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녀들에게 히잡을 강요하는가
[이준목 기자]
최근 '이란 히잡 시위'가 국제사회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이슬람 세계의 대표적인 전통 문화 중 하나는 히잡은 한때 자유의 상징에서 지금은 시대에 뒤떨어진 억압의 상징이 되기까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엇갈린 두 얼굴을 가져야 했다.
12월 20일 방송된 tvN 역사교양 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 78회에서는 '히잡을 둘러싼 의문사, 이란 히잡 혁명?' 편을 통하여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이란의 히잡 시위와 이슬람 문화를 둘러싼 오랜 갈등의 역사를 돌아봤다. 중동 전문가, 서강대학교 유로메나연구소의 박현도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최근 이란에서 경찰에 체포된 한 여성이 불과 3일만에 의문사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또한 국제대회에 참가했던 이란의 스포츠 클라이밍 국가대표 여성 선수는 갑자기 잠적설에 휘말렸다.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은 바로 히잡 착용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 이란에서는 분노한 국민들에 의하여 히잡 착용 반대 시위가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이란 정부는 이러한 국민들의 저항에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다. 지난 11월까지 체포된 이들만 1만 5천명에 달하며 11명에게 사형이 구형됐고 그 중 2명이 이미 집행됐다. 시위도중 사망한 사람만 300명에서 4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대체 히잡은 무엇이길래 이토록 뜨거운 감자가 된 것일까.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반도로 불리는 아라비아 반도는 이슬람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고 아랍어를 공용 언어로 쓰고 있다.
반도 전체의 80%가 사막이었던 척박한 환경 탓에 뜨거운 천으로 몸을 가려서 뜨거운 태양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의상 문화가 자연스럽게 발전했다. 특히 여성들은 약탈이 빈번했던 유목 문화의 특성상 물건과 식량처럼 약탈의 도구로 인식되기 일쑤였다. 여성들이 안전상의 이유로 남성들보다 몸을 더많이 천으로 가리는 풍습이 보편화된 것이 오늘날 '히잡의 기원'이 되었다는게 학자들의 추측이다.
히잡의 어원은 아랍어로 '하자바(가리다, 나누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다.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무슬림 여성들의 옷차림을 가리키는 말도 확장됐다. 생존과 안전을 위하여 시작했던 히잡이 의무착용의 시대를 연 것은 무함마드(570?-632)였다. 이슬람교의 창시자로 꼽히는 무함마드는 신(알라)에서 받은 계시를 모은 이슬람교 경전 '코란'을 집대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코란에는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히잡 관련 구절이 등장한다. "믿는 여인들에게 눈을 낮추고 은밀한 부위를 가리며 다른 치장물이 드러나지 않게 하도록 하라고 이르라. 천으로 가슴을 가려, 남편과 부모, 자식, 형제, 성욕을 알지못하는 어린이 등을 제외한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곳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라.(코란 24장 31절)"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코란을 통하여 히잡은 신앙심의 상징이자, 신의 보호를 받는 정숙한 무슬림 여성임을 뜻하는 차별화된 수단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나라들은 지금도 히잡 의무규정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 영화에서도 여성의 신체노출은 금지되고, 해외 영화라도 여성의 신체가 노출되는 영화들은 편집당한다고.
이슬람 세력의 확장과 더불어 히잡 문화도 널리 퍼졌다. 히잡도 국가별로 명칭과 모양이 다양해졌다. 이란에서는 차도르,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니캅,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부르카 등으로 불리며 머리와 가슴에 두르고 패션 아이템처럼 활용하는 가장 보편화된 히잡에서부터, 코란을 보수적으로 해석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일수록 아예 얼굴 전체를 최대한 가리는 복면에 가까운 히잡도 있다. 경전에 등장하는 '은밀한 부위'라는 표현을 국가별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무슬림 사회에서도 의견이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20세기들어 무슬림 사회에서 히잡이 논란의 중심으로 떠오른 계기는, 서양 열강들의 중동 진출에서 비롯된 서구화와 세속주의 바람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서양 열강들은 산업혁명으로 축적한 힘을 바탕으로 전 세계 곳곳에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개척하려는 제국주의가 득세했다. 서양 열강들은 자원을 확보하고 시장을 넓히기 위하여 석유가 발견되기 시작한 중동 진출에 관심을 보였다.
1차세계대전을 통하여 중동의 패권국가였던 오스만 제국(튀르키예의 전신)이 패전국이 되어 몰락하면서 그 뒤를 이어받는 튀르키예는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튀르키예 초대 대통령)을 중심으로 재건에 성공했다.
아타튀르크는 튀르키예의 근대 국가화를 추진하며 외형적인 모습부터 바꿀 것을 제안했다. 아타튀르크는 무슬림의 전통 문화를 구시대의 유물로 규정했다. 튀르키예와 마찬가지로 1차대전 이후에도 영토를 지켜냈던 이란 역시, 집권세력이던 팔레비 왕조는 튀르키예의 개혁에서 영감을 얻어 서구화 정책을 단행했다.
