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 적도를 지나는 5가지 방법

2022. 12. 22.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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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성(고려대 명예교수·사회학)


대한민국 해군 순항함에 편승해(11월 24일자 여의도포럼 칼럼, ‘사관생도 한 명 한 명이 모두 외교관이다’) 태평양 적도를 지나며 국가가 갖춰야 할 요건을 생각해본다. 유리면같이 청아하게 넘실거리는 적도의 파도와 너울을 보며 아른거리는 것은 오늘의 어수선한 한국 사회 현실이다.

적도는 지구의 허리띠다. 남극과 북극에서 같은 거리에 있으며 북반구와 남반구를 나누는 가상의 선이다. 적도는 북반구의 북동 무역풍과 남반구의 남동 무역풍이 엇갈리며 수렴하는 영역으로 무풍지대로 잘 알려져 있다. 대항해 시대를 열었던 범선은 바람의 힘으로 움직였기에 바람은 최고의 편(便)이자 최대의 적(敵)이었다. 범선들은 적도 부근 무풍지대에 들어가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역풍보다 못한 존재가 무풍이며, 거친 태풍보다 무서운 것이 무풍이다. 역풍이 불면 지그재그로 가서 움직이는 거라도 가능하고, 태풍이 닥쳐오면 무언가 할 수가 있지만 무풍지대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범선을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이 완전히 소멸된 것이다. 계절이 바뀌기를 무작정 기다리는 것 이외에 뾰족한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요즘 한국 사회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두 극단이 만나 사회 동력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국민은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대립한 적이 있었는지를 묻는다. 한 발짝도 앞으로 못 나가는 형국이다. 도대체 여야 관계가 어디까지 가야 직성이 풀릴 것이냐고 걱정한다. 대립과 소멸의 종착지가 어떤 모습일지 불 보듯 훤하다.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으로 남는다. 가뜩이나 기존 사회발전을 추동했던 동력은 점점 그 힘을 잃어가고 있지만 그 자리를 채워줄 새로운 동력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 상황에서 소멸로 치닫는 오늘을 풀어내는 해법으로 무풍지대를 헤쳐나가려는 범선의 지혜를 상상해본다.

첫째, 위기 상황에서 최고의 방책은 역시 신뢰다. 무풍이 언제까지 진행될지 모르는 상황은 선원들의 인내심, 차분함, 절제력을 무한히 요청한다. 뜨겁게 내리쬐는 적도의 태양 아래에서 어려운 시간을 동요 없이 지탱케 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한배를 탔다는 최소한의 신뢰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둘째, 좌표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좌표를 모르면 지금의 위치도 모르며 어디로 헤쳐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항해에서는 천문항법 등을 바탕으로 좌표를 확인하며 하나의 방향을 끊임없이 견지하는 항상성을 확보해낸다. 오늘의 우리 위치와 지향점을 정확히 간파해야 한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며 세계 최고 수준의 문화 소프트파워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만큼 지속가능성 문제가 절박하게 제기되는 나라도 드물다. 지속가능을 위한 항법을 들고 있어야 한다.

셋째, 큰 조류를 읽어야 한다. 범선에서 기류를 읽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을 것이다. 기압이 바람을 만들고 이것이 파도와 너울을 만들어낸다. 국가 상황에 비유하면 기류란 큰 흐름, 시대정신에 해당한다. 시대정신이 정세를 만들고 이것이 정책과 전략을 연쇄적으로 만들어낸다. 시대정신이란 크게 아우르는 울타리이기에 이를 놓치고 지금의 소멸 상황을 풀어내기는 어렵다.

넷째, 튼튼한 배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주식, 부식과 같은 생필품을 충분히 가져야 한다. 그래야 무풍지대에서 오래 갇혀 있는 기간을 버틸 수 있다.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경제 자원을 튼튼히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적 여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을 때 사회 갈등이 만들어내는 파열음이 몇 배로 커지는 것은 일도 아니다. 무풍이라고는 하지만 미세한 바람은 있기 마련이기에 이걸 이용하기 위해 화려한 돛을 정교하게 더 많이 달 수 있는 튼실한 배를 갖춰야 한다.

다섯째,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절박한 간절함을 모으는 일 같은 것 말이다. 범선의 시대에는 적도 통과를 기원하는 적도제를 했다. 적도제는 기능론적으로 해석하면 범선 내 통합을 도모하는 최적의 방법이다. 지금이야 적도제 같은 의식은 없지만 이렇게 읽어내야 한다. ‘지금의 상황은 매우 어렵습니다. 앞으로의 상황도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여기를 헤쳐 나갈 것입니다. 모두 힘들지만 마음을 모아주세요. 그 책임을 무겁게 지고 솔선수범하겠습니다.’ 간절한 감성에 호소하는 겸허한 설득의 리더십이 범선 시대의 적도제가 아닌가 싶다.

박길성(고려대 명예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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