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비법'에 덧씌운 국가보안법, 독립영화 조직화 시동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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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훈 기자]
▲ 1998년 한국독립영화협회 창립대회 |
ⓒ 한국독립영화협회 제공 |
1990년대 후반은 한국 영화운동에서 중요한 변화가 잇달아 생겨난 시기였다. 1980년대 초반 구태의연한 한국영화를 비판하던 영화운동은 1990년대 들어 충무로 내에서 일정한 영역을 구축한 이후 구체제에 도전했고, 제도적인 규제를 뚫기 위한 투쟁을 병행하며 한국영화의 변화를 위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었다.
1996년 시작된 부산국제영화제와 1998년 한국독립영화협회(한독협)의 결성은 이 시기의 가장 큰 성과였다. 특히 한국 영화운동의 출발점이었던 독립영화의 조직화는 충무로 개혁을 추동하면서 한국영화 성장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게 된다.
당시 독립영화의 중요한 거점 역할을 한 것은 시네마테크였다. 1990년대 중반 서울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생겨난 시네마테크는 처음에는 영화동호회 성격으로 시작해 하나둘 시네마테크로 발전했다. 1980년대 영화운동 주력이었던 장산곶매와 민족영화연구소 등이 충무로에서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기 시작할 때 이들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젊고 패기 있는 청년들과 대학영화동아리 출신을 비롯해 일찍부터 예술영화에 관심을 가진 청년들이 충무로 밖에서 영화운동의 흐름을 이어간 것이다.
노동현장을 비롯해 철거민이나 도시 빈민 등 민중 투쟁의 현장에서 활동하던 카메라들도 독립영화의 주력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1990년대 영화운동의 전위대 역할을 맡았다. 이후 충무로 구체제와 영화운동의 주도권 다툼 과정에서 강경 입장을 견지하며 전투적인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국영화운동에서 독립영화연합체의 결성은 1990년 1월 30일 출범한 한국독립영화협의회(대표 이정하)였다. 영화마당우리와 민족영화연구소 등을 비롯해 여러 영화단체들이 참여했으나 민족영화연구소가 해소되는 시점에서 출범했기에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인 1991년 기존 명칭에서 '한국'을 뺀 독립영화협의회(대표 김동원)로 바꿨으나 조직의 틀만 유지한 채 분과 활동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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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 대표)에 따르면 이후 1993년 김동원이 민족예술인총연합 영화위원회(민영위) 3대 위원장이 되면서 독립영화협의회는 대표 없이 공석으로 사무국장 체계로 활동했고, 1999년 독립영화발표회의 공적 지원을 받기 위해 당시 문화예술진흥원에 기금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낭희섭이 서류에 대표로 등재됐다.
1990년대 초반 영화운동의 협의체로는 민족예술인총연합 영화위원회가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결속력이 그다지 강한 것은 아니었다. 1990년대 당시 민영위 2대 사무국장을 맡기도 했던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 대표)은 "주로 영화계 현안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형태였다"고 말했다.
1989년 비공식 친목모임으로 시작된 한국영화기획실모임이 1991년 공식적인 틀을 갖춘 후 1994년 한국영화제작가협회(제협)로 발전했고 1990년대 후반에 들어 두 번째로 결집한 것이 독립영화였다. 한독협은 제협에 이어 진보적인 영화운동의 중심에 섰고, 1999년 결성된 영화인회의(이사장 이춘연)의 주력으로 2000년대 영화운동을 선도한다.
코아아트홀 시네마 라이브러리
▲ 2000년대 초반 코아아트홀 전경 |
ⓒ 배을선 |
시네마테크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 중의 하나가 서울 종로 관철동의 예술영화관 코아아트홀이었다. 시네마테크에서 비디오 영화를 봤다면, 코아아트홀은 해외 예술영화를 스크린에서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국내 예술영화 관객들의 저변을 넓히는 데 톡톡한 역할을 감당했고, 대학 영화운동 출신들과 예술영화에 호기심을 갖고 있던 관객들에게 아지트로 자리했다.
1989년 7월 개관한 코아아트홀은 <집시의 시간>, <패왕별희>, <나쁜 피> 등의 작품성 있는 영화들을 발굴했고, 양조위가 주연한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은 10만 관객을 동원하며 예술영화 붐을 조성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은 난해한 예술영화로 평가받았음에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객 수를 기록했다. 그만큼 예술영화 확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코아아트홀은 국내 최초의 예술영화관이었다. 대한극장, 피카디리, 서울극장, 단성사 등 상업영화관만 있던 시기 등장한 특별한 극장이었다. 당시 한국 극장가는 할리우드로 상징되는 미국영화와 홍콩 무협영화가 중심이었다. 비디오가 활성화되면서 시장 여건이 좋은 곳은 아니었으나 그 좁은 틈새를 비집고 비상업적 영화의 입지를 마련했다. 2004년 폐관할 때까지 예술영화의 등불 역할을 맡았다.
당시 운영을 책임졌던 황인옥(프리비젼엔터테인먼트 대표)은 머니투데이 스타뉴스(2004년 11월 18일) 인터뷰에서 "천편일률적인 오락 영화에서 관객의 시야를 넓히고 상상력을 키워주는 공간으로 자리해왔고, 관객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며 "다양한 영화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고 자부심을 나타냈다.
이어 "믿는 것은 수준 높은 영화를 갈구하는 잠재 관객이 반드시 있으리라는 막연한 확신뿐이었다"면서 "일본의 손꼽히는 예술영화 전용관 이와나미 홀을 모델로 삼아 2년 정도 준비한 끝에 코아아트홀이 문을 열었고, 모회사인 (주)코아토탈시스템사옥을 개조한 90석 규모 소극장이 그 초석이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예술영화전용관을 시작하면서 고민했던 문제는 관객과의 교감이었다고 한다. 서울 중심가의 극장이나 미국과 홍콩영화에 대한 관객의 신뢰가 큰 상황에서 대대적인 광고 공세를 펼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이때 등장한 전략이 열성적인 마니아 회원을 양성하고 좋은 영화를 관객의 입소문을 통해 광고하자는 전략이었다.
