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지 않는 美 소비·고용…물가 부메랑?
미국 물가 상승률이 주춤한 가운데 다수의 전문가 예상대로 지난 12월 14일 열린 올해 마지막 FOMC에서 미 연준은 ‘빅스텝(한 번에 금리 0.5%포인트 인상)’을 밟았다. 하지만 시장 참여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신호도 동시에 관찰된다. 미국의 ‘나 홀로 호황’으로 소비와 고용이 견조한 가운데, 인플레이션 상승률만 주춤하는 현상이 나타나자 물가의 ‘피크앤하이(고점 찍은 뒤 높은 물가 지속)’ 패턴이 상당 기간 지속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고개를 든 것. 물가 상승률이 주춤하더라도 연준의 물가 목표치 2%에 근접하지 않는다면 고금리는 시장 예상보다 더 오래갈 수 있다. 침체 없이 물가만 잡히는 이상적인 시나리오가 현실화하는 듯싶지만 일각에서는 복잡한 글로벌 경제의 방정식이 더욱 고차원으로 진화했다는 우려 섞인 진단이 제기된다.
▷0.5%포인트 인상 ‘빅스텝’
금융 시장은 ‘인플레이션 진정=금리 인상 속도 조절’ 프레임에 베팅했는데, 연준의 결정은 이런 예상대로였다. 이제 금융 시장 시선은 금리 인상 속도보다는 최종 도달 수준을 향한다.
최근 물가 상승률이 주춤해 연준은 금리 인상 속도 조절에 나섰지만, 시장 참여자들을 갸웃거리게 만든 대목은 미국 소비다. 미국 GDP를 좌우하는 요소는 소비며 연말 ‘블랙프라이데이’는 미국 소비를 가늠하는 바로미터다. 당초 전문가들은 미국 소비가 일정 수준 냉각기를 가져 연준의 금리 인상 강도를 누그러뜨릴 것으로 기대했는데 이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블룸버그와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어도비의 마케팅 데이터 분석 솔루션인 ‘어도비 애널리틱스’는 블랙프라이데이 당일(11월 25일) 미국의 전자상거래 매출은 1년 전보다 2.3% 늘어난 91억2000만달러(약 12조2000억원)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역대 블랙프라이데이 중 최대 규모다. 할인 시즌이 예년보다 일찍 시작된 데다 소비자 예상을 웃도는 할인율이 소비 심리를 자극했다는 분석이다. 인플레이션 상승률은 둔화 추세지만 전반적인 물가 수준이 높은 가운데 상품 가격이 더 오르기 전 소비 행위를 서두르는 효과가 나타났다는 해석도 나온다.
소비 못지않게 ‘멀쩡한’ 부문이 미국의 고용 시장이다. 최근 미 노동부는 11월 비농업 일자리가 26만3000개 증가했다고 밝혔다. 이는 미 월가 전망치(20만개)를 큰 폭 웃돈 수치다. 실업률도 10월 실업률과 같은 3.7%로 집계됐다. 이는 50년 만에 최저치였던 2020년 2월(3.5%)과 크게 다르지 않다. 3%대 실업률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실업을 고려했을 때 사실상 완전 고용 상태로 평가된다. 미국 빅테크를 중심으로 고용 축소 움직임이 나타나지만 전체적인 고용 시장은 경기 침체 징후가 전혀 없다는 의미다.
▷자국 중심 리쇼어링으로 일자리↑
사정이 이렇자 금융 시장에서는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거론된다. 가장 낙관적인 전망은 고용과 소비가 견조한 가운데 물가에 낀 거품만 예리한 면도날로 걷어내는 것이다. 제롬 파월 의장의 최근 발언은 이런 전망에 보다 가깝다. 그는 워싱턴DC에서 열린 브루킹스연구소 주최 행사에서 “미국 경제가 연착륙할 것이라는 전망은 아주 타당하며 우리의 목표는 이를 달성하는 것이고 여전히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는 앞서 경기 침체 가능성을 경고했던 과거 발언과는 사뭇 다른 어조다.
