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 용기, 그 뒤에는 가족이 있었다
[이준목 기자]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제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날이다. 113년 전, 29세의 청년 안중근은 왜 머나먼 이국 땅에서 총을 들어야만 했을까. 그리고 안중근이 목숨을 바쳐서까지 평생 나라를 위하여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숨은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21일 방송된 tvN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35회는 '안중근은 왜 하얼빈을 택했나' 편을 통해 안중근의 일대기와, 그의 집안이 독립운동 명문가로 거듭나게 된 숨은 이야기들을 조명했다.
안중근은 조선 말기 고종 시대인 1879년 9월 2일 조선 황해도 해주목 영동방 청풍리에서 3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 안중근은 가슴과 배에 일곱 개의 사마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안중근의 부모인 안태훈과 조마리아 부부는, 안중근이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의미에서 응칠이라는 아명을 지어줬다.
안중근의 집안인 순흥 안씨는 대대로 무관을 대거 배출한 무인 가문이었다. 안중근도 선조들의 호방한 기질을 물려받아 글공부보다는 말타기와 사냥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고, 한번 뜻한 바가 있으면 결코 굽히지 않을 만큼 강직한 성격을 지녔다고 한다.
안중근은 1894년 16세의 나이에 황해도 양반 가문 출신의 김아려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마침 그해에는 안중근의 일생을 바꿀 '동학농민혁명'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발생한다. 안중근은 부친을 따라 진압군으로 생애 첫 전투에 참전하게 된다.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전문가인 신주백 성공회대 교수는 "당시의 안중근에 관점에서 보면, 농민군이 외세와 싸운다는 핑계로 나라에 불충하는 반란을 저질렀기에 진압에 나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런데 부친 안태훈은 동학농민군으로부터 빼앗는 곡식을 군량미로 사용한 일로 고위 관료들에게 반역죄의 누명을 쓰게 됐다. 안태훈은 프랑스인 신부들이 거주하여 치외법권 지대였던 종현성당(현 명동성당)으로 피신했고, 이때 이후로 가족이 모두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안중근은 여기서 모든 인간이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사상을 눈에 띄게 된다.
조선 후기에 전래된 천주교의 존재는, 단순히 종교의 관점을 넘어서 조선 사회의 낡은 신분제를 부정하는 평등사상, 새로운 문명과 가치관을 전파하는 역할을 해냈다. 안중근도 천주교를 받아들이면서 이전의 좁은 세계관에서 벗어나 국제정세와 근대적 사고에 눈을 뜰수 있었다. 안중근의 호로 알려진 '도마'는 천주교로부터 받은 세례명 '토마스'의 한자식 발음에서 유래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가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게 된 안중근은, 가족들에게 중국 상해로 이주할 것을 제안한다. 일본의 탄압을 피하여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할 방법을 모색하려 했던 것. 안태훈은 무모할 수 있는 아들의 제안을 흔쾌하게 수락했다.
사전 답사차 혼자서 먼저 상해를 찾은 안중근은 상해 동포들을 찾아다니며 구국활동에 나설 것을 설득했다. 하지만 동포들의 반응은 냉담했고 쓸쓸하게 고향으로 발길을 돌려야했다. 설상가상 안중근의 뜻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존중해주던 아버지 안태훈이 세상을 떠나는 아픔도 겪었다. 안중근은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항일 독립운동에 정진할 것을 다짐했다.
안중근은 1906년 가족과 함께 항구도시인 진남포로 이주한다. 당장 세력이 없었던 안중근이 택한 차선책은 학교를 세우고 항일운동을 위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안중근은 학교를 만들기 위하여 가산을 처분했고 가족들은 모두 안중근의 뜻에 따라줬다. 국가적 위기 상황 속에서 사회적 기여를 실천하려고 했던 안중근의 의지는, 가족이라는 든든한 원동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안중근은 학교를 세우고 교장이 되어 애국계몽운동을 가르쳤다. 하지만 2년 뒤인 1907년 고종이 강제 폐위되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면서, 안중근은 더 이상 소극적인 계몽운동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아내와 어린 아들을 두고 사지에 나서야했던 안중근은 "나는 집과 나라를 멀리 떠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나랏일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다"는 글을 남기며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그리고 가족들은 그러한 안중근의 뜻을 묵묵히 지지해줬다.
