추억의 담벼락, 용현동 벽화 골목
 
 '아리마을 벽화 골목'의 아치형 입구
ⓒ 굿모닝인천
 
 담벼락 가득 봄, 여름, 가을이 피어나 있는 '계절 벽화 골목'
ⓒ 굿모닝인천
 
수봉공원은 인천 사람이라면 하나 정도 추억을 담고 있는 넉넉한 품을 가진 공원이다. 1980~1990년대 인천에서 유년기를 보낸 이들에겐 롯데월드와 에버랜드가 부럽지 않았던 '수봉놀이동산', 인천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인 AID 아파트의 흔적(수봉공원 경관폭포 자리)이 남아 있다. 또 그 숲에 기대어 산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수봉공원 밑자락의 팔복교회 부근, 굽이진 골목에 알록달록한 벽화가 길게 이어진다. '아리마을 벽화 골목'이라고 적힌 아치형 입구가 반긴다. '미워도 다시 한번', '샘표간장', 그 시절 교과서 등 추억의 이야기꽃이 낡은 담벼락에 피어난다. 우산 하나 지나기 벅찬 좁은 골목에 사는 주민들은 대부분 실향민이다. 고향에 언제 갈 수 있을까, 마음이 아리고 쓰리다 해서 '아리마을'이 됐다고 한다.

노천 갤러리를 지나 수봉남로6번길로 내려오면 동네의 노포가 이웃하며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다. 무지개헤어, 화이트세탁, 충남세탁, 재희이용원... 이름도 정겹다.

'행복한 골목학교'를 지나면 계절 벽화가 발길을 붙잡는다. 담벼락 가득 봄을 상징하는 벚꽃이 휘날리고, 옆 골목엔 시원한 여름 계곡이 흐른다. 울긋불긋한 단풍 벽화는 담벼락은 물론 바닥까지 금빛 융단을 깔아준다.
 
 수봉별마루 아래, 하늘에 가장 가까운 산동네의 일몰. 해가 시나브로 기울어지니 색색의 기와지붕 위로 붉은 노을이 깔린다.
ⓒ 굿모닝인천
 
 수봉별마루 아래, 하늘에 가장 가까운 산동네의 일몰. 해가 시나브로 기울어지니 색색의 기와지붕 위로 붉은 노을이 깔린다.
ⓒ 굿모닝인천
해가 시나브로 기울어지니 색색의 기와지붕 위로 붉은 노을이 깔린다. 한 해의 끄트머리가 노을빛에 물들어 사위어간다. 내일, 산비탈의 오래된 기와지붕엔 또다시 희망찬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끌어안고 기대어 사는 우리네 모습처럼 따뜻한 햇살이 세상을 고루고루 비추어주길 빌어본다.

▶아리마을 벽화골목 | 미추홀구 경인북길 279번길 18-6, 공영주차장 건너편
▶계절벽화 골목 | 미추홀구 수봉남로 12번길과 18번길 골목

글 최은정 본지 편집위원│사진 유승현·조치원 포토 디렉터

▶취재영상 보기(https://youtu.be/Qm6-Wovamg4)
         
 골목길 TMI - 수봉산 둘레 마실길 취재영상 섬네일
ⓒ 굿모닝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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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에서 발행하는 종합 매거진 <굿모닝인천> 2022년 12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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