레자 샤 팔라비 국왕은 여기서 더 나아가 1936년에는 히잡을 비롯한 이슬람 전통 복장을 금지하는 '카슈페 헤잡' 법령을 도입한다. 서구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에 비하여 당시 많은 이란 여성들은 여전히 히잡을 고집하고 있었다. 현재 히잡 착용을 국가가 강제하면서 국민들이 저항하는 지금과는 180도 다른 구도였다는 것이 흥미롭다.
왕실에서는 히잡 벗기를 장려하기 위하여 왕비와 공주들이 히잡을 벗고 서구화된 복장으로 궁궐을 나서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홍보하기도 했다. 레자 샤 국왕은 연설을 통하여 "나의 어머니, 여형제들이여, 이 뜻깊은 날, 이제 이 기회를 통하여 여러분은 나라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여성은 집에서 눈에 띄는 것처럼, 사회에서도 눈에 띄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여성의 사회 진출을 독려했다.
부친 팔레비 1세의 뒤를 이은 이란의 국왕에 오른 모함마드 레자 샤 팔레비는 선대의 정책을 계승하며 여성 인권 신장과 이란 근대화에 기여한 인물로 꼽힌다. 모함마드는 히잡 강제 금지를 자율로 전환하며 여성들 스스로의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했다. 또한 '백색혁명'을 통하여 여성 참정권 허용, 여성 이혼신청 수락, 일부일처제, 여성 최저 결혼연령 상향 등 혁신적인 정책들을 추진했다.
백색 혁명 이후 이란의 사회 분위기는 급변했고, 젊은 여성들은 서구 여성들처럼 히잡을 벗고 얼굴과 신체가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복장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남녀가 학교에서 함께 수업을 받고 연애를 즐겼으며, 축구장과 클럽에 드나드는 것도 허용됐다. 이 시기의 테헤란은 중동의 패션 중심지로 꼽혔다.
하지만 백색혁명은 보수 이슬람주의자들에게는 강한 반발을 자아냈다. 특히 지주들의 땅을 국가에 귀속하여 농민들에게 재분배하는 팔레비 왕조의 토지개혁에 가장 강하게 저항한 것은 대지주였던 이슬람 종교지도자들이었다.
반정부세력의 중심에 있던 이슬람 종교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1978년 '이란 혁명'을 통하여 팔레비 왕조가 축출되자 귀국하여 정권을 장악한다. 팔레비 왕조의 거듭된 부정부패와 무능, 경제난으로 인한 극심한 빈부격차, 친미 정책에 실망한 이란 국민들은 왕정에 등을 돌렸다.
놀라운 것은 당시 많은 여성들이 히잡을 쓰고 오히려 반정부 시위에 동참했다는 것이다. 당시 히잡은 정치적 반대의 상징이 됐다. 결국 팔레비 왕가는 1979년 1월 국민들에게 쫓겨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국왕의 미국 망명에 분개한 이란 대학생들은 주이란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하여 미국인 인질 52명이 억류되었고 무려 444일 동안 대치상태가 계속됐다. 이 사건은 한때 중동 최대의 친미국가였던 이란이 강경 반미국가로 돌아섰음을 보여주는 최대의 전환점으로 꼽힌다.
호메이니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설립하고 최고 지도자에 올라 정치와 종교가 일치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 건설을 추진한다. 튀르키예처럼 이슬람을 믿지만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세속주의 국가와 달리, 이란은 이슬람 교리가 곧 법인 사회로 회귀했다. 대표적인 차이가 바로 히잡 착용이었다.
호메이니는 여성의 히잡 착용 의무화 조치를 단행하며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을 '벌거벗은 여성'이라고 지칭했다. 혁명이 성공한지 힌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란 여성들은 히잡을 쓰지 않고 거리에 나와 시위를 벌이며 호메이니 정권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이란 정부는 반대 의견을 철저하게 탄압했고, 오히려 1981년에는 더 강경해진 이슬람식 복장준수 법령을 도입했다. 9살부터 히잡 착용을 의무화하고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를 강조하며 여성의 각종 권리가 다시 제한됐다. 이어 1983년에는 히잡 미착용을 위한 여성에게는 태형 74대를 때리는 형벌을 도입했다.
이슬람 문화의 정통성을 강조했던 호메이니는 히잡 미착용을 서구 세속화의 일환으로 여기고 서구문화를 철저하게 배척하려 했던 것.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이란의 이슬람 근본주의와 반세속화 정책은, 여성 인권문제는 물론이고 2021년에는 반려동물 금지법안까지 나오기도 했다.
