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책에 독자 반응 달라져… 5~6년 후엔 작가라 불리겠죠”
차인표를 만났다. 배우가 아닌 ‘소설가’로서다. 그는 최근 11년 만에 세 번째 장편소설 ‘인어 사냥’을 발표했다. 책을 펴낸 배우가 드물지 않지만 소설로 세 권까지 쓴 사람은 그가 처음일 것이다. 지난 13일 서울 강남구 개인 사무실에서 마주한 그에게서 자신감이 묻어났다.
“글이 안 써지는 순간엔 너무 괴롭지만 고통을 상쇄하는 기쁨이 있어요. 그 기쁨이 가장 컸던 게 이번이었어요. 예전에는 길을 가기 바빴다면 이번에는 주인공과 동행하면서 길옆도 둘러보는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소설의 배경은 1902년 강원도 통천 인근의 외딴섬. 어부 박덕무는 아내를 병으로 잃은 데 이어 딸 영실이마저 치료가 어려운 폐병에 걸리자 절망에 빠진다. 그를 찾아온 공 영감이 누런 기름 한 방울을 먹이자 영실이의 고통이 잦아든다. 기름의 정체는 인어를 푹 고아 만든 인어 기름. 먹으면 1000년을 살 수 있다는 불로장생의 영약이다. 덕무는 딸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 인어 사냥에 나선다.
소설은 빠르게 전개되고 잘 다듬어진 문장은 공들여 쓴 흔적이 역력하다. 생명과 자연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메시지도 선명하다.
-책장이 쭉쭉 넘어가던데요.
“좀 쉽죠?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직진하는 스타일이라 글도 그래요. 가독성과 메시지, 재미가 목표였어요. 영화가 재미있으면 중간에 끊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두세 시간 동안 보잖아요. 제 책도 그렇게 쉽게 읽혔으면 했어요.”
-한국에도 인어 설화가 있다는 건 처음 알았어요. 조선시대 ‘어우야담’에 나오는 ‘어부에게 잡힌 인어가 흰 눈물을 비처럼 쏟았다’는 문장이 모티브가 됐다고요.
“바다에 접한 나라에는 거의 인어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일본 스코틀랜드 브라질 뉴질랜드 러시아…. 지역과 시대별로 모습과 성격이 다르지만 인어가 왜 공통적으로 등장할까 궁금해졌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눈물 흘리는 인어라면 우리 민족의 원천적인 한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 한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걸 담아서 우리의 인어를 그려보고 싶었어요.”
그는 2009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첫 소설 ‘잘 가요 언덕’을 펴냈다. 할머니들이 계신 나눔의 집에 봉사하러 다니면서 당시 초등학생이던 아들 정민군에게 할머니들에 대해 설명할 방법을 생각하다가 떠올린 게 소설이었다. 2011년에는 고달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세 남자의 이야기를 위트있게 담은 ‘오늘예보’를 선보였다. 첫 번째 책은 일본과 중국에서도 출간됐고, 두 편 모두 몇만권씩 찍을 정도로 꽤 많이 팔렸다. 이후 단편영화 ‘50’과 ‘샤또 몬테’의 시나리오를 썼으니 꾸준히 글을 써온 셈이다.
-계속 글을 쓰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자유로움이에요. 창작만큼 또 다른 작은 세계를 만들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 없어요. 그 안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고, 그릴 수 있는 것을 그려볼 수 있고요. 1만년 전 신석기인이 돼 씨를 뿌릴 수도 있고,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성 위에서 몽골군이 침략하는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울분을 삼킬 수도 있고요. 그것을 써내려가는 게 소설가들의 일인 것 같아요.”
-이번 책 초고를 3개월 만에 끝냈다고요.
“매일 예닐곱 시간을 앉아서 썼어요. 첫 책이 정말 오래 걸렸는데 쓰다가 멈추는 순간 6개월, 1년이 훅 가버렸어요. 그래서 하루에 3000자를 쓰고 다음 날 2000자를 지우더라도 ‘3보 전진 2보 후퇴’의 심정으로 했더니 석 달이 걸리더라고요. 대신 수정하는 데 6개월이 걸렸어요.”
-쓰다가 막히면 어떻게 돌파구를 찾으셨어요.
“아침에 책상 앞에 앉으면 저는 꼭 맨 앞 페이지를 펴요. 처음 몇 장을 읽으면서 단어 하나라도 고치고 나서 그날 써야 할 곳으로 가요. 다시 첫 페이지로 가는 게 첫 번째 생각, 초심으로 돌아가는 준비 운동이라고 할까요. 그러다 보면 막혔다가도 갑자기 돌파구가 생각날 때도 있고, 제일 좋은 건 자다가 꿈에서 떠오를 때예요. 어느 책에서는 꿈에서도 작품을 생각해야 진짜 작가가 된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작가가 차인표라는 걸 내세우지 않았으면 오히려 제대로 평가받지 않았을까 싶었어요. 한편으로 삐딱하게 보자면 본업인 배우에 영화 감독과 제작까지, 우물을 여러 개 파놓은 것 아닌가요.