영화상영 모임인 '시네마 라이브러리'는 그렇게 시작됐다. 마니아를 위해 연회비를 내는 회원을 대상으로 극장의 공간을 할애해 주는 형태로 운영됐다. 마니아들이 편안하게 그들이 원하는 영화를 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다는 것이 취지였다.
당시 운영자였던 정미(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연회비를 내고 할인과 시사회 초대, 시네마 라이브러리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며 "시네마테크처럼 비디오 영화도 볼 수 있었고, 매달 주제를 평균 주 2회 상영회를 개최했다"고 말했다.
코아아트홀 시네마 라이브러리는 다수의 영화인들이 거쳐 갔다. 1991년 이은주(화천공사)가 1대 운영자를 맡았고, 2대(1993년 4월 ~ 1996년 3월) 운영자가 정미, 3대(1996년 4월~1997년 10월) 운영자가 김수정(베리어프리 영화위원회 대표)였다.
정미에 따르면 이후 영화계에서 활동한 회원으로는 강성률(영화평론가. 광운대 교수), 곽정환(프로듀서, 롯데컬처웍스 드라마사업부문장), 문화학교 서울도 참여했던 김양희 (감독. <시인의 사랑>), 김영일 (작가. 하이브미디어코프 제작사,) 민동현(감독. <눈부신 하루>, <지우개 따먹기>), 사공영익(방송 프로듀서), 서창민(감독), 양재호(감독. <인생게임>), 윤영복(시나리오 작가. XR 영상 콘텐츠 기획자), 인진미(감독. <부귀영화>), 최선희(한국영상자료원 사무국장), 최원균(영화 칼럼니스트), 한승희(전 CGV무비콜라쥬 팀장), 함진(스튜디오앤뉴 영화사업부 이사) 등이었다. 활동은 안 했으나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김현숙(작가. 영화사회학 박사), 이영미(감독. <사물의 비밀>), 최영택(촬영감독) 등도 회원이었다.
▲ 김동원 감독 |
ⓒ 성하훈 |
▲ <상계동 올림픽> 한 장면 |
ⓒ 푸른영상 |
한독협이 결성되던 1990년대 중반은 충무로 구체제가 영화운동 세력과 다툼에서 밀리기 시작하던 때였다. 1996년 부산영화제와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으로 수립된 1기 민주정부는 영화운동 발전에 중요한 바탕이 됐다.
이런 흐름에서 독립영화의 연대를 촉진한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한 것은 1997년 2회 부산영화제 당시 전국의 시네마테크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 독립영화인들의 검열 철폐 시위였다. 영화제 검열에 반대하는 것 외에 공안당국의 4.3 항쟁 영화 <레드헌트> 감독과 상영 관련자들에 대한 구속 시도 등에 반발한 것이었다.
1997년 <레드헌트> 제작으로 인해 수배를 받다 이듬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 조성봉(감독)이 영장실질심사를 거쳐 불구속된 것은 표현의 자유를 갈망하던 독립영화에 대한 탄압의 시작이었다. 이에 앞서 먼저 체포된 것이 김동원(감독)이었다.
1988년 상계동 철거민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 이후 김동원은 표현의 자유 투쟁에서 선봉에 있었다. 1991년 변영주(감독), 오기민(프로듀서) 등과 함께 푸른영상을 설립한 이후 각종 사회 현안을 비디오로 제작해 배포하면서 영화를 통한 사회문제 비판에 주력했다. 영상을 통해 사회변혁 운동에 연대하는 취지에 충실한 것이었다.
김동원은 1980년대 아르바이트로 충무로 연출부 일을 시작했으나 대학 때 시위에 참여한 정도였지 운동권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상계동은 그의 삶에 전환점이 됐다. 철거민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생존권 투쟁을 다룬 <상계동 올림픽>은 독립영화의 전설적인 작품으로 자리매김하며 김동원을 독립 다큐멘터리의 상징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김동원은 "처음부터 다큐할 생각은 없었다"고 말했다. "<상계동 올림픽>은 당시 영화로 만들려고 찍은 게 아닌 기록영상이었으나, 당시 한겨레신문 안정숙 기자(전 영진위원장)가 의미를 부여하면서 독립다큐의 대표적 영화가 됐다"고 회상했다.
한겨레신문은 1991년 9월 18일자 기사에서 "<상계동 올림픽>은 기록영화의 전범으로 80년대 후반 다큐멘터리 영화운동의 고전으로 꼽히고 있고, 89년 베를린영화제 영포럼 부문에 초청되는 등 나라 안보다 밖에서 먼저 공인받았다"고 평가했다.
또한, "다큐멘터리 영화의 뿌리가 깊지 않은 우리 현대영화사에서 그 시작으로 불리는 영화로 정부의 주택 정책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도시 빈민들의 삶과 목소리를 담아냈고, 영화가 현실을 담아내는데 얼마나 효과적인 매체인가를 확인시킨 표본이다"라고 강조했다.
김동원이 카메라를 들고 머물렀던 상계동은 당시 '파랑새 사건'으로 피해 다니던 이정하(전 영화평론가)의 도피처가 되기도 했다. 김동원은 "1986년 10월부터 상계동에 머물며 철거민의 삶을 담았는데, 1986년 11월 이정하가 와서 8mm 카메라를 들고 찾아왔고, 빈집에 머물렀다"고 기억했다. 이어 "이정하가 카메라만 갖고 왔을 뿐 촬영을 하지 않았던 것이 특이했다"고 덧붙였다.
