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남의 토지에 무단으로 건물 신축해도 손괴죄 불성립"
토지 자체의 효용 침해 없어
[아시아경제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다른 사람이 소유한 토지에 무단으로 건물을 신축했더라도 형법상 재물손괴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토지를 본래의 용법에 따라 사용·수익하는 행위는 토지 소유자로 하여금 토지의 효용을 누리지 못하게 이용을 방해한 행위일 뿐, 토지 자체의 객관적 가치나 효용을 저하시킨 것이 아니어서 '손괴 또는 은닉 기타 방법으로 재물의 효용을 해한' 경우 성립하는 손괴죄의 구성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취지다.
대법원 1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재물손괴 혐의로 기소된 A씨(59)의 상고심에서 검사의 상고를 기각하고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23일 밝혔다.
A씨는 2020년 4월 초순경 B씨를 비롯한 26명(등기부상 29명)이 공유하고 있는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토지에 무단으로 건물을 신축해 토지를 손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A씨는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나 사용 권한이 없었고, A씨의 사실혼 배우자 C씨가 54분의 2 지분을 가진 공유자였다. 총 2343㎡(약 709평)의 전체 토지 중 A씨가 건물을 신축한 면적은 약 43㎡(약 13평)였다.
A씨는 애초 자신이 해당 토지 위에 갖고 있던 건물이 C씨를 제외한 나머지 공유자들이 낸 건물 철거 및 토지 인도 소송에서 패소한 뒤 강제 철거되자, 다시 건물을 신축한 것이었다.
검사는 A씨가 토지 공유자들의 토지 이용을 방해할 목적으로 건물을 신축했다고 보고 손괴 혐의로 기소했다.
1심은 A씨의 손괴 혐의 유죄를 인정,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에서 A씨는 자신의 부인이 토지에 대한 공유지분을 보유하고 있고, 그 지분 비율에 따른 면적 범위 내에서 건물을 신축한 것이기 때문에 재물손괴의 고의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토지 공유자는 각자의 지분 비율에 따라 전체 토지를 사용·수익할 수 있을 뿐 공유자 지분 과반수가 동의하지 않는 한 공유자 1인이 토지의 특정부분을 배타적으로 점유하거나 사용할 수 없는 점 ▲나머지 공유자들이 낸 건물 철거 및 토지 인도 소송에서 패소한 만큼 A씨의 토지 사용에 피해자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다시 새로운 건물을 신축한 점 ▲A씨의 건물 신축으로 나머지 공유자들은 건물이 철거될 때까지 해당 토지 부분을 이용할 수 없게 된 점 등을 근거로 들며 "피고인의 건물 신축은 이 사건 토지의 효용을 해하는 행위에 해당하고, 피고인에게 재물손괴의 고의도 있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2심에서 결과가 뒤집혔다. 2심 재판부는 1심 판결을 파기하고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A씨는 1심 재판부가 선고한 징역 8월의 형이 너무 무겁다며 '양형부당'을 이유로 항소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A씨가 주장한 항소이유 판단에 앞서 직권으로 재물손괴죄 성립 여부를 다시 판단했다.
재판부는 "항소법원은 판결에 영향을 미친 사유에 관하여는 항소이유서에 포함되지 아니한 경우에도 형사소송법 제364조 2항에 따라 직권으로 심판할 수 있으므로, 피고인이 양형부당을 이유로 항소한 경우에도 피고인에게 유리한 사유가 있다면 심판할 수 있다"고 밝혔다.
먼저 재판부는 재물손괴죄의 구성요건에 대한 대법원 판례를 인용했다.
앞서 대법원은 "형법의 명확성 원칙에 비춰 형법 제366조 손괴죄의 '기타 방법'이라는 구성요건을 확대해 해석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며 "따라서 '기타 방법'이란 모든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손괴 또는 은닉에 의해 재물의 효용을 해하는 것과 동일한 불법평가가 가능한 정도의 방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또 대법원은 "한편 손괴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물건을 망가뜨린다는 것인바, 형법 제366조의 '손괴'는 재물에 직접적인 유형력을 행사해 재물의 본질적인 부분을 파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입장이다.
이번 사건과 관련 재판부는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피고인이 이 사건 토지 일부분에 건물을 신축한 행위가 손괴 또는 은닉 기타 방법으로 이 사건 토지의 효용을 해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그 근거로 재판부는 ▲A씨가 토지 자체에 유형력을 행사하지는 않은 점(가령 물 넘김, 쓰레기 매립 등이 토지 자체에 대한 유형력 행사의 예) ▲건물 신축공사 과정에서 토지가 손괴됐다거나 형상이 변경됐다는 점에 관한 증거가 없는 점 ▲검사는 이 사건 토지 '전체'가 손괴됐음을 전제로 공소를 제기했지만 A씨의 주장에 따르면 13평에 불과한 건물 부지에 건물을 신축한 행위로 토지 전체의 효용이 침해됐다고 평가할 수 없는 점 ▲건물 신축 이후 토지의 매매에 법률상 장애가 생긴 것도 아니고, 토지 전체를 이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도 아닌 점 등을 들었다.
또 재판부는 "이 사건 토지의 지목은 답(畓. 논)이므로 지목의 본지(本旨)에 따라 '효용을 해하는 행위'를 해석하면 토지에 유형력을 행사해 벼 등의 재배를 어렵게 하는 행위일 것인데, 피고인의 행위로 이 사건 토지 전체에 그러한 상황이 초래됐다고 볼 수도 없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재판부는 "공유토지에 관해 소수지분권자가 특정 부분을 배타적으로 점유·사용했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이를 형법상 손괴로 보지는 않는다"며 "피고인이 소송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이를 무용화하기 위한 행위를 했다는 동기(動機)는 구성요건을 적용하면서 고려할 부분이 아니고, 피고인은 본인이 한 행위에 대해 민사적인 책임을 지면 된다"고 덧붙였다.
대법원은 이 같은 2심의 판결 이유 중에는 일부 부적절한 내용이 포함돼 있지만, A씨에게 손괴죄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결론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본래의 용법에 따라 무단으로 사용·수익하는 행위는 소유자를 배제한 채 물건의 이용가치를 영득하는 것이고, 그 때문에 소유자가 물건의 효용을 누리지 못하게 됐더라도 효용 자체가 침해된 것이 아니므로 재물손괴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리고 재판부는 "피고인이 타인 소유 토지에 권원 없이 건물을 신축함으로써 그 토지의 효용을 해쳤다는 이 사건 공소사실에 대해 원심은 무죄로 판단했다"며 "원심판결 이유에는 적절하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피고인의 행위는 이미 대지화된 토지에 건물을 새로 지어 부지로 사용·수익함으로써 그 소유자로 하여금 효용을 누리지 못하게 한 것일 뿐 토지의 효용을 해하지 않았으므로, 재물손괴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결론은 정당하다"고 결론 내렸다.
대법원 관계자는 "재물손괴죄의 구성요건인 재물의 효용 침해의 의미를 명확히 하고, 토지의 객관적 가치나 효용을 저하시킨 것이 아닌 토지 소유자에 대한 이용방해 행위는 재물손괴죄의 구성요건을 충족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선언한 최초의 사례"라고 밝혔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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