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서 스크린으로…안중근 서사, '뮤지컬 영화'로도 통할까
‘대한민국 최초 오리지널 뮤지컬 영화’라는 야심찬 외피를 입은 안중근 서사는 관객의 마음을 울릴 수 있을까.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다룬 영화 ‘영웅’이 오랜 기다림 끝에 21일 개봉했다. 2019년 12월 크랭크업한 뒤 3년만이자, ‘천만 영화’ 두 편(‘해운대’, ‘국제시장’)을 만든 윤제균 감독이 8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안중근 의거 100주년을 맞아 2009년 초연한 국내 창작 뮤지컬 ‘영웅’이 원작으로, 같은 날 뮤지컬도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에서 개막한다. 한국인 누구나 아는 역사적 인물의 이야기지만, 뮤지컬 영화라는 새로운 형식을 취했다는 점에서 익숙한 듯 낯선 이 영화의 성패에 이목이 쏠린다.
초연 후 벌써 9번째 시즌까지 이어진 원작 뮤지컬의 음악과 노랫말이 지닌 힘은 영화를 지탱하는 가장 큰 기반이다. 그간 극장가에서 ‘레미제라블’(2012) ‘라라랜드’(2016) 등의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는 국내 관객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지만, 정작 토종 뮤지컬 영화는 시도된 사례 자체가 적고 그만큼 흥행을 거둔 작품도 사실상 전무했다. 그나마 지난 9월 개봉한 ‘인생은 아름다워’가 추억의 명곡들을 배경으로 ‘국내 최초 주크박스 뮤지컬 영화’를 표방했지만, 117만 명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성공 사례가 없는 만큼, 뮤지컬을 영화화하는 ‘영웅’ 제작에도 숱한 반대가 있었다는 후문이지만, 원작을 보고 감격한 윤제균 감독은 배우 정성화를 안중근 역에 그대로 캐스팅하는 승부수까지 두며 국내 첫 오리지널 뮤지컬 영화에 도전했다.
유명 넘버들 스크린으로…원작과 같고도 다른 영화
“원작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영화적 체험을 극대화하고자 했다”는 윤 감독의 말대로 영화는 원작의 유명 넘버들을 대부분 살리는 동시에, 뮤지컬이 보여주지 못하는 실감나는 공간적 배경과 섬세한 인물의 표정을 담아냈다. 안중근(정성화)과 독립군들이 손가락을 자른 피를 모아 태극기에 ‘大韓獨立(대한독립)’이라 쓰며 ‘단지동맹’을 부르는 첫 장면부터 애국심을 뭉근하게 끌어올린다. 유기성이 다소 떨어지는 이야기 전개에 고개가 갸웃할 때쯤 독립을 향한 열망을 담은 ‘그날을 기약하며’, 이토 살해 후 일본 법정에 선 독립군들이 부르는 ‘누가 죄인인가’ 등의 합창 장면이 말 그대로 가슴을 웅장하게 울리며 몰입감을 되살린다. 어머니 조마리아(나문희) 여사가 아들에게 수의를 지어 보내며 부르는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는 속절없이 눈물을 떨구게 만드는 대목이다.
1900년대 블라디보스토크의 풍경은 당대 건축물이 보존돼있는 라트비아 로케이션을 통해 구현했고, 하얼빈 의거는 국내 세트장에서 촬영한 뒤 CG(컴퓨터그래픽) 작업을 거쳐 디테일을 살렸다. 가창 장면은 인위적인 느낌을 최소화하고자 불가피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70% 가량을 현장에서 녹음한 라이브 버전으로 실었다.