당시는 <파랑새 사건>으로 인해 홍기선 이효인 변재란이 연행된 후 도피하던 시기였다. 안동규(제작자) 일원동 집에 보름 정도 숨어 있던 이정하가 옮겨간 도피처가 상계동인 것이었다. 이수정(감독)은 "남편이 거기서 도피생활 한 줄은 몰랐다"며 "김동원 감독이 상계동에 들어가 있을 때 이정하와 함께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김동원은 "그때 이정하가 가져와서 사용하지 않았던 8mm 카메라로 1987년 6월항쟁 당시 명동성당 농성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명성, 7일간의 기록>을 촬영했다"면서 "6월항쟁을 겪으면서 제대로 사회문제에 눈 뜨고 의식화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음비법'으로 연행해 국가보안법 덧씌워
1990년대 이후 '푸른영상'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당시 공안당국은 김동원을 찍어누를 기회를 노리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푸른영상은 1990년대를 관통하며 사회문제를 꾸준히 영상에 담아 배포하는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 <레드헌트>의 한 장면 |
ⓒ 하니영상 제공 |
1997년은 조성봉(감독)의 4.3 항쟁 다큐 <레드헌트>로 인한 충돌이 곳곳에서 발생하던 때였다. 부산영화제서 상영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홍대에서 열린 인권영화제는 <레드헌트> 상영에 따른 당국의 탄압으로 폐막을 하루 앞둔 10월 3일 일찍 막을 내려야 했다. 뒤를 이어 1997년 10월 23일~28일까지 인하대 학생회관 회의실 및 소강당에서 개최됐던 2회 인천인권영화제도 <레드헌트> 상영으로 인한 관계 당국의 강한 압박으로 이틀 만에 중단됐다.
당시 인천에서는 <레드헌트> 이적성 문제로 행사를 주관했던 이은주, 이윤주, 이주섭 등 3명이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후 11월 14일~16일까지 부평4동 성당에서 남은 행사를 치러야 했을 만큼, 영화제 개최 자체가 영화보다 더 치열하게 전개됐던 시기다.
당시 김동원(감독)은 서울인권영화제 부위원장을 맡고 있었기에, 더욱 공안 당국의 표적일 수밖에 없었다. 김동원은 "인천에서 푸른영상 작품을 사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며 "인권영화제가 열리는 인하대로 가기 전 인천역 앞에서 만나 구매자에게 비디오를 먼저 전해주고 가려고 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구입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고, 연락도 안 돼 비디오를 판매하지 못했던 것이 전부였다"라고 회상했다.
그런데 이게 빌미가 됐다. 경찰 청소년 담당 부서에서 음비법 위반으로 체포영장이 나온 것이다. 허가받지 않은 비디오를 판매하려던 게 불법행위라는 이유였다. 그런데 체포 후에는 대공부서로 넘어가 조사를 받게 된다. 이적표현물로 규정된 <레드헌트> 상영에 따른 국가보안법 위반이 적용됐기 때문이다. 음비법으로 엮어 국가보안법을 덧씌운 공안 기관의 야비한 술책이었다.
하지만 김동원 구속 시도는 법원에서 가로막힌다. 당시 인천지법 이경구 영장전담판사는 연행 증거인멸의 이유가 없다 등의 이유로 구속영장을 기각하고 연행 3일만인 12일 김동원을 석방했다.
김동원은 "1998년 구속 시도는 예전의 상황이 이어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전부터 공안 기관의 감시와 탄압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김동원에 따르면 처음 경찰에 연행된 것은 1993년이었다.
당시 재일교포들이 비전향 장기수를 돕기 위한 돈을 송금했는데, 공안기관은 이를 북한의 자금이 들어온 것으로 의심했다는 것이다. 재일교포들이 보내온 돈은 비전향 장기수들에게 사용됐다. 비전향 장기수들의 공동주거지 '통일의 집'에 살던 권낙기 선생 등에게 전달됐고, '푸른영상' 상영회 비용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공안기관이 조직표를 만들어 놨을 만큼, 조직사건으로 커질 수 있던 상황이었다고 한다.
당시 조사를 받은 곳은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살해당한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이 확대되지 않는다. 김동원은 "그 자금이 당시 김수환 추기경을 통해 전달된 것으로 확인된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관련된 상태에서 공안 기관이 조직사건으로 엮기에는 부담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공안 사건으로 엮으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김동원은 몇차례 피검된다.
김동원은 1996년 6월 14일에도 음비법 위반 혐의로 긴급체포됐으나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하루 만에 풀려났다. 1993년에 이은 두 번째 연행이었다. 당시에도 <상계동 올림픽> 등 비디오 영화들을 상영한 데 대한 탄압이었다. 검찰은 불구속으로 기소했으나 법원은 경미한 사안이라 판단해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김동원은 "반정부(행위)는 맞지만, 위법은 아니라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다"며 "1993년 연행된 여파가 이어진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1995년 독립영화발전대책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한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고 추측했다.
1998년 1월 세 번째 연행은 국가보안법 혐의로 인해 김동원 개인적으로는 2001년 <송환> 제작 과정에서 평양 취재가 불발되는 원인이 됐다. 김동원은 "당시 조광희 변호사(전 영화사봄 대표)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에서 대응해서 잘 넘긴 것으로 알았는데, 평양 취재가 막힌 이후 계속 걸림돌이 될 것 같아 인천지법에 소송을 냈다"면서 "국가보안법과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인정받고 깨끗하게 정리했다"고 말했다.
김동원 석방이 아쉬웠던 이유
김동원의 세 번째 체포는 나흘 만에 석방되는 것으로 끝났으나, 독립영화인들은 단체 구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당시 시네마테크와 영상단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영화가 정치적 탄압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조직을 갖춰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었다.
