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결정적 장면㊿] JK 심벌과 영화 ‘영웅’…기차는 달린다, 종착역은 ‘오늘, 우리’

홍종선 2022. 12. 23.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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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스터 ⓒ이하 CJ ENM 제공

영화 ‘영웅’을 시작하기 전에 배급사 CJ ENM에 이어 제작사 ㈜JK필름의 심벌 영상을 볼 수 있다. 기차다. 달리는 기차다. 힘차게 달리다 제작사 로고 글자 옆에 나란히 멈춰 선다.


‘영웅’은 JK필름의 수장, 윤제균 감독이 연출한 영화다. 대표의 이름(JK)에서 제작사 이름을 가져온 영화사가 만든 영화답게, 영웅은 제작사 심벌 그대로 ‘기차’를 닮았다.


많은 영화가 결말을 향해 달려가지만, 특히나 ‘영웅’은 종착역을 향해 달려간다. 종착역에 다다르기 전까지 미리 재단하거나 미리 실망하지 말고, 평가는 잠시 미뤄두고 JK필름이 보여주는 풍경에 무념무상 눈을 두고 귀를 열어 놓고 있다 보면 예측 이상의 풍광과 이야기가 마음을 울리는 압권의 파노라마를 맛볼 수 있다.


영화 중반까지는 활기차게, 때로 코믹하게 칙칙폭폭 달린다 ⓒ

기자의 실수담에 근거한 관람 팁이다. 고백하자면, 130억 원 넘는 제작비가 들어갔다고 하니, 제한된 공간의 뮤지컬을 무한한 공간의 영화로 옮겨왔다고 하니, 액션 활극일 줄 알았다. 도마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을 향해 겨누는 총구를 향해 영화가 달려갈 줄 알았다. 저들이 우리 황후의 심장을 꺼내 우리의 민족혼의 근간부터 유린한 만큼, 그렇게 일제의 심장을 관통해 주기를 바랐다.


영화 ‘영웅’은 복수가 복수를 낳는 사적 복수의 혈투극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에 확인되고 영화에서 볼 수 있듯 안중근의 정신과도 어긋난다. 영화의 정점은 안중근 의사가 거사에 성공하고 체포돼 감옥에 갇힌 뒤부터 시작된다. 판사도 검사도 방청객은 물론이고 안중근의 변호사마저 일본인인 법정에서 시작된다.


영화는 안중근 의사의 거사 후,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

안중근의 거사가 지니는 의미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싶은 일본 제국주의의 계책, 뭣 모르고 어쩌다 죽인 것으로 하라며 형벌 감량을 회유하는 일제의 법에 속아 넘어가지 않고 거부한다. 그리고 당당히 일제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가 저지른 죄 15가지를 공언한다.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우리의 땅과 바다를 빼앗고, 우리가 똑똑해질까 봐 교육과 유학의 기회를 빼앗고, 조선을 발판으로 러시아의 묵인 아래 중국을 손아귀에 넣고 아시아 전체를 일본으로 통일하려는 야욕으로 동양의 평화를 깨뜨리고 동양인들의 삶을 사지로 몰아넣은 죄, 일본의 지배를 우리가 스스로 원한 것이라고 세계만방에 거짓으로 선전한 죄… 글로만 보아 오던 그 죄목들이 어떻게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지 전율의 그 순간을 꼭 확인할 만하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영화는 카메라를 좁혀 ‘사람 안중근’으로 집중하는데, 이 장면들에서 참고 참아도 참기 어려운 뜨거운 눈물이 솟는다. 가정을 돌보지 않는 남편으로 취급하던 안중근 아내의 일어섬을 통해 외쳐지는 ‘누가 죄인인가’, “일제의 법정에서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시는 어머니의 올곧은 가르침과 아들의 마지막 가는 길에 입힐 한복을 지으시는 눈물에 젖은 바느질이 가슴을 치고 뼈를 시리게 한다.


