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CD가 사라진 파주 엘씨디로…“기존 인력 그냥 둘지 불안”

이동현, 고석현, 이희권 2022. 12. 23.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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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위기 산업1번지 가보니


지난 20일 인천 남동인더스파크의 한 공장 앞에 매매를 희망하는 현수막이 붙어있다. 고석현 기자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LG디스플레이 파주공장의 남쪽 도로명 주소는 ‘엘씨디로(LCD路)’다. 세계 1위 액정표시장치(LCD) 산업의 전초기지라는 자부심이 담겨 있다. 협력업체를 합쳐 근무 인력이 1만8000명에 달한다.

하지만 지난 20일 오후 엘씨디로 주변 식당가와 원룸촌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이 회사는 수요 급감과 중국산 제품의 공세에 이달 안에 파주공장의 7세대 TV용 LCD 패널 생산을 중단한다. 최근 2·3분기에 누적 1조2000억원대 영업적자를 내면서 생산직 사원의 자율 휴직을 검토하고, 일부 직원의 계열사 전환 배치도 진행 중이다.

교대·퇴근 시간임에도 대부분 직원은 곧바로 통근 버스에 몸을 싣거나 기숙사로 향했다. 인근 식당가 곳곳에는 ‘임대’ 팻말이 붙었다. 월롱면 덕은리에서 만난 한 식당 주인은 “최근에 가게를 내놨다. 장사를 접을 생각”이라고 했다. 인근 건물주 오모씨는 “디스플레이 호황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공실이 세 배다. 몇 해 전부터 연말 보너스가 사라지면서 노래방·호프집은 다 망해서 떠났다”고 말했다.

덕은리 초입의 한 4층짜리 건물은 현재 영업 중인 가게가 7곳에 불과하다. 디스플레이 산업이 호황을 누리던 10년 전엔 같은 건물에 고급 한우집을 포함해 일식집·호프집 등 20여 곳이 들어서 성업이었다. 이제는 편의점과 국밥집, 식대 7000원 안팎의 식당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식당 인근에서 만난 협력업체 직원은 “현재 진행 중인 공사가 끝나면 사람을 더 쓰지 않을 것 같아 불안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근 유리 가공업체들은 LCD 수요가 끊기면서 ‘개점휴업’에 들어갔다. 업체 관계자는 “LCD가 빠진 자리에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설비가 들어온다지만 기존 인력을 그대로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LG디스플레이는 ‘기술력과 사업구조 개편으로 불황을 돌파한다’는 전략을 내놨다. 정호영 사장도 최근 타운홀 미팅에서 “인위적인 구조조정이나 희망퇴직은 없다”고 선언했다.

대기업 일감 줄어든 협력업체 더 타격

21일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LG디스플레이 파주공장 인근의 빈 식당 모습. 이희권 기자

대기업의 ‘조용한 해고’가 확산하면 그 여파는 관련 산업 전반으로 확산한다. 대기업이야 사회적 시선이나 구성원의 동요를 의식해 ‘조용한 해고’를 진행한다지만, 중견·중소기업엔 ‘감원 태풍’이 될 수 있어서다. 고용 불안의 충격파가 아래로 갈수록 증폭된다는 점이 더 큰 문제다.

같은 날 오후 인천 남동구 논현고잔동 남동인더스파크(남동산업단지). 오후 6시쯤 해가 지자 골목 사이로 주차돼 있던 차량이 하나둘씩 빠져나갔다. 공장 불이 꺼지자 골목은 순식간에 암흑천지로 변했다.

이제는 그 흔한 ‘공장 매각’ 현수막마저 사라졌다. 부동산 관계자는 “문 닫은 공장은 건물이 은행에 담보로 잡힌 경우가 많아 건물주가 현수막을 걸 형편도 못 된다”고 했다. 권상철 남동경협 팀장은 “어차피 거래가 되지 않으니 현수막 비용 몇 만원도 아깝다고 생각한 듯하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부동산을 운영하는 정모 대표는 “불 꺼진 곳은 다 문 닫은 공장이라고 보면 된다. 금리가 너무 올라 여름부터 거래가 끊겼다”며 “대부분 은행 대출로 공장을 샀을 텐데, 상환 부담 때문에 싸게 팔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설자리 잃는 인력사무소 “폐업 고민”

곳곳에서 고용 유지는커녕 폐업을 고민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남동산단에서 22년째 자동차공조 부품을 생산해 온 A사 관계자에게 고용 사정을 묻자 “인력 충원은커녕 고장 난 설비 보수도 못 하는 형편”이라며 “일감이 적으면 보수도 작아 설령 사람을 구하려 해도 오지 않는다”고 고개를 저었다. 인력사무소를 운영하는 이모씨도 요즘 폐업을 고민 중이다. 이씨는 “업체들은 경영이 어려워 직원을 줄이려 하고, 구직자들도 잔업이 없어 급여가 적어지자 발길이 줄었다”고 전했다.

자동차부품 업체인 B사의 공장장은 “지난달 한국GM 부평2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타격이 크다”며 “완성차 업계가 전기차를 늘리는 추세인데 그러면 일감이 사라진다. 내년 초면 남동산단에 줄초상이 날 것 같다”고 말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경제 위기 때마다 희망퇴직을 경험했던 회사원들은 ‘조용한 해고’를 우려한다. 한 중소기업 직원은 “경영 환경이 나빠지면 희망퇴직이 없으리란 보장이 있겠느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국의 ‘조용한 사직’이 코로나19 회복기의 자발적 대퇴직(Great Resignation)에 이어 일자리에 대한 가치관이 변화한 것이라면, 한국의 ‘조용한 해고’는 기업의 해고 방식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용한 사직’이 일자리보다 자신의 삶에 더 비중을 두겠다는 능동적 변화라면, ‘조용한 해고’는 의지와 상관없이 실업에 직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영면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국은 노조가 있는 대기업은 해고가 어렵고 작은 기업은 너무 쉬운 ‘이중 노동시장’이 형성돼 있다”며 “대기업은 신규 고용을 회피하거나 퇴직을 유도하는 ‘조용한 해고’를 선택한다. 중소기업엔 더 큰 부작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어 정부의 긴급 지원, 사회안전망 확충 같은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동현 기자, 인천=고석현·파주=이희권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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