이때 나선 사람이 노동자뉴스제작단에서 활동했던 김명준, 문화학교 서울 조영각, 실험영화의 임창재 등이었다. 조영각은 "1998년 1월 11일~12일 푸른영상 부근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김동원(감독)은 이미 석방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김동원은 "내가 나오니 김명준과 조영각이 조금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고 회상했다. 조영각은 "본격적인 투쟁 대책을 준비하고 있는데 김동원이 석방되니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아쉬운 면이 없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 1991년 대학가에서 <파업전야> 상영 당시 경찰의 침탈을 막기 위해 지키던 사수대 |
ⓒ 장산곶매 제공 |
독립영화 연대를 위한 논의는 1990년대 한국독립영화협의회가 만들어진 이후로도 전개되고 있었다. 1990년대 말 <파업전야> 상영 투쟁을 마무리하면서 장산곶매, 서울영상집단, 노동자뉴스제작단, 노동자문예운동연합(노문연) 영화분과 '11월 13일', 바리터 등 5개 단체는 '노동자영화대표자회의'라는 연대기구를 만들었다.
독립영화 역사를 정리한 책 <변방에서 중심으로>(서울영상집단. 1995)에 따르면 '노동자영화대표자회의'는 소속된 단체 구성원들이 전문영역별로 분과 활동을 했는데, 영화 이론및 정책 연구하는 연구분과, 시나리오 작가들의 모인 시나리오 분과, '다큐멘터리 작가회의'로 구성됐다.
하지만 1991년부터 노동자영화대표자회의 위상 및 방향과 관련한 논의를 거치면서 각 단체 입장을 정리한 문건을 회람했으나 본격적인 토론의 성과를 얻지 못한 채 해체됐다. '연대조직의 방향에 대한 의견이 모이지 못한 탓이었다'고 원인을 기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장산곶매 대표였던 이용배(계원예술대학교 교수)는 "'<파업전야> 공동 상영투쟁'으로 모이긴 했으나 소정의 임무를 완료한 이후 각 단체의 선명하고 단일한 전망을 공유하기에는 성숙하지 못했고, 여전히 투쟁성에서 급진적 주장이 나오기도 했고, 비가입단체를 포함하여 친소관계가 매우 유동적이었다"고 밝혔다.
또한 "소련과 동구권 몰락 등 영향으로 국내 문화운동권 전체가 힘을 잃어가고 있었던 사정도 한몫했다"면서 "선배세대를 포함한 지도그룹이 충무로로 진출하는 등 각자도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웰메이드 같은 성과주의적 경향이 내재화되면서 운동적 성격마저 점차 희미해진 것이 이유였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근본적으로는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대안이나 대책이 전무해 저절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1992년에는 민중문화운동연합(민문연)이 노동자문예운동연합(노문연)으로 바뀌고, 1992년 노문연에서 분리해서 나온 회원들이 '노동자 문예단체의 통합을 위한 문예모임(문예모임)'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들은 이후 12월 대통령선거 때 문예모임, 노동자뉴스제작단, 서울영상집단 장산곶매, 푸른영상, 노래모임 푸른물결 등은 민중후보로 나선 백기완 후보 홍보위원회 영상팀을 결성해서 한 달간 한시적인 연대 활동을 펴기도 했다.
하지만 연대 활동은 하나의 조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변방에서 중심으로>(서울영상집단. 1995)는 "1991년 소련 사회주의 붕괴 이후 가두 투쟁(거리시위)이 약해지고 재야단체 보다는 시민단체가 부상하는 등 민중운동의 기조가 변화하면서 민족예술인총연합 영화위원회(민영위)를 중심으로 단체 간의 정보교환 정도의 활동만 유지할 뿐이었다"고 전했다.
국내외 정세 변화 속에 단일대오를 갖추지 못했던 독립영화는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김동원을 매개로 조직적 정비를 다시 시작한 것이었다.
▲ <파업전야> 상영 현장에서 조영각. |
ⓒ 조영각 제공 |
한독협 설립 과정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조영각에 따르면 독립영화기구를 만들기 위한 준비모임은 이름을 '독립영화연대기구'로 정하고 당시 현안이었던 독립영화 심의 거부와 제작 지원 등의 문제에 공동대응을 모색하기로 했다.
여기서 조영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독립영화를 상징하는 활동가로서 독립영화의 대변인으로 불릴 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활동은 한국독립영화 성장에 큰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조영각은 스스로를 "독립영화 1.5세대"라고 말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영화운동을 이끈 1세대와 2000년대 이후 독립영화에 몸담은 2세대의 중간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전개된 한국독립영화 역사에서 김동원(감독)과 함께 상징성이 매우 크다.
영화주간지 <씨네21>(2006년 10월 17일)에 따르면 조영각은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영화를 좋아했고, 중학교 때는 TV에서 방영하는 한국영화를 잠 안 자고 볼 정도였다고 한다. "배창호 감독 영화는 미성년자 관람불가라도 극장에서 다 볼 정도였고, <고래사냥>은 별로였지만 <기쁜 우리 젊은날>은 그때 나의 어떤 로망이었다"고 말했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할리우드 키드냐? 나는 충무로 키드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만큼 한국영화 사랑이 특별했다.
또한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까지 EBS <시네마 천국>의 공동작가로 한국영화 부분을 맡았는데, 그때 먼지 쌓인 비디오들을 뒤져서 이만희, 신상옥, 하길종 등의 작품을 소개하고, 문화학교 서울에서 <한국영화 비상구> 책을 공동집필하게 된 것도 다 한국영화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1980년대 영화운동을 시작했던 영화인들이 한국영화에 대한 비판을 기반으로 해외 예술영화를 선호한 것에 비하면 다른 지점이었다
대학 진학 후 잊고 있던 영화감성을 일깨워준 것은 장산곶매가 제작한 <파업전야>였다. <파업전야> 상영을 지키기 위해 사수대에 섰던 조영각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아니,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야.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면서 지키고 있는 거잖아." 그래서 상영장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가 그 영화를 봤고, 그게 다시 영화와 영화운동을 이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파업전야>가 조영각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독립영화로 끌어들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었다.
조영각은 이후 문화학교 서울을 알게 됐고, 제3세계 영화나 아시아영화 등의 기획전을 처음 비디오로 접하면서 마음을 굳힌다. 그때 처음 본 영화인 헥터 바벤코감독의 <피쇼테>와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동년왕사>는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고 한다.