인물이 혼자 노래하는 장면은 가능한 롱테이크, 클로즈업으로 촬영해 배우의 표정을 보기 어려운 뮤지컬과의 확실한 차별점을 확보했다. 라이브를 위해 배우들이 착용했던 인이어와 마이크를 지우는 CG 작업에도 상당한 품이 들었다고 한다. 정민아 영화평론가는 “국내 뮤지컬 영화 시장이 사실상 전무한 상황에서 이같은 대작을 만들었다는 시도 자체에 어느 정도 점수를 주고 싶다”며 “관객들이 점점 ‘극장용’ 영화와 OTT에서 봐도 되는 영화를 나누는 경향이 강한데, 뮤지컬 영화의 경우 극장에서 보기에도 적합한 장르다. 할리우드에서만 잘하던 장르에 우리도 동참하면서 한국 콘텐트의 장르 다양성을 넓힌다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112년 전 ‘영웅’ 소환…“영화 잘 돼 유해 송환되길”
안중근이라는 실존 인물의 서사가 발휘하는 힘도 만만치 않다. 사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그 이후의 순국까지 모르는 한국 관객은 없지만, 윤 감독은 철저한 고증을 통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안중근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그려내고자 했다. 예컨대 이야기 초반 의병으로 활동하던 안중근이 만국공법에 따라 일본군 포로를 풀어주는 장면 등은 실제 역사서를 참고해 삽입한 에피소드다.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궁녀 설희가 이토에게 인간적인 정을 느끼거나, 안중근의 중국인 동지 링링이 안중근을 짝사랑하는 등 논란의 소지가 있는 뮤지컬 속 허구의 설정들은 관객이 좀 더 공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각색했다. 영화 속 설희(김고은)는 이토에게 정보를 빼내 독립군에게 전하는 첩보원으로서의 임무에 집중하며, 한국인 마진주(박진주)로 바뀐 링링은 유부남 안중근이 아닌 독립군 막내 유동하(이현우)와 러브라인을 형성한다. 영화는 원작과 달리 새롭게 추가된 유일한 넘버 ‘그대 향한 나의 꿈’을 설희에게 할애해 김고은이 분한 가상의 궁녀 캐릭터에 좀 더 힘을 실었다.
이밖에 영화에 독립군 동지로 등장하는 우덕순(조재윤), 조도선(배정남) 캐릭터는 원작에도 있는, 안중근과 함께 활동한 실존 인물들이다. 모두가 아는 슬픈 결말로 막을 내리는 영화는 ‘안중근의 유해는 아직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는 마지막 문구를 통해 우리가 잊고 살았던 영웅의 안타까운 현실을 소환한다. 윤 감독은 “영화가 잘 돼서 유해를 국내로 송환할 수 있도록 여론이 형성되는 것이 소망”이라고 했다.
‘아바타2’와 대적하는 유일한 韓 영화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의 관계나 감정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점이나 부자연스러운 장면 전환 등은 아쉬운 지점으로 남는다. 진지한 분위기를 깨는 윤 감독 특유의 유머 코드도 호불호가 갈릴만한 요소다. 허남웅 영화평론가는 “뮤지컬 넘버 장면들만 따로 떼어 놓고 본다면 한국 영화의 기술적 성장을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면서도 “다만 전체 영화를 봤을 때는 장면 간 유기성이 부족하고,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비장한 순간에도 웃음을 주려는 장면들이 삽입돼 몰입을 깨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허 평론가는 “영화에서 뮤지컬은 일종의 판타지적 성격을 자아내는 장치인데, 역사적 사실이 기반인 이야기가 뮤지컬 영화라는 형식과 다소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고 덧붙였다.
일주일 앞서 개봉한 할리우드 대작 ‘아바타: 물의 길’(‘아바타2’)과의 경쟁도 흥행의 중요 변수이지만, 의외로 장르적 차이 등으로 관객층이 크게 겹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정민아 평론가는 “‘아바타2’는 분명 극장에서 봐야 하는 영화로 관객을 끌어들이겠지만, 1편에 비해 이야기도 복잡하고 상영시간도 길어 확장성은 제한적일 수 있다”며 “연말 가족 단위 관객을 불러 모으는 영화로는 오히려 ‘영웅’이 유리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남수현 기자 nam.soohyo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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