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의 시시각각] 여당 경선룰 유감
기존 경선룰엔 근원적 딜레마 있어
이는 외면하고 특정인 배제 의도만
“‘국왕 살해’로 관리되는 절대군주제(an absolute monarchy, moderated by regicide).” 영국 보수당의 원로인 윌리엄 헤이그가 자신의 당을 두고 한 말이다. 당수가 전권을 휘두르지만 잘못하면 처참하게 내몰린다는 얘기다. 철의 여인으로 불렸던 마거릿 대처의 마지막을 떠올리면 될 듯하다. 덜 알려진 부분은 2010년 헤이그가 이 말을 할 때 연정 협상 파트너인 자민당 정치인이 보인 반응이다. “우린 절대민주제다. 거의 관리되지 않지만.”
올 들어 보리스 존슨에서 리즈 트러스, 리시 수낙으로 숨가쁠 정도로 당수(총리)직이 넘어가는 과정을 보면 보수당도 ‘절대민주제’처럼 보이긴 했다. 이젠 안정을 찾았지만 말이다.
경제통인 수낙으로의 귀결은 당연해 보이나 당연하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경선 룰의 마법이 있었다. 보수당 당수는 원래 의원들이 뽑았지만 정당 민주화 요구에 1998년부터 의원들이 최종 2인을 뽑고 당원들이 그중 한 명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수낙은 당원들에게 매력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억만장자 아내를 둔 초엘리트에다 비(非)백인이다. 실제 7월 경선 의원 투표에서 1위(38.6%)를 했으나 당원 투표에서 졌다. 10월 경선에선 당원들에겐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경선 룰을 정하는 ‘1922위원회'(평의원 모임)에서 문턱을 확 높여서다. 7월엔 의원 20명만 지지하면 후보 등록이 가능했는데 10월엔 그 숫자를 100명으로 늘렸다. 그 정도 확보가 가능했던 존슨 전 총리는 동료들이 주저앉혔다. 수낙의 단독 입후보였다.
비민주적인가. 일견 그래 보일 수도 있다. 지금의 상황을 보면 달리 답할 수밖에 없다. 더 나은 통치체제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더 민주적일 수 있다. “이젠 통치(govern)할 만하다”고 말하는 보수당 의원도 있다.
이런 연유로 도발적으로 들리겠지만, 정당 민주화가 절대선(善)이 아니란 주장도 있다. 『책임정당 : 민주주의로부터 민주주의 구하기』의 저자들은 “새로 동원된 당원과 열성 당원이 당 의원들의 입장을 대표하지 않을 경우 그 원내 정당 내부에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 겉보기엔 민주주의가 증진되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걸 위해 비싼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썼다.
국민의힘 당 대표 경선 룰을 바꾼 것을 두고 논란이다. 사실 기존의 경선 방식엔 몇 가지 딜레마가 내재한다. 2000년대 정당 민주화 이후 우린 당 대표 선출을 당원들에게 맡겼지만 당원들의 선택을 신뢰하진 않았다. ‘민심’을 반영해야 한다며 여론조사를 가미하기 시작한 배경이다. 이는 또 다른 딜레마를 낳았는데, 확률인 여론조사가 투표처럼 활용되게 됐다는 점이다. 김영원 숙명여대 교수는 “A, B 후보자의 여론조사 지지율 차이가 작은 경우 지지율에서 두 후보는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통계학적 해석이 허용돼야 하는데 정치권에서는 이런 해석이 통하지 않는다”고 개탄했다.
의원(위원장)들의 판단이 개입할 통로도 문제가 된다. 그간 의원들이 당원들에게 주문하는 방식으로 우회했다. 100만 명 가까운 책임당원 시대가 되면 이게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국민의힘 당직자는 “이번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전혀 모르겠다”고 했다. 의원 발언권을 최소화한 영국 노동당은 10여 년간 필패의 당수를 뽑았었다.
여당의 경우 또 다른 딜레마가 있다. 대통령과 당 대표의 어정쩡한 역학관계다. 둘 다 국민 또는 당원·국민(수천 명의 여론조사)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았다. 누가 우선권을 가져야 하나. 그동안 대통령 말을 잘 듣는 이를 당 대표로 선출하는 것으로 해결해 왔다. 그러다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이가 당선되면 여권 전체가 갈등에 빠져들곤 했다. 당 대표가 없는 미국 대통령제는 겪지 않는 혼란이다.
국민의힘이 경선 룰을 바꿨으나 “특정 후보를 배제하겠다”는 의도만 두드러질 뿐 고민이 안 담겼다. 유감이다.
고정애 Chief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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