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의 문화난장] 영화 ‘영웅’은 한국 뮤지컬계 ‘사건’
영화 ‘영웅’이 21일 개봉했다.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불꽃 같은 삶, 한국인이라면 가슴이 뜨거워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성탄 대목을 앞두고 ‘아바타: 물의 길’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영웅’은 창작뮤지컬로 만든 첫 뮤지컬 영화라는 점에서 한국 뮤지컬 역사에 ‘사건’이 됐다. 2010년과 2017년 창작뮤지컬 ‘김종욱 찾기’와 ‘형제는 용감했다’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가 각각 개봉한 적이 있지만, 두 영화 모두 뮤지컬의 줄거리만 딴 극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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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뮤지컬 원작 첫 영화
뮤지컬 시장에 활기 넣어
‘시카고’ ‘레미제라블’처럼
세계에서 통하는 날 기대
」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 거사 100주년에 맞춰 2009년 10월 26일 첫선을 보인 뮤지컬 ‘영웅’은 초연 13년 만에 노래까지 스크린으로 옮겨졌다. 천만영화 ‘해운대’와 ‘국제시장’의 윤제균 감독이 2012년 뮤지컬 ‘영웅’을 본 뒤 감동하여 영화화를 결심했다고 한다. 윤 감독이 눈물을 쏟았다는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의 넘버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는 영화에서도 ‘눈물 버튼’이 된다. 뮤지컬 초연 때부터 안중근 역으로 더뮤지컬어워즈ㆍ한국뮤지컬대상 등의 남우주연상을 휩쓴 정성화가 영화 주인공도 맡았다.
가요와 영화, 드라마와 웹툰 등 웬만한 문화 콘텐트들이 앞에 ‘K’를 달고 세계 무대를 주름잡고 있지만, 창작뮤지컬은 한국 시장에서조차 해외 라이선스 뮤지컬에 밀려나 있는 게 현실이다. 공연 예매 사이트 인터파크의 연간 결산 결과만 봐도 뮤지컬 티켓 판매 상위 톱10 리스트에 창작뮤지컬은 2020년에는 단 한 편, 2021년에는 두 편밖에 포함되지 못했다.
한국 창작뮤지컬의 효시는 1966년 ‘살짜기 옵서예’다. 고전소설 ‘배비장전’이 원작으로, 현 서울시뮤지컬단의 모태인 예그린악단이 제작했다. 연극계 거장 임영웅이 연출을, 가수 패티 김과 코미디언 곽규석이 주인공을 맡은 초연은 공연 나흘 동안 1만6000여 명 관객을 동원하며 대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이후 30년 넘도록 한국 공연시장에서 뮤지컬은 존재감이 미미했다. 2000년까지 연간 매출 규모가 100억원 정도에 불과했을 만큼 시장이 작았으니, 창작뮤지컬 제작을 끌어낼 동력이 없었다.
변곡점은 2001년 ‘오페라의 유령’이었다. 그해 400억 매출을 기록한 데 이어 2006년 1000억, 2010년 2000억, 2014년 3000억원을 돌파하며 뮤지컬 시장은 급성장했다. 제작사들이 창작뮤지컬에 관심을 보인 것도 그때부터지만, 소ㆍ중극장 규모에 집중됐다. 막대한 제작비가 들어가는 대극장 뮤지컬은 새로 만들기보다 브로드웨이ㆍ웨스트엔드에서 검증된 흥행작 재연이 안전해 보이는 게 당연했다.
올해 국내 뮤지컬 시장은 매출 4000억원을 넘길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기준으론 공연산업 전체 매출의 78%가 뮤지컬이다. 하지만 법과 제도에선 뮤지컬이 여전히 아웃사이더다. 공연법에서 독립 장르로 인정받은 것도 올 7월부터다. 그동안은 줄곧 연극의 하위 분야로 분류됐다. 뮤지컬계는 ‘뮤지컬산업진흥법’ 제정도 추진하고 있다. 이미 진흥법이 시행 중인 영화ㆍ게임ㆍ애니메이션ㆍ음악 등 타 장르처럼 미래 먹거리 문화산업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넷플릭스 글로벌 차트 1위를 고수하고 있는 드라마 ‘웬즈데이’는 미국의 유명 괴짜 가족 캐릭터 ‘아담스 패밀리’에서 파생된 작품이다. ‘가위손’ ‘배트맨’의 감독 팀 버튼이 아담스 패밀리의 장녀 웬즈데이를 주인공 삼아 기괴한 상상력을 발휘했다.
아담스 패밀리의 출발은 무려 8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8년 만화가 찰스 아담스가 ‘뉴요커’에 그린 연재만화에서 시작해 1960년대엔 ABC의 코미디 드라마로 방송됐고, 이후 영화와 뮤지컬ㆍ애니메이션 등으로 제작됐다. 잘 만든 콘텐트 하나가 다양하게 변주되며 세대를 이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밑천이 된 것이다.
그간 ‘서편제’ ‘번지점프를 하다’ ‘모래시계’ ‘해를 품은 달’ 등 영화ㆍ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창작뮤지컬은 여러 편 만들어졌다. 올여름 최대 히트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도 EMK뮤지컬컴퍼니에서 뮤지컬로 만들어 2024년 초연할 예정이다. 이렇게 한쪽 방향으로만 진행됐던 ‘원 소스 멀티 유스’의 흐름이 이번에 처음 역방향으로 구현됐다. 영화 ‘영웅’ 개봉에 뮤지컬계가 고무된 이유다.
이제 첫발이 디뎌졌다. 첫술에 배부르진 않더라도 창작뮤지컬이 원천 소스가 돼 타 장르와 함께 세계 시장에서 ‘윈윈’ 돌풍을 일으킬 날을 꿈꿔본다. 영화 ‘시카고’와 ‘맘마미아’ ‘레미제라블’ 등 롤 모델은 이미 많다.
이지영 논설위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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