1995년 졸업할 즈음 대학생은 안 된다는 데도 우겨서 학생 자격으로 문화학교 서울 정식 직원이 된 것도 이런 열정이 바탕이 됐다. 학교 동기들에게 "나 취직했다. 연봉(!) 30(만원)이다"라고 말해 부러움(?)을 샀다고 전했다.
문화학교 서울 운영위원으로서 처음 했던 영화 소개는 데이비드 린치의 <이레이저 헤드>였는데, 데이비드 린치가 꿈에 나타나 "네가 한 해석 그거 다 틀린 거다"라고 하여 충격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독립영화 활동가의 길로 들어선 이후, 어릴 적부터 한국영화에 대한 사랑과 시네마테크에 대한 적극성이 독립영화 활동의 원동력이 된 것이었다.
조영각은 "장산곶매가 문화학교 서울에 와서 영화상영도 했다"며 "봉준호 감독의 <백색인>, 조근식 감독의 <발전소> 등도 볼 수 있었고, 그때쯤 인디포럼 준비에 참여하면서 독립영화하고 관련을 맺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문화학교 서울에서 관객과의 대화 마련하면서 독립영화 감독들과 많이 만났고, 이를 통해 류승완 감독의 초기작인 <변질헤드> <패싸움>을 묶어서 처음 상영할 수 있었다.
조영각은 "그냥 영화만 상영한 건 아니었다"며 "우리끼리 하드 트레이닝이라고 부르면서, 왜 우리가 영화를 상영해야 하는지, 어떤 이유가 있는지 토론하는 시간도 많이 가졌다"고 덧붙였다.
▲ 임창재 감독(왼쪽) |
ⓒ 임창재 제공 |
당시 실험영화 쪽에서 활동하고 있던 임창재(감독)는 "김동원(감독) 체포 소식이 전해진 후 문화학교 서울 조영각에게 연락이 왔고, 석방 이후 새로운 조직 구성 논의를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실험영화는 독립영화의 주된 흐름 중 하나였고 한독협 구성의 한 부분이었다. 임창재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은 한독협 설립 준비부터 시작해 2007년 한독협 3대 대표를 맡았고, 이명박 정권의 블랙리스트 탄압과 좌파척졀 공세가 이어지던 암흑의 시기 수구반동 세력의 탄압에 결연한 투쟁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임창재는 학생운동 출신이었다. 1983년 대학 입학해 1986년 단과대 학생회장을 맡았던 임창재는 전두환 군사독재에 의해 고문 살해당한 박종철 열사를 49재를 맞아 3월 3일 개최된 3.3 대행진에 참여해 거리시위를 하다 붙잡혀 구속된 전력도 있다.
동아일보는 1987년 3월 5일 자 기사에서 "검찰은 연행된 439명 중 시위 주동자 및 전력자 28명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키로 했다"고 보도했다. 임창재는 서울에서 구속영장이 신청된 22명에 포함돼 있었다.
민족영화연구소 이정하(전 영화평론가)가 대학 학과 선배이기도 했으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임창재는 "알고만 있었을 뿐 깊이 있게 이야기를 나눠보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임창재가 영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공교롭게도 수감 생활 과정에서였다. "경찰에 잡혀가니 학생회장 할 때 기록도 다 말해 줄 정도였다"며 "감옥에서 예술과 관련된 책을 봤고, 영화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작용했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취미가 있었고 연극과 문학을 좋아했고 연극부 활동 경험도 작용했다"고 덧붙였다.
1987년 5월 집행유예로 풀려난 임창재는 대학 졸업 후인 1988년 중앙대 대학원 진학했다. 이때 당시 서울YMCA 간사였던 이승정과 친분으로 청소년 활동에 자원봉사로 참여하면서 김동원(감독)과 연결된다. 당시 명동성당에서 상계동 철거민들이 천막을 치고 생활하던 때였다.
임창재는 "이승정 간사가 김동원(감독)을 소개했다"며 "명동성당 근처에서 만나서 인사했고, 상계동 천막에서 아이들과 놀아주자고 생각해 1주일의 대부분을 천막에서 숙식하며 지냈다"고 회상했다.
김동원은 "이현승(감독)이 YMCA를 도울 때였는데, 당시 이승정 간사가 1986년부터 상계동에 자주 왔었고, 이현승과 임창재도 YMCA 일을 도왔다"고 기억했다.
1990년대 이후 한국영화 중흥에 역할을 했던 이현승(감독)은 "1981년부터 청소년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영화아카데미 프로그램의 강의 등을 맡았다"며 "YMCA 활동에 참여한 것은 1980년 상황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1979년 유신독재자 박정희가 최후를 맞은 이후 민주화를 기대했던 서울의 봄은 전두환 군사독재의 5.17 쿠데타로 인해 깨지고 광주에서 피의 학살이 이뤄졌다. 이현승은 "이때 패배감에 사로잡혔고, 이 과정에서 빈민운동을 하던 제정구(작고, 전 국회의원)처럼 소규모 시민운동에 관심을 가졌는데, 작은 형의 설득으로 YMCA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YMCA에서의 역할에 대해 "당시 '리더'라고 불렸으나, 우리말로 청소년지도자로 표현했고, 임창재도 같은 역할이었다"고 덧붙였다.
