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정리의 밤

2022. 12. 23.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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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


퇴근길에 50ℓ짜리 쓰레기봉투를 샀다. 평소엔 10ℓ짜리를 사용하지만 오늘은 뭐든 50ℓ만큼 버릴 작정이었다. 야밤에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들고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집안을 휘젓는 게 12월 들어 두 번째다. 분명 작년 12월에도 좀 치운 것 같은데 나의 작은 공간은 다시 혼란스럽다. 정리된 삶을 살겠다는 결심은 성공한 적이 없기 때문에 연말이면 어김없이 다시 정리에 대해 생각한다.

미니멀리스트를 꿈꾸는 건 아니다. 몇 번쯤 무모한 도전을 했지만 근처에도 못 가봤다. 나는 여전히 예뻐서, 궁금해서, 혹시 몰라서, 할인기간이라, 기념하기 위해, 물건을 들인다. 미술 작품을 파는 사람으로서 기분이나 소울을 위한 소비에 죄책감을 갖고 싶지 않다. 물건의 가치는 쓸모로만 정해지지 않는다. 타협안은 ‘과하지 않게’ 정도가 아닐까. 과하지 않은 소비를 위해서라도 정리는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비슷한 옷을 또 사거나 같은 책을 다시 주문하고 자괴감에 빠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물건에도 제자리를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있어야 할 자리에 가지런히 놓여 있으면 더 번듯해 보이고 쓰임새도 확장된다. 내가 가진 것들이 쉽게 파악되고 집도 지저분할 일이 없다. 나는 정리 대상을 책, 옷, 신발, 기타 범주로 나눴다. 우선 지금 가지고 있는 책장, 옷장, 신발장 밖으로 책과 옷과 신발이 흘러넘치지 않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려면 가짓수를 줄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타에 속하는 물건들은 주로 시선이 닿는 곳에서 미화를 담당한다. 그림이나 스탠드, 여행 가서 사온 인형 같은 것들이다. 다들 알겠지만 여기엔 항상 먼지가 쌓여 있다. 이것들도 관리할 수 있는 정도로만 가져야겠다.

K는 ‘매일 세 개씩 내보내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버리기도 하고 팔거나 나눔을 하기도 한다. 아까운 거라도 작은 거라도 무조건 세 개씩, 시간이 없어도 무조건 세 개씩. 새로 바꾼 휴대폰이 들어 있던 상자나 유통기한이 지난 향수, 낡은 수건을 버린다. 당근마켓에 잘 쓰지 않는 가구나 가전을 팔기도 하고, 사이즈가 작아진 옷이나 자주 들지 않는 가방을 친구들에게 주기도 한다. 세 개씩 내보내는 일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오늘은 뭘 떠나보내나 고민하다 보면 물건을 사는 일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지비이 이쿠코는 ‘옷을 사려면 우선 버려라’고 했다. 내가 몇 년째 연말 정리 시즌에 들춰보는 책이다. ‘사려면’에 주목해야 한다. 새 옷을 사고 나서 헌 옷을 버리는 게 아니다. 우선 버리고, 다른 것을 사야 한다. 옷을 사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계속 옷을 사고 옷장이 넘치는데도 입을 게 없는 악순환에서 벗어나 입을 만한 옷들만 알맞게 걸려 있는 옷장으로 업데이트하라는 것이다. 책은 쉽고 공감할 수 있게 쓰여 있지만 책에서 일러주는 대로 실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옷에 대한 취향과 기준이 명확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신박한 정리’라는 케이블TV 예능프로그램이 있었다. 거기 등장하는 사람들은 나처럼 정리에 소질이 없다. 물건을 어디에 둘지 모른다. 기준 없이 여기저기 쌓아두다가 공간을 점령당하고 혼자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전문가 도움으로 정리가 단행되면 새로운 집에 온 것 같다, 공간이 넓어졌다,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며 다들 감격한다. 하지만 계속 정리된 상태로 지낼 수 있는가는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려 있다. 나는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연말 시즌만이 아니라, 매일 정리된 상태로 지내고 싶다.

집안의 물건만이 아니다. 내 컴퓨터 안의 파일들, 회사 사무실 창고의 물건들도 겹치고 쌓여서 어깨를 펴지 못한다. 정작 중요한 것들이 묻혀서 보이지 않거나 손상되고 있는 줄도 모른다. 필요한 것을 찾을 때마다 시간을 낭비하며 마음을 졸여야 한다. 그래서 오늘도 50ℓ 쓰레기봉투를 들고 분투한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넘치는 건 ‘짐’일 뿐이다.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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