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산타클로스는 맥주의 주인공이었다 [윤한샘의 맥주실록]

윤한샘 2022. 12. 23.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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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샘의 맥주실록] 멋진 크리스마스를 위한 맥주

[윤한샘 기자]

"내 뜻대로 할 수 있다면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떠들며 돌아다니는 천치 같은 것들은 푸딩에 넣어서 부글부글 끓인 다음, 심장에 호랑가시나무 말뚝을 꽂아서 파묻어버려야 해. 아무렴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스크루지는 지독히 외로운 사람이었다. 돈이 그의 페르소나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랑했던 여동생의 죽음과 돈을 벌기 위해 약혼녀와 헤어져야 했던 아픔, 크리스마스와 연결된 모든 기억은 스크루지에게 상처를 줬다. 두꺼운 마음의 벽을 가진 그가 크리스마스에 저주를 퍼붓는 건 당연했다. 사람들은 스크루지를 지독한 구두쇠, 베풀 줄 모르는 냉혈한, 돈에 집착하는 속물로 비난했지만 가난했던 가족을 위해 살았던 그에게 과연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유령에게 원래 인생의 교훈을 전파하는 임무가 있었는지 아니면 스크루지가 불행해지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크리스마스 유령은 개과천선할 기회를 선물했다. 롤러코스터 같은 밤을 보낸 스크루지와 달리 대부분의 사람은 크리스마스에 극적인 일을 기대하지 않는다. 100% 확신할 수 없지만 악덕 고리대금업자가 아니라면 크리스마스에 유령을 만나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크리스마스는 유령, 아니 누구의 훈계가 아닌 설렘과 기쁨이 가득한 날이다.

맥주는 오랫동안 이 특별한 날을 위한 술이었다. 사람들은 따스한 난로 곁에서 맥주를 마시며 성탄을 축복했다. 추운 겨울 함께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에 높은 알코올과 달큰한 향미를 가진 크리스마스 맥주보다 더 좋은 음료는 없었다. 때때로 시나몬이나 생강을 넣은 맥주는 음식을 대신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맥주는 보통 사미클라우스 비어, 즉 산타클로스 맥주로 불린다. 지금은 코카콜라에 선수를 뺏겼지만 사실 산타클로스는 맥주의 주인공이었다. 산타클로스는 4세기 지금의 터키에 있던 뮈라의 주교 성 니콜라우스에서 유래되었다. 

성 니콜라우스는 남몰래 선행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한번은 가난 때문에 세 딸을 사창가에 팔려는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금이 들어있는 자루를 몰래 굴뚝 속에 남겨 이들을 위기에서 구해준다. 이런 성 니콜라우스의 선행은 점차 유럽으로 전파되었고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나눠주거나 자선을 베푸는 전통이 만들어졌다. 산타클로스의 상징과 같은 굴뚝 타고 내려오는 모습도 여기서 기원했다. 

산타클로스, 상투스 니콜라우스, 사미클라우스, 산테 클라우스 같은 이름만큼 맥주 또한 다양하다. 오스트리아 슐로스 에겐베르크 양조장의 사미클라우스 비어는 성 니콜라우스의 이름을 딴 대표적인 크리스마스 맥주다. 라거치고는 드물게 14% 알코올을 가진 이 맥주는 성 니콜라우스 축일인 12월 6일에 양조되어 10개월의 숙성 기간을 거쳐 출시된다. 독일에서도 크리스마스가 아닌 12월 6일을 성 니콜라우스의 날로 보내며 장화처럼 생긴 비어 부트에 맥주를 마시기도 한다. 

만인을 위한 만인의 크리스마스가 있는 것처럼 크리스마스 맥주 스타일을 정의하기는 어렵다. 12월이 되면 양조장들은 각자의 스토리와 개성을 담은 다양한 스타일의 크리스마스 맥주를 내놓는다. 구세군 종소리가 들리면 흔히 마실 수 있는 맥주를 잠시 뒤로하고 이 특별한 맥주를 만나보는 건 어떨까? 크리스마스를 더 크리스마스답게 하기 위해서.

분홍 코끼리와 함께, 델리리움 크리스마스
 
 분홍 코끼리 델리리움 크리스마스
ⓒ 윤한샘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는 분홍 코끼리를 본다면 반갑게 인사해보자. 벨기에에서 온 이 산타 코끼리는 우리에게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약속한다. 귀엽고 친숙한 라벨과 달리 이 맥주는 10%라는 높은 알코올을 갖고 있다. 하지만 겁먹지는 말자. 8% 정도 알코올을 지닌 일반적인 벨지안 다크 스트롱 에일보다 더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특별하다는 뜻이니까. 

시음온도에 맞춰 변하는 이 맥주의 향미를 즐겨보자. 이를 위해서는 냉장고가 아닌 실온 보관을 해야 한다. 시작은 섭씨 10도 정도, 맥주잔은 손으로 감쌀 수 있는 벨지안 튤립잔을 추천한다. 잔에 따른 맥주 온도를 체온으로 조금씩 올리면 알코올과 함께 잠자던 향들이 깨어난다. 