▲ 노동자문화운동연합(노문연) 영화분과 '11월 13일' 회원들. 뒷줄 왼쪽부터 송호용 감독. 조민호 감독. 강미자 편집감독, 앞줄 오른쪽 김영덕 부천영화제 프로그래머. |
ⓒ 임창재 제공 |
임창재는 대학원 진학 전인 1987년 여름 신촌 우리마당에서 개최된 작은영화워크숍에 참여한 이후 1998년 민중문화운동연합에 합류해 있던 서울영상집단 그룹에서 활동한다. 민중문화운동연합(민문연)이 노동자문화운동연합(노문연)으로 개편되면서 서울영상집단 그룹은 노문연에서 분리를 선언하고 다시 서울영상집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임창재는 "노문연에 혼자 남게 됐다"면서 "당시 영화분과가 따로 없다 보니 음악보다는 공연 무대를 만드는 것이 주된 역할이었으나 동국대에서 개최된 것으로 기억하는 대규모 집회 때 영화와 같은 형식으로 슬라이드 영상을 만든 게 반응이 좋아 영화 매체의 힘을 실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1990년 임창재는 뒤늦게 군에 입대했고, 이후 노문연 영화분과가 생겨났다. 전태일의 열사의 분신한 날인 '11월 13일'이 분과 이름이었다. 회원은 최홍근, 조민호, 배효룡 등이었다.
1991년 단기 복무를 마치고 군에서 제대한 임창재는 실험영화를 추구했던 권중운(본명 권병순)이 이끌었던 세미나 등에 참여하면서 실험영화에 집중한다. 당시는 실험영화가 구체화된 시기였다. 서울대 미학과 강사였던 권중운(작고)은 실험영화와 전위영상의 연구,제작작업을 계속해온 국내 최초의 실험영화작가집단 뉴이미지그룹 대표였다.
임창재에 따르면 성북동과 수유리 등에서 1주일에 한 번 모였고, 정치 사회적 정세에 대한 시각보다는 영화를 탐구하는 쪽이었다. 이들은 1994년 4월26일~ 5월6일 동숭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개최한 제1회 발표회(실험영화제) "황홀한 비전:뉴미디어 영상의 미학" 행사를 시작으로 영화계 전면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실험영화 뉴이미지그룹 회원은 충무로 기획실 경험을 쌓은 최보근(전 화천공사 동아수출공사), 황인용(한국영화아카데미 3기) 황인태(전 전주영화제 사무국장), 배효룡(장선우 감독 연출부) 등이었다. 중년과 청년들이 섞여 있었고, 노문연 영화분과 '11월 13일' 회원들도 일부 참여하고 있었다.
임창재는 "1993년 노문연은 해산했으나 영화분과인 '11월 13일'이 명시적으로 해체는 없었고, 영화모임 형태로 계속돼 실험영화그룹으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실험영화 <WET DREAM>으로 1993년 캐나다 밴쿠버영화제에 초청됐던 김윤태(감독)도 이번에 뉴이미지그룹 공식결성에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1994년 처음 시작된 실험영화제는 1997년 3회까지 이어졌다. 주로 일본작품이 상영되고 국내 작품은 직접 제작됐는데, 이 시기 고대 영화동아리 돌빛에서 활동했던 박동현(명지대 교수. 실험영화페스티발 집행위원장)과 최두영 교수(세종대)도 핵심 회원이었다.
임창재는 "노문연에서 활동했던 강미자, 민경철 등이 합류했고 이후 실험영화연구소로 발전했으나 권중운의 갑작스런 타계로 인해 활동이 중단됐다"고 회상했다.
이후 임창재는 인디포럼에 집중했다. 1996년 문화학교 서울의 제안으로 1회 인디포럼에 16mm < Org > < Over me > 작품 상영이 계기가 됐다. 1998년 한국독립영화협회 결성 과정에서는 실험영화를 대표하게 된다.
▲ 한국독립영화협회 창립대회 안내문 |
ⓒ 김동원 제공 |
독립영화 연대기구는 단체에서 활동하던 사람들 중심으로 준비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노동자뉴스제작단에서 활동했던 태준식(감독), 문화학교 서울 조영각(프로듀서. 전 영진위 부위원장), 푸른영상 오정훈(감독), 서울영상집단의 이안숙(감독), A-TV의 이주영(프로듀서), 실험영화 임창재(감독) 등이었다. 태준식(감독)은 "독립영화연대기구에 참여한 것은 개인이 아닌 노동자뉴스제작단 차원에서였다"고 말했다.
1998년 1월 시작된 논의는 8개월 만에 결실을 보게 된다. 1998년 9월 18일 서울 낙원상가에 있던 허리우드 극장에서 마침내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출범한다. 전체 독립영화진영을 아우른 단일대오였다.
한독협에는 1997년 5월 결성된 전국씨네마떼끄연합에 속한 시네마테크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제작집단인 푸른영상, 영화제작소 청년, 젊은영화, 서울영상집단, 노동자뉴스제작단 등 독립영화 단체들의 참여도 적극적이었다. 개인적으로 활동하던 창작자들도 가입했다. 코아아트홀 시네마 라이브러리에서 활동했던 민동현(감독)은 <지우개 따먹기> 만드는 과정에서 도움을 받기 위해 한독협 회원으로 가입했다고 한다. 중앙위원회가 구성됐고, 김동원이 초대 대표, 조영각이 초대 사무국장을 홍수영이 사무차장을 맡았다.
조영각은 "강남의 한 후원자가 돕고 싶다고 해 삼성동에 사무실을 얻어 10개월 정도 사용했고, 사단법인 설립을 위해 초기 자금이 필요했을 때 김동원(감독)의 선배였던 당시 유니코리아 대표가 한독협 법인 설립을 위한 후원금으로 1천만 원을 지원했다"고 회상했다. 이후 한독협은 대우재단빌딩과 홍대 인근 등으로 사무실을 옮겨 다녔다.
1990년대 독립영화를 대표하는 단체로 인식됐던 독립영화협의회는 한독협 결성 과정에서 함께하지 않는다. 1990년 1월 독립영화의 연대단체로 결성된 후 꾸준히 독립영화 활동을 해 왔으나 한독협과 별개가 된 것은 지향하는 방향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낭희섭이 독립영화연대기구 논의과정에는 참여했으나, 한독협의 방향성에 대한 서로의 생각이 맞지 않았다.