영화를 보면, 이 프레임이 가로 세로로 무한히 확장된 군중-민초들의 합창을 볼 수 있다 ⓒ

윤제균 감독은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감동, 전율을 후반 33%에 배치했다. 중반까지는 전쟁과 액션, 로맨스와 코믹을 적절히 배합해 시동을 걸고 레일에 기름칠한다. 의도적 연출이다. 전반을 보고 이 영화를 평하기엔 때가 이르다.


윤제균 감독의 의도적 연출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포인트는 군중 샷, 민초들의 합창이다. 대한의 독립을 위한 혈투가 몇몇 독립군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안중근 의사의 거사가 몇몇 의사와 지사들의 합작품이 아님을 천명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강철군화 아래 짓밟혔던 모든 백성이 그 필요성을 일깨우고, 음으로 양으로 마음으로 응원하고 지지했던 모든 이가 실질적으로 함께 이뤄낸 ‘역사’였음을 영화적으로 선명히 보여준다.


영화 마지막에선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가 지은 눈처럼 하얀 한복과 도포를 입고 노래한다 ⓒ

또 하나, 개인적 의견으로 보태자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눈 부릅뜨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거나, 안중근의 생전 바람대로 ‘동양평화만세’ 삼창을 하지 않고. 역사에 길이 남는 위인도 절명 앞에서는 얼마나 심약한 한 명의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특출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독립운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끝내, 두려움을 누르고 마지막 노래를 부른다. 이루고 싶었던 꿈을 얘기한다. 그 순간 안중근의 꿈은 머나먼 역사 속 인물의 담론이 아니라 2023년을 목전에 둔 평범한 우리가 새해를,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게 하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김고은의 재발견 ⓒ

이제까지 배우 얘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정성화는 정말 대한독립군 참모 중장 안중근 같고, 김고은은 황후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어서 ‘마타하리’가 된 있었을 법한 설희 같고, 배정남 같은 명사수 조도순은 있어야 든든하고 조재윤표 우덕순처럼 겁 많고 장난기 있는 인물도 독립군에 있어야 사람 사는 세상이고, 어떠한 험난한 시대에도 박진주와 이현우가 표현했듯 풋풋한 마진주와 유동하의 사랑은 피어나야 한다.


배우들은 자신을 뽐내고 드러내기보다 역사의 현장 그곳에 있다. 그러함에도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배우들의 노래다. 배우 정성화야 14년을 원작 뮤지컬 ‘영웅’에서 안중근으로 살며 그 가창력이 익히 알려진 터이고, 그 명성 그대로 안중근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연기를 보여줬다. 그런데 배우 김고은이 이토록 빼어난 가창력의 소유자인지 놀라울 정도로 장면을 압도한다.


관객평 "미안합니다, 잊고 지내서. 감사합니다, 지켜주셔서. 추천합니다, 올해 꼭 봐야 할 영화 "ⓒ

노래 실력이 뮤지컬영화 배우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는 이들이 있으니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 역의 나문희와 아내 김아려 역의 장영남이다. 장영남은 절규가 노래가 되는 배우가 부르는 노래의 전형을 보여준다. 배우 나문희는 노래와 연기의 경계를 허물며, 진한 감정과 진솔한 표현이 관객을 울리는 치트키임을 확인시킨다. 역사의 중요성은 거시적 관점의 사회구성체와 더불어 미시적 관점의 한 개인에게서도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나문희의 내공이 일러준다.


개봉 2일 차 오후 5시 55분, 예매하다 놀랐다. ‘아바타: 물의 길’에 비해 영화관 수가 현저히 적다. 영화 시작 전 극장 안은 썰렁했다, ‘영웅’ 호가 달리면서 저마다 ‘마음의 온도’가 올라간다. 뜨겁게 달궈진 ‘영웅’ 상영관, 혹한의 겨울을 녹이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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