2005년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은 '도덕 경찰'을 신설하여 히잡 착용 등 이슬람 풍속에 위반되는 행위를 엄격하게 단속했다. 이란에서는 도덕경찰이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들을 체포하고 비인간적으로 연행하는 사건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다. 외국인도 예외는 아니어서 경찰에 연행된이후 훈방되거나 추방조치를 받기로 한다. 강압적인 히잡 강제착용법안에 저항하던 여성 인권운동가 아프샤리는 이란 정부에 체포되어 각종 혐의로 2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란은 2015년 오바마 정부에서 미국과 핵협상을 타결하며 핵 개발을 제한하는 대신 각종 경제 제재를 해제하는데 합의하고 화해 무드를 맞이하는 듯 했다. 하지만 트럼프 정부에서 협상을 파기하며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를 재개했다. 국제적 고립속에 다국적 기업들의 철수로 이란은 심각한 경제난에 직면했다.
이란 국민들의 불만이 높아지는 가운데, 정작 고위층의 '아가자데(귀족출신, 한국의 금수저와 비슷한 의미)' 로 불리는 자제들이 SNS에서 재력과 특권을 과시하는 모습들은, 가뜩이나 성난 여론에 불을 지폈다. 이란 혁명의 주역인 호메이니의 증손녀가 명품백을 들고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렸고, 베네수엘라 주재 이란 대사의 아들인 사샤 소브하니는 SNS에 돈을 뿌리는 장면을 연출하며 가난한 서민들을 조롱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이란의 사회 지도층은 금융자산통제권-군 보안조직 인사권 등 국가의 핵심 권력을 독차지했고 심지어 부와 권력을 세습하고 있다.
하지만 이란 정부는 2021년 '순결과 히잡 칙령'을 발표하며 국민들의 반발을 여전히 힘으로 억압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히잡 착용을 강화하며 머리카락을 완전히 가리도록 했고, 여성의 광고출연도 아예 금지시켰다.
지난 9월 13일 이란의 여성인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 착용문제로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3일만에 의문사한 사건은 폐쇄된 이란 사회에 큰 경종을 울렸다. 이란 정부는 아미니의 사망이 지병으로 인한 질환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가족은 목격자의 증언과 응급실에서 촬영된 그녀의 두개골 CT 사진을 근거로 그녀가 심각한 폭행을 당한 충격적인 정황이 드러났다.
분노한 여성들을 비롯한 많은 이란 국민들은 아미니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들도 언제든 똑같은 일을 당할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됐고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또한 아미니 시위가 이미 격화되던 와중에, 시위에 참여했던 17세 소녀 니카 샤카리미가 약 한달 후인 10월 21일에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는 또다른 사건이 벌어진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니카는 죽기 직전 이란 군경에 연행되고 구금되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이란 정부는 니카가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며 이번에도 살인을 부인하고 있다.
여성들의 연이은 안타까운 죽음은 이제 히잡 강제 착용 문제를 넘어서 강압적인 정부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시위는 이란판 MZ세대라고 할 수 있는 10대들이 주도하고 있으며 반정부시위로 체포된 이들의 90%에 이른다. 자유를 갈망하는 젊은 세대들이 이슬람 원리주의를 지키려는 정부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히잡 시위로 지금까지 약 400명의 이란인들이 사망했고 이중 60명 이상이 미성년자로 밝혀져서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과 이란 정부는 반정부 시위를 폭동과 분란으로 규정했다. 이란의 래퍼 사만 야신 등 시위에 동조하거나 참여한 이들에게는 법정에서 가족과 변호사 배석이라는 최소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채 '신의 적이자 세상의 타락'이라는 황당한 죄목으로 사형을 구형하기도 했다. 이란 정부는 반정부 시위의 배후에 미국과 이스라엘 등 외부 세력의 사주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탄압에도 히잡 시위는 전세계로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최근 카타르월드컵에 출전한 이란 국가대표팀은 히잡 시위에 대한 지지 의사를 드러내며 국가제창을 거부하여 큰 화제가 됐다. 또한 튀르키예에서는 여성들이 시위에서 히잡을 불태웠고, 스위스 작가 킴 드 로리즌-스웨덴의 정치인 아비르 알 살라니 등은 공개석상에서 삭발 퍼포먼스를 통하여 이란 여성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지금도 전 세계 곳곳에서 이란의 히잡시위와 연대하려는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헬렌 켈러는 "독재는 신념의 힘을 꺾지 못한다"는 어록을 남긴 바 있다. 그저 전통의상일 뿐이던 히잡은 오늘날 종교와 세속, 근대와 전통을 넘어 강요와 자유라는 대립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누군가는 신의 이름을 팔아서 타인을 억압할 수 있다는 근거로 내세우지만, 그조차 인간이 멋대로 정한 기준에 불과하다. 히잡을 벗고 쓸수 있는 권리는 강압이 아닌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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