낭희섭은 "독립영화협의회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넘기겠다고 했으나 한독협이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당시 독립영화협의회 낭희섭은 기존에 해오던 독립영화 보급(현재의 배급)과 워크숍을 새로 만들어지는 독립영화 단체가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새로운 독립영화 조직은 김동원의 연행을 계기로 준비가 시작된 것에 볼 수 있듯 워크숍이나 독립영화 배급을 지향하는 곳은 아니었다. 조영각은 "당시 한국독립영화협회는 검열 문제와 독립영화 제작 지원 등을 중심에 두고 있었다"고 말했다. 임창재는 "한독협에 대한 비젼과 조직관이 달랐다"며 "낭희섭이 원했던 방향은 차후 논의할 수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지향할 수 있는 목적이 아니었다"고 술회했다.
독립영화협의회의 경우 외형상 단체기는 해도 1992년 이후는 주로 독립영화워크숍에 집중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낭희섭 개인의 단체로 굳어져 있었다. 활동 방향 등을 결정하는 현안을 논의하는 조직을 갖추지 못했고, 워크숍 참가자 외에 회원 구성이 튼실한 것도 아니었다.
▲ 한독협 결성을 논의하던 1998년 7월 독립영화협의회가 보낸 제안서 |
ⓒ 성하훈 |
지금의 독립영화협의회는 진정한 독립영화 연대기구의 결성에 즈음하여 새로운 조직의 일정한 검증 과정없이 자체적으로 조직을 해체하면서 독립영화의 일정한 역할과 활동을 전망하는 신뢰에 의해 참여하는 개인과 단체들의 동등한 권리와 의무로서 명실상부한 대표적인 한국독립영화협회의 명칭으로 할 것을 제안한 것은 기억할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독립영화의 대의적인 조직에 의한 구성이 이뤄지면서 지속적으로 공언하여 왔었던 발전적인 해체와 함께 기존의 독립영화협의회가 지향하는 원칙과 사업의 내용을 신중하게 검토하며 새로운 독립영화 연대기구가 지향하고 담당할 역할을 인수인계로서 계승하며 독립영화의 대중적 신뢰를 대변할 수 있는 조직으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에서 새로운 독립영화 연대기구가 독립영화협의회로 흡수되는 것과 같은 인상을 갖고 있는 의혹에 대하여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민주적 참여와 의무에 의한 논의와 결정구조를 전제하였을 때 이 같은 우려는 단순한 기우에 불과할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아울러 기존의 독립영화협의회의 제반 사업이 주최라는 대표성보다는 주관의 역할로서 일관하여 왔었던 점을 중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같은 의미에서 결론적으로 독립영화 연대기구로서 대의적 조직이 결성되는 것을 환영하며 독립영화협의회의 발전적인 해체를 전제하여 지향하는 원칙과 사업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줄 것을 정식으로 제안드립니다.
그러나 독립영화협의회의 해체를 전제로 하는 제안에 대하여 독립영화 연대기구에 참여하는 전체적인 입장이 수용에 부정적이었을 때, 어쩔 수 없이 독립영화협의회는 존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독립영화 연대기구에 일부 회원의 참여에 의한 별개의 임의 단체로 활동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독립영화 연대기구의 방향성을 좌우할 발기인대회에서 독립영화협의회의 해체를 전제하는 제안을 보충 설명할 것이며 다시 한번 신중한 검토와 판단을 의뢰합니다.
핵심은 독립영화협의회 사업을 새로 만드는 독립영화 단체에서 이어가자는 주장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독립영화협의회 활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낭희섭은 "김동원이 개인적으로 참여하면 안 되겠냐고 묻기도 했다"며 "워크숍을 이어가지 못한다면 한독협에 내가 함께할 수 있는 의미가 없었다"고 말했다.
또한 "초대 감사 제안을 받은 후 몇몇 독립영화인들이 왜 그런 역할을 받냐고 전해와 고민했으나 최종 수락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명하겠다는 말이 나와 함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독립영화협의회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한독협 내부의 지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준식은 "낭희섭 형이 더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했다가 감사 제안을 받고 실망한 부분도 있었다"며 "감사를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독립영화협의회를 유지하는 상태에서 가입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다"고 기억했다. 이어 "낭희섭이 한독협 결성을 위한 논의과정에서 융합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임창재도 "낭희섭이 혼자 같은 주장을 반복하니 다들 답답해했고, 서로 안 맞다 보니 감정이 쌓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조영각은 "처음부터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서 "개인적으로 가입해 운영위원 등으로 참여하는 것은 가능했으나, 독립영화협의회와 같이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 2015년 발간된 <독립영화 워크숍, 그 30년을 말하다> |
ⓒ 목선재 제공 |
낭희섭은 1989년 장산곶매 <오! 꿈의 나라> 전국 상영을 위한 보급(현 배급)을 담당한 이후 독립영화 정기발표회, 독립영화기금 마련, 비디오나 16mm 영상물 보급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특히 1990년대 들어서는 독립영화워크숍에 공을 들였기에 '독립영화협의회=독립영화워크숍'이었다. 긴 시간 하던 일에 대한 애착이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당면한 독립영화 현안보다는 교육적인 사업을 중심으로 생각하다 보니 다양한 형태의 개인과 단체가 결합한 독립영화 진영을 아우르고 주도하기에는 역량이나 신뢰도가 받쳐주지 못했다. 한독협을 준비하던 다수의 방향과는 절충이 어려웠던 이유다. 오랜 시간 독립영화 활동에 몸담았고 해도, 책임 있는 역할로 대중성 있는 독립영화 조직을 이끌기에는 한계가 있던 것이다.
김동원은 "처음에는 독립영화협의회 사무실이 있었기에 거기를 사용하면서 한독협 준비 작업을 하는 좋을 것으로 생각했다"며 "한독협이 출범하는 과정에서 어떻게든 낭희섭을 안고 가야 하지 않았었나 싶다"고 옛일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각자 길을 간 것이 서로에게 유익이었다. 독립영화협의회는 이후 독립영화워크숍을 중심으로 독립영화상영회 등을 진행하며 수십 년간 이어온다, 낭희섭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주도하면서 꿋꿋하게 외길을 걸은 것이다.
