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 격노한 '아소 망언', 尹은 참았다…구닥다리 궤변 대처법 [김현기의 시시각각]
#1 지난달 2일 오후. 용산 대통령실에 아소 다로 전 일본 총리(현 자민당 부총재)가 나타났다. 윤석열 대통령과의 접견.
한·일 관계 전문가들은 이 만남을 주시했다. 두 가지 이유였다.
아소는 한국에 까칠한 대표적 정치인. 또 하나는 현 기시다 정권을 사실상 떠받치고 있는 실력자란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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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발끈하며 앙숙의 세월 감내
윤석열, 전략적 인내로 일단 경청
참은만큼 보다 담대한 목표 이뤄야
」
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주시한 이유는 '10년 전 외교참사'의 기억 때문이었다.
아소는 2013년 2월 25일 당시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 일 정부 특사로 방문해 "미국 북부 사람들은 남북전쟁을 두고 '시민전쟁'이라 하고, 남부에선 '북부의 침략'이라 한다. 같은 국가·민족이라도 역사 인식은 일치하지 않는 법. 그러니 다른 나라 사이에는 오죽하겠는가. 일·한도 그걸 전제로 역사 인식을 논해야 하지 않겠나"고 했다.
노예제 폐지를 두고 벌인 내전과 식민지 지배를 위한 침략행위를 동일 선상에 놓은 궤변이었다.
격노한 박 대통령은 나흘 후 3·1절 기념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란 역사적 입장은 천 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이란 역대급 발언을 내놓았다.
이후 두 나라는 2년 8개월, 980일 동안 정상회담을 하지 못하는 앙숙의 세월을 보냈다.
#2 순간 귀를 의심했다. 양국 소식통으로부터 "아소가 이번 윤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또다시 '남북전쟁'을 언급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다.
지론을 빙자한 궤변을 내놓은 아소야 그렇다 치고 윤 대통령의 대응이 궁금했다.
윤 대통령은 아소의 발언을 듣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전략적 인내심을 발휘한 것인지, 아소 발언의 의미를 잘 몰랐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전자의 공산이 크다고 본다.
그리고 접견 바로 11일 뒤 두 정상은 캄보디아에서 공식 정상회담을 했다. 3년 반만이었다.
발끈했던 박 전 대통령이 옳은 건지, 윤 대통령식 대응이 옳은 건지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다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아소의 구닥다리 '남북전쟁' 궤변에 우리마저 10년 전과 똑같은 대응을 했다면 한일관계는 또다시 과거의 늪에서 수년간 허우적댔을 것이다.
#3 관건은 이 흐름을 어떻게 잘 이끌어 결실을 보느냐다. 정부에선 한국 기업이 '일제징용피해지원재단'에 기부금을 내고, 재단이 일본 기업 대신 배상금을 내는 이른바 '병존적 채무인수'안을 갖고 윤 대통령이 연초 방일하는 걸 추진 중이다.
속도를 내려 한다. 연초 정상회담에 맞추기 위해 일본 측에 대폭 재량권을 주고 있다는 이야기도 솔솔 들려온다.
과연 이렇게 해서 될까.
미쓰비시중공업이나 일본제철이 참여하지 않는 해결책은 한국 내에서 두고두고 화근이 될 것이다. 추후 또 다른 소송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일본 입장에서도 "다시는 이 문제를 재론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보장책이 되질 않는다.
자칫하다간 징용자합의가 사실상의 파기로 이어진 위안부합의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
최근 일본 해당 기업의 한 주요 인사는 한국 측 인사에게 "나는 총론(한·일 관계 개선) 찬성, 각론(일 피고 기업의 출연) 반대"란 표현을 썼다고 한다.
그게 현실이다. '조속한 해결'의 이득보다 '성급한 해결'의 폐해가 크다.
따라서 우선은 징용자 문제 이외의 현안을 정리하는 셔틀외교(바라건대 3월 10일 도쿄돔 WBC 한·일전에서 야구 찐팬인 두 정상이 시구 행사를 하면 좋겠다. 양국 국민 모두 느끼는 바가 클 것이다) 재개→5월 히로시마 G7(주요 7개국) 정상회의 옵서버 참석으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그 사이 한국도 일본도 해결책을 더욱 다듬고 공감대를 넓혀야 한다.
그리고 10월의 '김대중-오부치 선언 25주년'에 맞춰 징용자 해결책을 포함한 새로운 한일관계 선언이 나왔으면 한다.
25년의 변화를 담은, 그리고 25년을 내다보는 미래 선언이다.
아소 망언을 윤 대통령이 참아낸 진짜 이유도 당장 코앞의 회담이 아닌 보다 담대한 곳에 있다고 믿는다.
김현기 순회특파원 겸 도쿄총국장 kim.hyun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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