안중근은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신문에 기고문을 실어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할 동지들을 모았다. 안중근을 지지하는 이들이 하나둘씩 모여 300여 명에 이르는 연해주 항일 의군부대가 조직된다. 얼마 전까지 분필을 잡고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사 안중근은, 이제 총을 쥐고 의병 지휘관이 되어 국경지대에서 일본군 소탕에 나섰다.
안중근과 의병대는 함경도의 홍의산과 신아산 전투에서 게릴라전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이어진 영산 전투에게 대규모 화력을 투입한 일본군에 뼈아픈 참패를 당하며 불과 20여 명만 살아남는 참혹한 상황에 놓인다.
여기에는 안중근의 책임도 있었다. 당시 승전을 통하여 사로잡은 일본군과 일본인 상인 포로들을 국제법을 근거로 풀어줬다. 안중근은 사지를 넘나드는 상황에서 천주교 신자다운 박애주의를 실천하려 했던 것이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풀려난 포로들은 일본군에게 의병대 위치와 정보를 알렸고, 이를 이용한 일본군의 대규모 기습공격에서 의병들은 전멸에 가까운 쓰라린 참패를 당해야 했다. 역사 전문가들은 안중근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포로들을 풀어준 명분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정작 그에 대비한 사후 대응조치가 미숙했다고 지적한다.
안중근은 목숨을 건져 연해주 본진으로 귀환했지만 포로 석방 문제로 동포들의 신뢰를 잃으고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안중근은 재기을 위하여 절치부심하여 동포들을 설득하여 겨우 11명의 동료를 다시 모을 수 있었다. 안중근은 동료들과 함께 손가락을 잘라 결의를 다지는 '단지동맹'을 맹세하고, 태극기에 피로서 '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새겼다. 이는 안중근이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항일운동의 방향성을 모색하는 전환점이 됐다.
1909년 10월, 안중근은 일제의 수상인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으로 간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당시 러일전쟁 승리로 한반도의 독점적 영향력을 확보한 일본은, 러시아와 하얼빈에서 한반도와 만주 문제를 협의하려고 했다. 이 회담의 대표가 된 인물이 바로 이토였다. 안중근은 국제도시였던 하얼빈에서 이토를 제거하여 전 세계에서 일본의 야욕을 알리려고 했던 것.
10월 26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하얼빈 역에 기다리고 있던 안중근은, 러시아대표와 이야기를 마치고 열차에서 내린 이토를 사살한다. 거사 직후 안중근은 목이 터지도록 '꼬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외쳤다. 이토는 안중근에게 저격 당한지 30분 만에 사망했다. 안중근이 남긴 유묵에서는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라는 글귀를 통하여 그의 군인정신을 엿볼 수 있다.
당시의 기록 영상을 보면 안중근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러시아 헌병들에게 조금도 저항하거나 도주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되었고, 포승줄에 묶인 채로 의연하게 걸어나갔다. 신주백 교수는 "본인도 도망칠 수 없다고 예측했을 것이다. 그래서 본인의 결연한 의지와 거사의 정당함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안중근은 왜 거사를 일으킨 하얼빈이 아닌 900km가 떨어진 뤼순까지 이동해야 했을까. 당시 하얼빈은 실질적으로 러시아의 통치권 하에 있었다. 원칙적으로 안중근은 러시아의 재판을 받아야했지만 이러한 국제관계의 원리는 철저히 무시됐다. 러시아는 이토 사망에 대한 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하여 바로 안중근의 신변과 재판권을 일본에 넘겼다. 일본은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서 마음대로 재판을 진행할 수 있는 뤼순으로 안중근을 데려온 것.
1910년 2월 7일, 안중근의 첫 공판일에는 500명이 넘는 방청객이 몰리며 뜨거운 관심이 쏟아졌다. 안중근은 일본 재판관들 거듭된 추궁에도 당당한 기색을 잃지 않고 "나는 한국 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을 하여 이토를 죽였기에 지금 이 법원 공판장에서 심문을 받는다는 것을 잘못된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독립전쟁 중에 일어난 사건이기에 자신은 국제법상 포로로 대우받아야한다는 것이다. 안중근은 재판을 통하여 대한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려고 했다.