“연출을 했던 것도 20년 넘게 연기자로서 작가의 표현의 도구로 살았다면 이제는 제가 좀 더 능동적으로 창작물을 만들고 싶다는 의지 때문이었어요. 책에 대한 평가는, 일주일에 수백권의 신간이 나오는데 제가 어쩌다 유명해진 사람이라서 제 글을 알릴 기회를 얻었잖아요. 죄송할 만큼 특별 대우를 받는 거죠. 그래서 이전 책들 때는 TV 토크쇼부터 거의 다 거절했어요.”
-인터뷰를 망설였던 게 그래서였군요.
“그런데 이번 책을 쓰고 보니 독자가 읽을 수 있도록 최대한 소개하는 것까지가 글을 쓴 사람의 의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국 저의 콤플렉스 아닌가 싶은데, 두 번째 책까지만 해도 연예인이 취미로 글을 쓰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동력을 잃어버렸다고 할까요. 그런데 코로나19로 외출을 못 하게 되면서 책을 더 많이 읽게 됐고, 다시 쓰고 싶은 욕망이 생겼어요. 이번 책은 독자 반응도 좀 달라졌다고 느꼈어요. 고정관념이 줄어든 것 같아요. 앞으로 계속 1, 2년에 한 편씩 쓰면 5~6년 후에는 작가로 불릴 수도 있겠죠.”
-1, 2년에 한 편씩이면 굉장한 다작인데요.
“루틴의 힘을 빌려야죠. 의지만으로는 힘들 때 습관이 대신 일을 해주잖아요. 이번 원고를 쓸 때도 매일 새벽 4시 45분에 일어났어요. 저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래요. 새해에 이루고 싶은 건 여러 가지 있지만 목표는 딱 하나, 턱걸이 스무 개로 세웠어요. 지금 열 개 넘게 하니까 한 달에 한 개씩만 더 하면 이룰 수 있거든요. 오롯이 내 노력만으로 실현 가능한 작고 구체적인 목표를 만들면 거기에 삶의 영점이 맞춰진다고 생각해요. 그 목표를 따라가다 보면 루틴이 생기고요. 아주 사소한 턱걸이 하나가 다른 것을 변화시키는 긍정적인 원동력이 될 수 있어요.”
그는 ‘루틴’이라고 말했지만 ‘성실함’으로 들렸다. 그의 아내인 배우 신애라는 언젠가 SNS에 ‘남편의 존경스러운 점’으로 ‘첫째, 매일 운동한다. 둘째, 매일 아침저녁 부모님께 안부를 여쭌다. 셋째,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쓴다’고 썼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성실함과 반듯한 언행으로 데뷔 이래 한 번도 입길에 오르내린 적 없는 모범 연예인이자 선한 영향력의 아이콘이다. 각국의 빈곤 아동 수십명을 후원하는 그가 아프리카에서 봉사하는 다큐멘터리가 방송되거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후원을 호소하면 수천명이 해외결연에 동참했고 구호단체 홈페이지가 다운됐다. 두 딸을 공개 입양해 키우면서 입양에 대한 인식까지 바꿔놓았다.
-무엇을 하든 삶의 기준을 얼마나 행복한가에 둔다고 했어요.
“행복하다는 건 내 느낌이니까 내가 선택하는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행복하다고 결심하고 그 결정에 어긋나지 않도록 살다 보면 하루가 끝났을 때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예전의 저는 반대로 살았어요. 계속 내가 행복해질 조건과 상황을 만들어내고, 그 조건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이제는 생각이 바뀐 거죠. 행복은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그렇게 바뀐 계기가 있었나요.
“10년 전 동생을 암으로 잃었어요. 그때 많이 힘들었고 인생이 이렇게 짧고 허망한 거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깊이 고민했어요. 인생을 하루로 압축하면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잘 사는 게 평생을 행복하게 사는 것과 같다는 깨달음이 있었어요.”
-자녀에게 꼭 물려주고 싶은 가치관이 있으세요.
“두 가지를 얘기해요. 매일매일 기도하고 하나님 안에서 살자, 그리고 감사하자. 감사가 생활의 중심이 되면 그게 너를 기쁘게 하는 도구가 되고, 어려울 때 돕는 도구도 되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큰 힘이 되니까 항상 감사하라고요.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잘 듣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웃음).”
-마지막으로, 제가 오늘 인터뷰에서 놓친 질문이 있을까요.
“음, 나이 든 사람한테는 어느 순간부터 더이상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고 묻지 않더라고요. 저한테 그 질문을 하신다면 저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답하겠어요. 사람을 존귀하게 하는 건 결국 다른 사람이더라고요. 태어났을 때 축하해 주고 함께 살아주고 하늘나라 갈 때 배웅해주고, 이게 다 사람을 통해서 이뤄지잖아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나이 들어가려면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권혜숙 인터뷰전문기자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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