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기업은 ‘조용한 해고’ 중

이동현 2022. 12. 23.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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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해고의 공포


대기업 A사 인사팀 간부 김모씨는 요즘 고민이 많다. 팀원들이 업무에 어려움을 호소해서다. 이 회사는 최근 비공식적으로 희망퇴직을 받고 있다. ‘희망자에 한(限)한다’지만 저성과자나 고연차 직원을 대상으로 한 회유에 가깝다. 조직 슬림화와 직무 재배치도 진행해 결국 자리를 줄여야 한다. 그래서 퇴직 의사를 묻거나 자리 축소를 통보해야 하는 인사팀 직원들은 “해당 부서와 당사자의 격한 반응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길 지경”이라고 호소한다.

기업들이 인원을 줄이는 건 코앞에 닥친 경기 침체와 실적 악화 우려에서다. 김씨는 “새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외적으로 채용 축소나 구조조정을 이야기하기 힘든 것 같다. 과거의 인적 구조조정이 ‘공식적’이었다면, 지금은 물밑에서 ‘조용한 해고’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경기 침체가 장기화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면서 국내 고용시장에 ‘조용한 해고’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공식적인 구조조정이나 명예퇴직 대신 간접적인 방식으로 인력을 줄이고, 비용을 절감하는 것을 말한다.

최근 화제가 됐던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이 ‘주어진 최소한의 일만 하며 건강한 삶을 우선한다’는 의미라면 ‘조용한 해고’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자리의 단절을 의미한다. ‘L(layoff·해고)의 공포’가 새로운 얼굴로 습격한 셈이다. 이지만 연세대 경영대학장은 “임금 체계를 합리적으로 개편·조정하지 못한 탓에 경기 불확실성을 우려하는 기업이 ‘조용한 해고’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해고하기 힘든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정부 등 외부 시선에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도 조용한 해고를 부추기고 있다”고 덧붙였다.


롯데면세점·OB맥주 등 희망퇴직 진행…5대 은행, 올해 2400명 회사 떠날 듯

미국에선 테크기업에 다니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조용한 사직’ 열풍이 일고 있지만 고용시장은 안정적이다.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달 실업률은 3.7%로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다. 코로나19 회복에 따라 노동력 수요가 상승하고 있어서다. 반면에 한국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조용한 해고’라는 고용 삭풍이 불어닥쳤다. 이는 중소·중견 협력기업의 폐업이나 구조조정 같은 ‘태풍급 일자리 한파’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고용시장이 직격탄을 맞을 우려가 크다.

B바이오 기업은 지난달 직원 설명회를 열고 근태와 성과 등을 따져 인력을 재배치하겠다고 공지했다. 조만간 휴게공간과 카페 등에 사원증을 대야 출입할 수 있는 ‘게이트’를 설치할 예정이다. 근무시간을 엄격하게 관리하겠다는 경영층의 지침에서다. 진행 중이던 채용도 필수직을 제외하곤 ‘올스톱’했다.

또 다른 대기업 C사도 최근 비공식 희망퇴직을 받고 있다. C사 관계자는 “새 정부 출범 이후 채용 규모를 발표했기 때문에 신규 채용은 손대지 않지만 전체 인력은 줄인다는 방침”이라며 “내부적으론 성과가 높지 않은 직원이나 창업·이직 의사가 있는 직원의 희망퇴직을 유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실적이 크게 악화했거나 악화를 예상하는 기업들은 공식적으로 감원 절차에 들어갔다. 롯데면세점이 창사 이후 첫 희망퇴직 신청을 받고 있고, 롯데하이마트도 사정은 비슷했다. 하이트진로, OB맥주 등도 희망퇴직을 진행했다. 희망퇴직이 ‘상시화’한 금융권도 마찬가지다. 하이투자증권·다올투자증권 등 증권사와 우리은행·NH농협은행 등도 희망퇴직을 받았다. 올해 5대 시중은행에서만 2400여 명이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떠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신규 채용의 문도 좁아지고 있다. 대기업들은 지난 5월 윤석열 정부 출범에 맞춰 고용 확대를 약속했다. 삼성(8만 명), SK(5만 명), 현대차(3만 명) 등 10대 그룹이 약속한 신규 채용 규모만 38만 명이 넘는다. 실제로 올해 채용은 예년에 비해 크게 늘었다. 하지만 경기 하락과 실적 악화로 내년에도 같은 규모를 유지하긴 어려울 전망이다.

문제는 어느 대기업도 “내년 신규 채용을 줄이겠다”고 말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재계 관계자는 “내년 상반기 경기가 더 악화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기업은 비용을 줄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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