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은...", 혐오가 쌓여 만들어낸 전쟁과 패망 [일본史람]
[박광홍 기자]
▲ 광둥 지역에서 진격하는 일본군(1938년) 일본군은 수도 난징을 비롯해 중국 동부의 주요지역들을 점령하였으나 중화민국 정부는 철저항전을 결의하고 저항을 이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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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구교 사건 이후 중국과 일본은 1년이 넘게 전면전쟁을 지속하고 있었고, 수도 난징을 비롯한 중국 동부의 주요 지역들은 일본군의 공세에 유린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중화민국 정부가 거듭 양보의 뜻을 타진했음에도 제국 일본은 '중화민국 정부를 말살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침략의 고삐를 더욱 죄었다. 중국 전선의 확대로 전쟁의 주체인 일본 육군의 위세는 더욱 가중됐던 까닭이었다.
중국에 지상군이 증파될 때마다 장군 보직은 늘어났고, 육군의 정치적 입지는 강화됐다. 육군 입장에서 중일전쟁은 그야말로 스스로의 승승장구를 보장해주는 '철밥통'이었던 셈이다(관련 기사: 일본이 풀어야 할 괴로운 '근본 질문').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 총리는 전쟁을 통해 나치 독일에서 봤던 국민적 열광을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고, 판매부수에 정신이 팔린 언론은 앞다퉈 강경론을 설파했다. 평화의 실마리는 나날이 멀어지고 있던 상황이었다(관련 기사: 전시 일본 언론, 어떻게 나라를 파멸로 이끌었나).
그러나 군부와 권신 세력 그리고 그들에게 빌붙어 기생하던 언론과 재벌이 전쟁을 통해 이익을 취하는 사이 일본군 사상자수는 누적됐고 총력전을 지탱하던 국민들의 생활 수준 역시 악화를 피할 수 없었다. 지친 일본군 부대들은 철저항전을 결의한 중화민국 정부를 무너뜨릴 수 없었다.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일본의 침략으로 중국에서의 이권과 소비시장을 위협받던 열강들이 일본에 가하는 압력은 더욱 가중됐다. 일본으로서도 출구를 모색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이미 '장제스 정부를 상대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던 고노에 내각은, 그 대안으로 '왕징웨이 추대 공작'을 생각해냈다. 즉, 왕징웨이가 수반이 된 새로운 중국과 교섭하여 화평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1938년 11월 3일, 고노에 총리는 '동아신질서 건설이야 말로 일본의 성전 목적'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항일용공정권'(장제스 정권)이 섬멸되기만 한다면 평화가 올 것이라는 신호를 줬다.
▲ 일본 괴뢰정부의 주석 왕징웨이 왕징웨이는 일본에 대한 항전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 대화를 통해 평화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혐중 감정에 경도된 일본 군부가 기존의 협의안을 무시하면서 그는 일본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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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징웨이는 중국이 결코 완력으로 일본을 이길 수 없으리라 판단했고, 오랜 전란으로 신음하는 중국을 구할 길은 오직 일본과의 대화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왕징웨이 측과 일본 측 실무진들은 11월 12일과 20일에 상하이에서 접촉해 구체적인 사안들을 협의했다.
일본 측이 '중국의 방공협정 가입' '만주국 승인'을 조건으로 내걸고 '일본은 중국에 배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 가운데, 왕징웨이 측은 한결같이 '중국에서 일본군이 철군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결과적으로 실무진들은 '일본군의 주둔지역을 정하되 그 외 지역에서는 평화회복 후 2년 이내에 철군한다'는 조건에 합의할 수 있었다. 이 약속을 믿은 왕징웨이는 '매국노'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1938년 12월 18일 충칭을 탈출해 일본에 합류했다.
고노에가 어떤 초안을 작성했는지는 지금까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육군 측이 은밀하게 압력을 가했고, 성격이 물러터진 고노에가 그 압력에 굴복했다는 게 실상에 가까울 것이다.
중국 대륙에서 싸우고 있는 일본 병사들의 사기를 꺾는다느니, 군사상의 작전은 통수권의 범위에 속하며 아무리 수상이라 해도 그것을 침범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느니 하면서 육군 참모들이 억지를 부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략) 그들(왕징웨이 추대 공작 관계자)의 저작이 공통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은 육군 중앙부에 도사리고 있던 '중국을 멸시하는' 사고방식이었다. 마쓰모토의 저서에는 어떤 좌관급 군인이 중국인은 돼지라고 말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군사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중국을 식민지로 삼고 말겠다는 계획이 난무했다.
