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세밑, 이태원 풍경
한 해가 끝을 향해 달려간다. 반짝 풀렸던 날씨는 다시 에일 듯 날카로워졌다.
22일 낮,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1번 출구로 올라오니 코끝이 시큰했다. 매운 날씨 탓인지, 계단 벽에 촘촘히 붙은 메모 속 안타까운 사연들 때문인지 헷갈렸다.
20m 떨어진 해밀톤 호텔 옆 작은 골목길은 아직 썰렁했다. 행인들은 158명이 영문도 모른 채 세상을 등진 현장을 피했다. 입구를 지키는 젊은 의경은 무표정했다. 3년 만에 마스크 없이 맞는 핼러윈 데이에 인파가 폭주할 것이란 예측에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경찰이 골목 진입을 조금만 막았더라면, 112 구조 전화에 조금만 더 성의있게 대응했다면, 그 시간 지하철이 이태원역을 무정차 통과했더라면… 짧은 순간에 부질없는 가정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좁은 골목 한쪽 벽은 사진과 쪽지, 마른 국화와 음료수병으로 빼곡했다. 이태원역쪽에 만들어진 공식 추모공간은 참사 52일만인 지난 21일 치워졌다. 15만명이 찾아와 2만5000 송이 국화와 1만여 개의 추모글, 2000여개의 추모품을 놓고 갔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골목벽에 붙은 추모품은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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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사 두달, 책임도 사과도 요원
유족 분향소 앞 보수단체 막말
갈등만 증폭되는 세밑 이태원
」
이태원역과 다음 역인 녹사평까지는 500m도 안되는 짧은 거리다. 녹사평역 조금 못미쳐 이태원 입구를 알리는 파란 아치 한쪽 끝에 지난 14일 시민분향소가 섰다. 천막을 잇대 하늘만 가린 공간에 유족이 동의한 76개의 영정이 놓였다. 그 속에 담긴 얼굴은 하나같이 밝고 젊어 처연함을 더한다. 참사가 없었다면 지금쯤 성탄을 앞두고 마음 설레고 있을 나이 아닌가.
분향소는 불교 제사의식인 49재를 이틀 앞두고 마련됐다. 죽은 영혼이 이 기간을 지나며 다음 생에 받을 인연이 정해진다 하여 7일마다 지내는 제례의 마지막 순서다. 종교를 떠나 이 정도 시간이 지나면 남은 이들은 고인에 대한 기억을 가슴에 묻고 일상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분향소 주변 풍경은 아직 그럴 준비가 안됐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일깨운다. 분향소 10m 앞엔 보수단체의 트럭과 텐트가 자리하고 있다. 그 옆에 설치된 현수막엔 ‘지난해 사망 31만여명, 고독사 3378명, 교통사고 사망자 2916명’이란 수치와 ‘이런 사망도 국가가 책임지고 대통령이 사과해야 하느냐’는 문구가 커다랗게 적혀있다. 확성기가 없어도 대화 소리가 들리는 사실상의 한 공간에서, 유족들은 마주한 사람들로부터 매일 ‘2차 가해’를 당한다고 하소연한다.
당초 유족들의 요구는 진심어린 사과와 책임자 문책·처벌 정도였다. 대통령과 정부는 수사로 명백한 책임을 가리는 게 먼저라며 상징적인 인사 조치 요구도 뒤로 미뤘다. 그런데 경찰에 맡겨진 셀프 수사는 50일 넘도록 공전하고 있다. 그날 현장 책임자인 이임재 전 용산서장에 대한 구속영장마저도 기각됐고, 최근 영장이 재청구된 상태다. 그 윗선에 대한 수사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렇게 죽도 밥도 안되는 상황이 계속되자 결국 유족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민변이 도왔고, 시민단체가 합류했다. 이를 빌미로 여권에선 막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도의원, 당 비상대책위원, 심지어 윤핵관 원톱이라 자부하는 권성동 의원까지 나서 ‘자식 팔아 장사’ ‘참사 영업’ ‘시민단체의 횡령 수단’ 같은 험한 말들을 쏟아냈다. 분향소 앞 살풍경엔 이런 사정이 얽혀있다.
책임을 가릴 또하나의 방편인 국정조사는 시한의 절반을 날렸다. 굳이 이 시점에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해임안을 통과시킨 야당의 헛발질 탓이 크다. 여당은 곧장 국조 보이콧을 선언했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다. 논란 끝에 여당이 복귀했는데, 이번엔 야당 국조특위 위원이 참사 당일 본인이 근무했던 병원의 구급차를 타고 현장에 온 행적이 드러났다. ‘징계해야 한다’ ‘그럴 자격이나 있냐’는 날 선 공방 속에 진실규명 의지는 사라진 듯하다.
한덕수 국무총리도 인상적인 풍경 하나를 보탰다. 그는 참사 직후 외신 기자회견에서 뜬금없는 농담으로 비난을 자초했다. 그게 마음에 걸렸는지 21일 예고 없이 분향소를 찾았다. 그런데 유족들이 정부의 제대로 된 정부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자, 조문도 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 따라오는 취재진에게서 벗어나려고 빨간 신호등에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 장면이 카메라에 잡혀 고발당했다. 휘적휘적 길을 건너는 그의 뒷모습이 웃프다. 사과도 할 수 없고, 책임규명은 잘 안 되고, 갈등은 증폭되는 세밑 이태원의 스산한 풍경을 고스란히 담았다.
최현철 사회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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