하지만 재판은 시종일관 불공정하게 진행됐다. 재판은 비공개로 돌려졌고 안중근은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도 보장받지 못했다. 영국과 러시아 변호사가 안중근의 변호를 맡겠다고 자원했지만 일제는 이를 거부했다. 첫 재판 일주일뒤인 1910년 2월 14일, 일본 재판관들은 안중근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
안중근은 거사 소식은 고향의 가족들에게도 전해졌다. 가족들은 안중근이 투옥된 중국 뤼순 감옥을 찾아 옥바라지를 했다. 안중근의 동생들은 사형선고에 통곡하며 형에게 어머니가 지어보낸 마지막 선물을 전한다. 그것은 놀랍게도 수의였다. 어머니는 이미 아들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비통한 심경을 애써 감추고는, 담담하게 아들을 애국지사로서 보내주는 길을 택했던 것.
안중근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유작인 '동양평화론' 집필을 완성하기 위하여 법원에 사형 집행을 미뤄달라고 요구한다. 안중근은 이토를 사살한 15가지 이유 중 하나로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를 언급한 바 있다.
동아시아 3국(한중일)이 서로의 주권을 인정하고 국제기구를 만들어 협력하자는게 안중근이 주장하는 동양평화론의 핵심이다. 당시만 해도 평화라는 개념은 지금만큼 보편적이지 않았던 시대에, 조국의 의익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공존을 추구했던 안중근의 평화사상이 그만큼 시대를 앞서간 주장임을 보여준다.
안중근이 남긴 동양평화론은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필사본이 소장 중이다. 안중근의 기록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사법성의 한 관리가 안중근의 주장에 감명받아 안중근의 사상을 남기고자 밤을 새워서 필사를 한 덕분이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안중근이 남긴 기록은 불가 17쪽의 미완성으로 끝났다. 일본이 사형집행 연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가 내리던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마지막 모습을 남긴 사진에서 안중근은 어머니가 남긴 수의를 입고서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다. 마지막까지도 안중근은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밑으로 내리지 않고 당당하게 정면을 쳐다보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안중근의 면모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안중근은 마지막 유언으로 "내가 죽으면 뼈를 하얼빈 유역에 묻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안중근의 유언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일제는 안중근의 시신을 유족들에게 인계하지 않고 뤼순 감독 어딘가에 묻어버렸다. 유족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끝까지 안중근의 시신이 묻힌 위치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안중근은 자서전과 미완의 동양평화론, 가족사진을 유품으로 남겼다. 하얼빈 거사 이전에 마지막으로 가족을 만나고 싶었던 안중근은, 가족들이 의거 다음날에야 도착하면서 결국 만나지 못했다. 그가 마지막까지 품고 있었던 가족사진은 안중근의 가족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보여준다.
안중근 사후, 조국에 남아있던 가족들도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해외 망명길에 올라야했다. 다행히 해외 한인사회에서 안중근 가족을 돕기 위하여 후원과 모금운동이 일어났다.
오늘날 대중들은 안중근의 이름은 대부분 알지만 그의 가족들도 다수가 유명한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는 사실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안중근의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은 형의 뒤를 이어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안정근은 도산 안창호와 함께 독립운동에 참전하여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도 활약했다. 또한 막내 안공근은 백범 김구의 오른팔로 활동하며 그가 만든 비밀결사조직인 한인애국단에서 활동했다.
한인애국단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유명인물로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인 거사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선서식을 하고 사진을 남겼 곳은 모두 안공근의 집이었다. 극도로 보안이 중요한 모임이 특정인의 자택에서 이뤄졌다는 것은, 안공근이 그만큼 한인애국단에서 얼마나 핵심적인 인물이었는지를 보여준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건국되며 안중근의 집안에서 건국훈장을 받은 인물만 15명에 이른다. 안중근 가문은 생전에 비록 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시간이 흘러 누구보다 조국을 위하여 헌신한 독립운동 명문가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안중근은 유묵을 통하여 "이로움을 보았을 때는 의로운지에 대하여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당했을 때는 목숨을 바쳐라"는 글을 남겼다. 안중근의 삶과 정체성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용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용기가 만들어지고 빛을 발할수 있었던 이면에는, 매번 어려운 길을 걸어가는 안중근의 용기를 묵묵히 이해하고 함께해준 가족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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