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혜리의 시선]이 시대 또 하나의 이권 카르텔

안혜리 2022. 12. 22.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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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바뀌어도 문화권력 공고
출판·드라마 기울어진 운동장
만연한 '취소문화' 바로잡아야
안혜리 논설위원

최근 생애 첫 책을 낸 이를 비롯해 몇몇 2030 남성 논객을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깜짝 놀랐다. 지금 한국 출판계를 비롯한 문화판은 이성애자인 젊은 남성, 게다가 좌파 진영에 비판적 목소리를 낸 전력까지 있다면 책 출간은 물론 잡지 기고나 크고 작은 강연, 유튜브 섭외나 방송 출연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지식 생태계 안에서의 커리어를 이어갈 기회 얻기가 매우 어렵다는 경험담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사실상 커리어의 명줄이 끊길 위기에 처한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순양 창업자 진양철 회장 역을 맡은 이성민. JTBC

가령 이런 식이다. 책 출간 전 기획안을 들고 진보를 표방하는 어느 신문 출판국을 찾았더니 담당자가 대뜸 "내용 자체는 매우 흥미롭지만 보수 신문에 우리 진영을 향해 비판적인 글을 쓴 저자의 책을 내줄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다른 몇몇 주요 출판사의 반응도 자칭 진보 신문의 출판국만큼 노골적이진 않았지만, 모두 비슷한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2030 세대를 구세대적 관점에서 좌우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지만 굳이 이 필진의 성향을 따지자면 보수보다 진보에 훨씬 가깝다. 그런데도 크든 작든 문화권력을 쥔 사람들은 내 편 마음에 안 드는 글을 쓴 적이 있다는 이유로 상대적 약자를 이렇게 배제하고 고립시켜 또래 전체에 겁을 준다. 이미 상당한 팬덤을 확보한 기득권 논객이거나 교수·의사 등 글쓰기 말고도 다른 생업이 있다면 또 모를까 이제 막 시작하는 젊은 전업 작가가 감당하기 어려울 공포다. 다행히 그의 칼럼을 눈여겨본 한 유명 작가가 다리를 놔줘 책을 낼 수 있었지만 그는 이 과정을 통해 출판계 주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하게 되더라는 고백을 했다.
비단 특정인에만 해당하는 이례적 사례가 결코 아니다. 또래의 젊은 남성 논객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어려움이다. 참신하고 깊이 있는 저술로 주목받았던 이가 최근 몇몇 칼럼에선 이상하게 진영에 갇혀 좌파 기득권 논리만 재생산해 의아하다 싶었는데, 원하는 학계로 가기 전 지자체나 시민단체의 무슨 무슨 연구원 자리라도 하나 얻으려면 이런 식으로라도 자기 증명을 해야 최소한 배제는 당하지 않는다고 누군가 설명했다. 동성애자가 주류인 서구 패션업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이성애자도 동성애자인 척을 해야 한다더니 우리 지식 생태계가 딱 그런 식인 모양이다.

문재인 정부의 도종환 문체부 장관이 전 정부 블랙리스트 사태를 사과하는 모습. 정부의 불법적 블랙리스트는 없지만 다른 진영 입막음을 하는 교묘한 취소 문화는 더 만연해졌다. [사진 문화체육관광부]

2030 필자들은 이런 현실을 담담하게 말했지만 사실 심각한 문제다. 문서로 이름만 적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매우 광범위한 블랙리스트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셈이라서다. 아무리 서울시장이 박원순에서 오세훈으로 바뀌고, 문재인 정권 대신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도 이처럼 공고한 문화권력은 교체되지 않았다. 정치적 편향성은 차치하고 지난 십수 년 동안 음모론 생산기지 역할을 하며 더불어민주당의 전략통이자 스피커 노릇을 해온 김어준·주진우 같은 진행자가 대선 열 달이 다 지나가도록 여전히 tbs 방송을 장악하고 있는 데는 단순히 해당 방송국 내부 논리나 정치공학적 요소뿐만 아니라 이런 문화판의 거대한 카르텔도 한 배경이라고 봐야 한다.
마침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0일 청년들을 만나 "미래 세대가 이권 카르텔에 의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공정한 기회를 갖지 못해 결국 우리 사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을까 우려해 대선에 도전했다"고 말했다. 이날 발언은 청년의 진입장벽을 높이는 대기업 등의 강성노조를 타깃으로 한 것이겠지만 우리 지식 생태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주인공 진도준(송중기 분)이 이전 생애 가족이 하는 식당을 찾는 장면. 원작엔 전혀 등장하지 않지만 드라마에선 친부는 해고 노동자, 친모는 기업 주가조작 희생자로 나온다. JTBC

최근 화제인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을 재밌게 보면서도 한편으론 이런 맥락에서 의구심이 들었다. 무려 550쪽짜리 책 5권 분량의 웹소설을 16부작 드라마로 만들다 보니 원작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건 이해하지만 좀 과하다. 한국 재계사를 대기업 순양 오너 일가의 치열한 경영권 다툼에 대입해 보여준 원작에서도 정경유착이나 비자금 조성, 불법 승계 등 재벌의 치부를 보여준다. 하지만 초점은 기업가의 선택이다. 반면 드라마는 원작과 달리 손자 진도준의 원래 가족을 해고 노동자 등으로 등장시켜 기업의 약자 착취를 부각시킨다. 또 굳이 '머슴''마름' 등 자극적 단어를 반복하면서 기업가를 제 배만 불리는 파렴치한으로 그린다. 작가의 신념이라면 차라리 다행인데 혹시 이런 좌파 한 스푼 없이는 드라마 제작도 쉽지 않은 환경인가 싶어 찜찜하다.
나와 생각이 다른 이의 입을 막기 위해 자행되는 이른바 '취소 문화'를 다룬 『지식의 헌법』에서 미국 언론인 조너선 라우시는 '진리 추구 영역에 속하는 비판과 달리 취소는 프로파간다 전쟁 영역'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그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지만 이런 만연한 취소 문화가 건강하지 않은 건 분명하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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