다만, 신중론을 피력하는 진영에서는 아직 미국의 소비와 고용이 경기 침체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소비와 고용이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현 상황이 유지된다면 진정세를 보이던 인플레이션도 다시 자극받을 수 있다. 미국 경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2번의 경기 침체를 겪었지만 실업률이 증가하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미국의 ‘나 홀로 호황’을 두고 의문스러운 시선이 제기되는 이유다.
미국의 ‘나 홀로 호황’을 두고는 몇 가지 해석이 제기된다. 무엇보다 미국 고용 시장 구조가 과거와 달라졌다는 분석이다. 첫째는 노동자 공급 감소다. 은퇴 근로자 증가와 합법 이민자 감소, 코로나 국면에서 다수 사망자 발생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서비스 업종을 중심으로 노동 비용이 빠르게 상승 중이다. 현재 미국 노동 참여 인구는 코로나 발생 이전보다 350만명 적으며 코로나 확산 과정에서 노동 연령층 40만명이 사망했다. 합법 이민자 수도 약 100만명 줄었다. 둘째, 미국 정부의 공격적인 ‘리쇼어링’ 정책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은 “미국이 IRA(인플레 감축법안) 혜택을 통해 자국 기업 리쇼어링은 물론 세계 주요 산업 생산시설에 대한 미국 유치까지 꾀하고 있다”면서 “미국 등 주요국으로 진출하거나 생산시설을 이전하는 기업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IRA 정책 효과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컨설팅 업체 딜로이트는 올해에만 일자리 35만개가 미국으로 돌아올 것으로 추산했다.
통화당국은 고용, 소비 시장을 일정 수준 냉각시키려 금리를 올리고 있지만 미국 정부는 이와 정반대 정책을 펴는 것이다. 결국 통화, 산업 두 정책의 목표가 상호 충돌하면서 ‘트레이드 오프’가 나타난다는 지적이다. 자국 내 생산을 우선시할 경우 종국에는 국내 생산과 고용이 늘면서 임금과 물가가 상승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연준이 시장의 당초 예상과 달리 내년 금리 수준을 5%보다 높일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최종 도달 금리는 시장 전망치를 웃돌 수 있다는 지적이다. WSJ는 연준이 금리를 시장 예상보다 빨리 올렸다 서둘러 내리는 전략과 천천히 높은 수준으로 올려 이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전략 가운데 후자 쪽을 선호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실제 연준은 이런 전망에 가까이 다가섰다. 12월 FOMC에서 연준은 내년 최종 기준금리 수준을 5.1%로 상향 조정했다. 이는 물가 상승률이 정점을 찍었던 지난 9월 연준이 제시했던 내년 최종금리 수준 4.6%보다 0.5%포인트 더 높다. 연준은 금리 발표와 함께 공개한 점도표(연준위원들의 금리 전망을 나타낸 도표)에서, FOMC 위원 19명 중 10명이 내년 금리 수준을 5~5.25%로 예상했다고 밝혔다. 이외 5명은 5.25~5.5%, 2명은 5.5~5.75%까지 금리를 올릴 것으로 봤다. 시장은 ‘점도표 쇼크’에 빠졌다.
또 다른 시나리오는 연준이 물가 목표치를 현재의 2%보다 높은 수준으로 설정할 가능성이다. 미국 고용 시장의 구조적 변화로 에너지보다 서비스 부문 임금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면서 구조적으로 2% 물가 상승률 달성은 상당 기간 힘들 것인 만큼 결국 물가 목표치를 올려 잡을 것으로 파이낸셜타임스(FT)는 내다봤다. 다만, 단기간에 이런 전망이 현실화할지는 불투명하다. 12월 FOMC에서 연준 지도부는 목표로 하는 물가 상승률 2%대를 달성하기 위해 긴축을 멈출 수 없다는 인식을 명확히 보였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89호·송년호 (2022.12.21~2022.12.2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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