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집중] 공적개발원조로 같은 미래 꿈꾸는 한-아세안

2022. 12. 23.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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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민병주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지금까지 세계 경제를 움직여 온 최우선의 원칙을 꼽으라면 그것은 아마도 ‘효율성’일 것이다. 많은 나라는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무역과 국제 분업이라는 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발전해 왔다. 특히 어떻게 하면 더 빠르고 더 싸게 투입 대비 생산량을 늘릴 수 있을지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최적의 국가끼리 긴밀하게 연결되는 글로벌 공급망이라는 개념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압축적인 경제성장 역시 극도의 ‘효율성’을 추구한 결과다. 지난 1962년 울산공업단지 기공을 기점으로 하여 경공업에 발을 들인 우리나라는 겨우 반세기 만에 첨단기술 집약적 산업인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글로벌 시장 점유율 58%(21년 기준)를 차지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이처럼 급속도로 성장한 우리의 역사와 경험은 다른 개발도상국들이 항상 눈여겨보는 경제성장의 바이블과도 같다.

그렇지만 2022년의 우리 앞에는 성장과 효율성이라는 익숙한 키워드만으로 풀기 어려운 숙제들이 놓여 있다. 대표적인 것이 코로나19와 경제 봉쇄, 국지전, 에너지 가격 상승 등의 충격이다. 이로 인해 그동안 최선의 효율적인 선택지로 여겨지던 글로벌 공급망의 안정성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이뿐 아니라 한쪽에서는 경제와 사회 전체를 디지털 기술 기반으로 전환하는 노력이 진행 중이며, 탄소 배출을 억제하여 지구 온도 상승을 제한하자는 국제사회의 요구도 거세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은 이와 같은 다양한 글로벌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적개발원조(ODA)를 활용하여 아세안 국가들과 머리를 맞대고자 한다. 그 첫걸음이 바로 ‘한-아세안 국제개발협력 비전 공동연구’ 착수다. 상대국이 바라는 ODA 수요를 이행하는 것에서 나아가, 각 국 발전을 위해 어떤 ODA가 필요한지 머리를 맞대 연구하고, 공통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청사진을 그리는 작업이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ODA 사업은 수혜를 원하는 국가의 요구로 시작한다. 상대국의 요청을 받고, 내용이 타당한지 조사한 후 심의를 거쳐 건축 공사, 기자재 반입, 교육 훈련 등을 지원하게 된다. 수원국의 요구 사항을 이행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ODA 사업 추진 과정에서 국가 차원 혹은 권역 단위의 중장기적 발전 방향을 공유하거나 이를 달성하기 위해 사업 내용을 사전에 치밀하게 구상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각 국 상황에 대한 고려는 물론이고, 대외 정책까지 고려해 ODA 과제를 사전에 기획하고 제안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의 배경이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왜 아세안일까. 아세안은 우리나라 총 교역의 14%, 총 투자의 8.6%를 차지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대외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ODA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산업기술진흥원이 올해 진행한 산업·에너지ODA 프로젝트 사업비는 총 636억원인데, 그중에서 아세안 권역은 28.5%에 달한다. 내년에는 33%로 늘어난다.

국제개발협력 비전 공동연구는 우선 아세안 각국 이해 관계자들과 해당 국가의 산업 여건을 면밀하게 분석하는 것부터 시작할 예정이다. 이후 공급망 안정화, 디지털 전환 협력, 탄소중립 대응 등 한국의 주력 대외 정책과 부합하는 맞춤형 ODA 모델을 공동으로 모색하며, 결과물은 아세안이라는 기구를 통해 각국에 공유된다. 이른바 ‘현재 시점의 문제 해결형’ ODA에서 ‘미래 비전 공유형’ ODA로 옮겨가는 것이다.

지난 22일 서울에서는 ‘2022 산업·에너지ODA 네트워킹 데이’가 열렸다. 이 행사에서 산업통상자원부와 산업기술진흥원은 앞으로 ODA 사업의 효과를 키우기 위해 대외 전략과 연계한 맞춤형 중장기 과제를 제안할 것이며, 아세안을 시작으로 아프리카, 중남미 등 다른 권역으로도 확대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참석한 28개 개발도상국 대사관 관계자들도 비전 공동연구 활용 계획을 관심 있게 들으면서 지지와 기대를 보내주었다.

이미 여러 국가는 ODA를 대외 정책의 중요한 의제로 다루고 있다. 중국은 아시아, 유럽, 중동, 아프리카 144개국에 현대판 실크로드를 구축하겠다며 2013년 내놓은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지난해에만 71조원을 국제사회에 약속했다. 이는 우리나라 ODA 확정액(2021년) 기준으로 20년 넘게 들여야 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일본도 향후 3년간 아프리카에 투자 또는 융자 형태로 40조원 넘게 지원할 방침이다.

우리 정부 역시 전략적 가치가 높은 지역과 분야를 중심으로 ‘한국형 ODA’를 추진해서 오는 2027년까지 규모 기준으로 세계 10위권 ODA 국가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한국형 ODA는 중국이나 일본 같은 물량 공세가 결코 아니다. 우리 고유의 경험을 개도국에 접목해서 산업 발전과 글로벌 문제 해결에 실질적인 혜택을 주는 지원이어야 한다.

KIAT는 한국형 ODA를 위해 먼저 개별 국가의 상황을 세밀하게 살피고자 한다. 아세안 국가들의 어떤 자산들을 활용할 수 있는지 고민해 합을 맞추고, 조율하는 과정을 선행하는 것이다.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될 비전 공동연구가 아세안 국가들과 함께 불투명한 미래에 지혜롭게 대응할 수 있도록 돕는 나침반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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