붉은 기가 도는 불투명한 고동색은 마치 겨울밤 같다. 코끝에서 퍼지는 향은 건자두와 송진을 섞은 모습이다. 흑설탕 같은 달큰함이 있지만 살짝 튀는 알코올 향이 균형감을 맞춘다. 쓴맛은 낮지만 입안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은 묵직하다. 하지만 목 넘김이 깔끔해 마시기 편하다. 

이 맥주는 조용히 크리스마스의 여유를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 어울린다. 혼자 보내는 크리스마스가 꼭 나쁜 것은 아니지 않는가. 바쁜 일상을 잊게 하는 작은 트리와 조명 그리고 음악과 함께 한 해를 정리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의미 있는 크리스마스도 없다. 델리리움 크리스마스는 이 모든 것의 화룡점정이다. 곁들일 수 있는 치즈나 말린 무화과 아니면 갓 구운 육포가 있다면 좋다. 델리리움 크리스마스를 마시며 내년을 계획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크리스마스 맥주 앙상블, 아벤티누스 아이스복
 
 아벤티누스 아이스복
ⓒ 윤한샘
아벤티누스 아이스복은 크리스마스 맥주는 아니지만 다른 어떤 맥주보다 크리스마스에 어울린다. 8.2% 알코올을 갖는 밀맥주, 아벤티누스를 살짝 얼려 농축된 알코올을 뽑아낸 이 맥주는 무려 12% 알코올을 자랑한다. 

잔속으로 휘감겨 들어가는 맥주는 마치 보라색이 살짝 염색된 것 같다. 빛이 전혀 투과되지 않는 짙은 갈색에 보랏빛이 비친다. 이 보라색은 향에서 온 것일까? 농밀하지만 우아한 오디와 블루베리 향이 12% 알코올과 만나 입안과 비강 그리고 목을 가득 채운다. 곧이어 올라오는 정향은 섬세하지만 또렷하다. 묵직한 바디감 속에 숨어있던 단맛은 진한 크림과 같이 부드럽게 혀 위를 누르며 향미를 곱씹게 만든다. 

이 맥주는 좋아하는 사람과 서로의 눈을 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크리스마스 저녁에 어울린다. 아무리 긴 시간이라도 이 맥주는 향미를 머금은 채 기다려줄 것이다. 초콜릿이나 블루베리 케이크 한 조각이 있다면 완벽하다. 아벤티누스 아이스복과 케이크가 연주하는 단맛의 앙상블로 크리스마스가 아름다워질 테니. 의심하지 말고 그냥 맥주에 몸을 맡겨보자. 

크리스마스 별을 따라, 스텔라 아르투아
 
 스텔라 아르투아
ⓒ 오비
1926년 벨기에 덴 호른 양조장은 크리스마스 시즌 맥주를 양조한다. 판매보다 선물용에 가까웠지만 양조사 아르투아는 그럴 듯한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아르투아라고만 하기에 뭔가 부족했던 순간, 크리스마스 별을 의미하는 스텔라가 떠올랐고 스텔라 아르투아가 탄생했다. 

사람들은 이 황금색 라거에 열광했다. 이에 고무된 아르투아는 스텔라 아르투아를 자신의 간판으로 키우기로 하고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했다. 벨기에에서는 흔치 않은 스타일이었지만 곧 다른 나라의 필스너와 어깨를 견줄 만큼 성장했고 특히 미국 시장에서 고급 맥주로 자리 잡으며 지금까지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다. 

스텔라 아르투아는 5% 알코올을 품은 깔끔한 황금색 라거다. 특별한 것은 없지만 호불호도 없다. 챌리스로 불리는 전용잔에 따른 스텔라 아르투아는 성배와 같다. 향미보다 멋이 더 중요하다. 

이 맥주는 편하게 마셔야 한다. 친한 친구들이 모인 자리라면 좋은 크리스마스 맥주가 될 수 있다. 주머니 사정도 눈치도 볼 필요 없다. 어울리는 안주로는 역시 치킨이다. 기름지고 짭짤한 한국 치킨에 깨끗한 라거만큼 어울리는 조합도 없다. 그래도 격식이 필요하다면 전용잔인 챌리스를 이용하자. 다른 어떤 잔보다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맥주잔이니.

코로나 팬데믹 이후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연인, 좋아하는 친구와 오랜만에 보내는 크리스마스에 맥주가 좋은 길동무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야말로 크리스마스에 맥주가 필요한 이유다.

만약 조금의 여유가 있다면 크리스마스에 소외된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보는 건 어떨까? 부족하나마 작은 희망을 나눌 수 있다면 지금도 누군가의 꿈에 나타나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을 크리스마스 유령들도 조금 쉴 수 있을 테니.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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