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차, 그렇게 안 빠르다"던 현대차, 美서 일냈다

최대열 2022. 12. 22.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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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미국 진출 초창기 대중매체 비아냥 견뎌
최근 품질·성능 車 기본기, 판매량으로 입증
1986년 첫 진출 후 36년만 누적 1500만대
도요타·현지 브랜드 이어 점유율 5위 ↑
"車 독자개발 꿈 접어라" 美 회유에도
정주영 회장 거절 후 독자개발 속도
"전기차는 퍼스트무버" 직원 독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85년 독자개발한 포니 엑셀 신차발표 행사에서 차량을 살펴보고 있다.<사진제공:현대차그룹>

[아시아경제 최대열 기자] 1992년 불거진 LA 폭동은 흑인 로드니 킹의 ‘엑셀 질주’가 시발점으로 꼽힌다. 킹은 현대차가 막 미국에 수출하기 시작한 소형 세단 엑셀을 탄 채 경찰과 도주극을 벌였는데, 훗날 폭동이 불거지자 경찰은 킹이 검거 당시 시속 110마일(176㎞)로 과속했다고 주장했다. 현대차는 "(엑셀로) 불가능한 속도"라며 항의했고 훗날 경찰은 "85마일(136㎞) 정도"라고 말을 바꿨다. 킹의 불법을 부각하기 위해 경찰이 차량성능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거짓말한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

2014년 미국에서 나온 영화 ‘한번 더 해피엔딩’에도 현대차는 볼품 없게 나온다. 주인공은 한때 잘 나가던 시나리오 작가에서 십수년이 지나 수입이 끊긴 퇴물로 전락한 인물이다. 그가 영화에서 모는 차가 준중형 세단 아반떼다. 다른 미국 드라마에선 현대차는 훔칠 가치도 없다는 식의 대사도 나온다.

각종 대중매체에서 ‘싼 차’ 이미지가 덧씌워졌던 현대차는 근래 달라졌다. 지난해 나온 마블시리즈 가운데 하나 ‘스파이더맨’에서는 악당의 공격에 다른 차량이 처참히 꾸겨지는데 반해 현대차 스포츠유틸리티차(SUV)는 끄떡없는 걸로 묘사된다. 또 다른 마블시리즈 앤트맨에 나오는 벨로스터는 도심 곳곳을 달리는 주행성능이 뛰어난 차로 나온다. 자동차에 진심인 미국에서 현대차의 위상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현대차 포니엑셀을 미국에 수출하기 위해 선박에 선적했던 1986년 1월 20일 당시 동아일보 보도<이미지출처: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1985년 출시된 현대차 포니엑셀. 국내에서 처음으로 자체 개발한 전륜구동 차량으로 꼽힌다.<사진제공:현대차그룹>

1986년 1월, 포니 엑셀을 수출하며 미국에 진출한 현대차가 현지 누적 판매 1500만대 기록을 세웠다. 가장 많이 팔렸다는 아반떼를 일렬로 주욱 세운다면 6975㎞(최신모델 기준). 서울과 부산을 21번 다녀올 법한 거리다.

첫 500만대 판매까지 21년6개월이 걸렸는데 이후 1000만대까지 8년3개월(2015년 10월), 다시 1500만대까지는 7년2개월(2022년12월) 걸렸다. 랜디 파커 현대차 미국법인 최고경영자는 "올해 마무리를 ‘누적 1500만대’ 이정표로 장식해 기쁘다"라고 말했다.

미국은 글로벌 완성차 업체간 경쟁이 가장 치열한 곳으로 꼽힌다. 일찌감치 자동차 산업이 발달해 신차나 판매기법이 발달해 있다. SUV나 픽업트럭 등 상대적으로 비싼 차량이 많이 팔리는 점도 또 다른 거대시장 중국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완성차업체의 미국 내 위상이 전 세계 시장에서도 통한다는 얘기다.

지난해 개봉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 등장한 현대차 전기차 아이오닉5<사진제공:현대차그룹>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와 기아의 올해 1~3분기 미국 내 합산 점유율은 11.1% 정도로 추정된다. 업체별 순위로 다섯 번째 정도다. 지난해 혼다를 제치고 한 단계 오른데 이어 올해 들어선 4위 스텔란티스(12.3%)도 위협하고 있다. 스텔란티스는 미국 토종 브랜드인 램이나 지프 등이 있는 회사다.

미국 내 판매가 늘어난 건 품질이나 가격, 내구성·안전 등 자동차라는 제품의 기본기가 잘 받쳐준다는 방증이다. 시장조사업체 JD파워가 한 상품성 만족도 조사에서 현대차그룹은 7개 차종(차급별 3위 이상 결과 합산 기준)의 이름을 올렸다. 전 세계 완성차회사 가운데 가장 많은 수준이다. 현지 안전평가에서도 준수한 성적을 내고 있으며, 판매 과정에서 딜러사에 지급하는 웃돈(인센티브)은 가장 적은 축에 꼽힌다.

현대차의 미국 내 선전은 회사 창립 초창기 굴곡진 역사와도 맞닿아 있어 눈길을 끈다. 현대차는 초기 미국 포드가 개발한 차량을 조립하는 일을 맡았다. 독자개발은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다. 70년대 후반 들어 포니를 필두로 개발 성과가 하나둘 가시적으로 드러나자 미국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에게 자동차 개발을 포기하길 종용했다. 한국의 내수시장이 작고 생산 인프라가 발달하지 않은 만큼, 조립만 하는 하청업체 정도로 만족하란 의미였다. 정주영 회장은 미국 대사의 ‘협박’을 그 자리에서 받아쳤다.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간 했던 사업 가운데 가장 파란만장했던 역정을 거친 분야로 자동차를 꼽는 것도 이런 배경이 작용했다.

복잡한 대내외 환경 속에서 시대흐름을 캐치하려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경영스타일도 영향을 끼쳤다. 정 회장은 고교 재학시절 정주영 회장이 생전 머물던 청운동 집에서 같이 지냈다. 당시 정주영 회장이 손자인 정 회장에게 자주 한 얘기가 "시류를 따라야 한다"였다. 한 때 잘 나가던 중국에서 갑작스레 고꾸라지며 휘청일 법도 했으나 이내 미국 시장을 발판 삼아 글로벌 3위 완성차 메이커로 끌어올렸다. 미국 내 전기차 전용공장을 짓기로 한 건 현지 브랜드를 제외한 글로벌 완성차 업체 가운데 가장 빠른 결정이었다. 정의선 회장은 "내연기관은 '팔로워'였으나 전기차는 '퍼스트무버(선도자)'가 돼야 한다"고 직원들을 독려한다.

미래 이동수단(모빌리티)의 한 축인 전동화 흐름은 다른 업체보다 한 발짝 먼저 시작하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고유가나 환경규제 등으로 미국에서도 전기차나 하이브리드 모델을 찾는 수요가 많아졌는데 , 현대차는 전동화 전환을 일찌감치 시작하며 전기차를 한 발 앞서 내놨다. 전용전기차 아이오닉5는 올 들어서만 2만대 이상 팔렸다. 코나 역시 9000대가량 판매됐다. 전기 픽업트럭 등을 앞세운 포드나 제너럴모터스(GM)와 함께 테슬라 이외 2위 경쟁이 한층 치열해졌다.

최대열 기자 dy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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