-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육군>, 정선태 역, 글항아리, 2016, 307~308, 313p
▲ 도조 히데키 수상과 왕징웨이 주석(1942년 12월) 왕징웨이는 애초에 합의된 화평안이 일본 측의 배신으로 지켜지지 않자 분노하였으나, 이미 충칭을 탈출해 일본 측에 합류한 시점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후 그는 중국 내 일본군 점령지에 세워진 괴뢰정권의 주석으로 취임하여 전쟁에 이용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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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왕징웨이 정권은 제국 일본의 괴뢰정권으로 전락했고, 중국 민중은 왕징웨이 정권에 등을 돌렸다. 평화는 도래하지 않았고 전쟁은 계속됐다.
중국의 항전에 가로막힌 제국 일본이 결국 인도차이나 반도 진주와 미국의 금수조치를 거쳐 태평양 전쟁 개전으로 치닫게 됐음을 상기해본다면(관련 기사: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도 전쟁에 반대하지 않았다), 애당초 왕징웨이 측과 합의됐던 '2년 이내 철군' 조건이 백지화된 건 제국 일본의 패망으로 이어진 커다란 요인 중 하나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일본에 만연했던 혐중 감정이 합리적인 정치적 결단마저 가로막았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지점이다.
대본영 육군부 연구반은 이와 같은 현상(중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전횡)의 원인을 '일본 국민성의 결함'에서 찾고 그 경위를 분석했다. 주제에서 벗어난다고 생각되는 세세한 지적들을 제외하고 열거하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으로 유입된 일본인의 대부분은 중국인이 「패배자, 피정복자라는 편견을 가지고... 경멸하며 오만불손하게 군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일청전쟁 당시부터 배양되어온 것으로, 일본 어린이들은 놀이에서도 「패배하고 도망치는 것은 짱짱 빡빡이」「지나의 짱짱 빡빡이는 싸움에서 지고」라며 놀려댔다. 성인들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짱코로가」「짱가」「짱코우」라는 식으로 떠들어댔다.
새로 유입된 거류민들은 (중략) 스스로의 무능력으로 인해 일확천금을 꿈꾸며 '불법부정의 비상수단'을 강구하게 되었다.
연구반은 문제의 본질이 '내지 일본인의 기질과 더불어 성전에 대한 관념과 불가분 관계에 있다'고 결론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결론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그렇다 하여도, 대본영 육군부연구반은 문제의 근원을, 일본인이 '성전 목적'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지 않은 것, 중국으로 건너간 방인들이 '애당초 저질스러운 하층민'이라는 점에서 찾고는 그 이상의 검토와 추가연구를 그만두었다. '성전 목적'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연구반 자신도, 중국인을 '패전국민', '열등국민'으로 바라보고 이에 따라 '문화적으로 우월한 일본인'이 중국인의 위에 서서 '지도적 입장'으로 그들과 '협력'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 점에서, '성전 목적'을 '올바르게 이해'한다해도 사태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의 뿌리는 참으로 깊었다. 이러한 사태가 그대로 방치된 가운데,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고 더욱 대량의 일본인이 중국으로 쇄도해가게 된 것이다.
- 吉見義明, 2022, <草の根のファシズム> 岩波現代文庫、103-105p
▲ 2차 상하이 사변 발발 당시의 기사 중국을 "난폭한 지나"라고 표현하며 일본군의 공격을 미화하고 있다. 이렇듯, 일본군의 중국 침략은 난폭한 중국인에 대한 응징으로 정당화되었다. |
ⓒ 도쿄 아사히 신문 |
어린이에서 성인에 이르기까지, 일부 사회구성원들이 중국인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던 사회에서 이성적인 대화와 타협은 애당초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혐오에 잠식된 사회상은 결국 일본이라는 나라를 전쟁으로, 범죄의 길로 그리고 패망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때의 역사적 교훈에서 시사점을 도출할 수 있는 것은 비단 현대 일본인뿐만이 아닐 것이다. 타자를 향한 혐오가 물결치는 한국 사회에서, 혐오로 인한 오판이 언제 야기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관련 기사: "한국은 우리 싫어하죠?" 중국친구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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