독립영화워크숍은 영화에 뛰어들 수 있는 문턱을 낮춘 것이기에 영화를 배워보고 싶은 청년들에게 좋은 기회였다. 독립영화워크숍 5기 강혜정(제작자. 외유내강 대표)은 여성영화인모임이 펴낸 책 <영화하는 여자들>(사계절 출판사. 2020)에서 "대학 졸업 후 뭘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에 대한극장 앞으로 지나다가 "아무나 영화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영화를 만들지 못한다는 독립영화협의회 공고를 보고 참가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독립영화워크숍이 굉장히 훌륭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는 게 낭희섭 대표가 민주적인 의사 결정을 바탕으로 모든 성원이 영화의 전 과정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고, 당시에는 가장 성실하게 출석하는 사람에게 대표 연출을 맡겼다"며 "그래서 연출을 하게 됐으나 2개월간 연출을 하면서 '연출은 진짜 큰일 나는 일이구나'를 뼈저리게 느꼈다"고 회상했다. 독립영화워크숍 3기였던 류승완 감독은 당시 조교였다고 한다.
독립영화워크숍에서 처음 만난 류승완 강혜정 부부는 단편 <현대인>으로 1999년 한국독립단편영화제(서울독립영화제 전신) 극영화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들 외에 이송희일(감독), 박종필(작고. 감독), 임필성(감독) 등도 독립영화워크숍을 거쳤고, 이들은 독립영화 성장에 역할을 했고, 이후 한독협에 가입해 활동하게 된다.
송낙원(영화평론가. 건국대 교수)은 "1993년 독립영화워크숍 4기로 참가해 이지상(감독. <둘 하나 섹스>) 등과 함께 수업을 들었고, 중간에 한국영화아카데미 10기로 입학했다"며 "1995년 7월 강원도 낙산해수욕장에서 열린 1회 낙산독립영화제에 낭희섭 대표와 함께 운영진으로 참여했다"고 말했다. 낙산독립영화제는 1일 영화워크샵과 영화캠프, 독립영화제를 결합한 행사였으나, 인력부족 등으로 일회성 행사로 끝났다고 한다.
1989년 건국대 영화동아리 햇살에서 활동했던 송낙원은 "1991년 신촌 우리마당에서 이정국(감독. 세종대 교수)가 지도한 워크샵에 참여했고, 1992년에는 황인용(한국영화아카데미 3기)이 개설하고 조혜정(중앙대 교수)이 이론지도를 한 서울필름아카데미에서 단편영화를 제작했다"고 기억했다.
송낙원은 1993년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졸업작품 <커피 석잔>을 연출했으며, 1996년 제작한 <표지판>(35mm, 11분)은 그해 금관청소년영화제(서울독립영화제 전신)에서 장려상을 수상했고, 2회 인디포럼에서도 상영됐다.
독립영화워크숍은 1980년~1990년대 영화운동의 주역들 상당수가 강사로 참여해 수강생들을 지도했을만큼 젊은 독립영화인들을 육성해낸 공간이었다.
강사로 참여한 영화인들은 공수창 김경욱 김기종 김대현 김동원 김명곤 김명준 김성숙 김성환 김소영 김시우 김영진 김용균 김우형 김재호 김지석, 김진한 김현일 김형구 김혜준 김홍국 김홍숙 김희원 남인영 남재봉 문원립 문혜주 박광수 박정현 박종우 박현원 봉준호 임필성 엄경환 유인택 윤석일 이경하 이광모 이두만 이상모 이상인 이송희일 이은 이연수 이영호 이재구 이정국 이정하 이주협 이현승 이형주 이효인 장동홍 장윤현 정성일 정지영 정지우 정 훈 조재흥 최용배 편장완 함순호 홍기선 홍형숙 황규덕 등 모두 65인이었다.
"독립영화, 아니 세상 모든 영화작업의 초석은, 영화 만들기가 말할 것도 없고 영화 사유에 대한 기초를 다지는 것이며, 그 기초를 구체적 결과물로 빚어낼 인재를 키워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독립영화협의회는 실천을 우선시하면서도, 그 실천의 토대를 이루는 이론적 성찰과 자극을 제공하기를 소홀히 하지 않음으로써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기념비적 성취를 일궈왔다."
한국영화운동 성과
▲ 1999년 4회 부산영화제 기간에 열린 부산독립영화협회 창립대회 이후 독립영화 파티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는 김동호 당시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오른쪽 김지석 프로그래머 |
ⓒ 부산독립영화협회 제공 |
한독협의 출범은 이후 지역 독립영화협회 결성으로 이어지면서 전국적 연대망을 구축한다. 서울에 이어 지역의 영화운동이 조직화에 들어가 1999년 부산독립영화협회, 2000년 대구독립영화협회, 2001년 대전독립영화협회가 잇따른다.
2000년 8월에는 대구독협 사무국장이었던 원승환(인디스페이스 대표)이 한독협으로 옮겨온다. 조영각은 "책도 만들고 배급 지원사업에 더해 이미 맡고 있던 인디포럼 등 일이 많아지다 보니 사람이 필요해 원승환에게 제안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한독협은 1999년 영화진흥공사가 영화진흥위원회가 바뀌는 과정에서 위원 후보로 거론되는 충무로 원로들을 공개적으로 지목해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원로영화인들이 반발하면서 한바탕 파란이 일었으나, 충무로 구체제와 대립하던 상황에서 적극적인 의사 표현과 소신 있는 행동을 주저하지 않았다.
2001년 안티조선 영화인선언과 2004년 영화인 605인의 이라크 파병반대 영화성명 등도 한독협이 앞장선 것이었다. 2001년 안티조선 영화인선언을 주도했던 "시기가 마침 미국에서 9.11 사건이 발생한 직후였다"며 "경찰에서 취소하냐는 전화가 왔으나 다음날인 9월 12일 강행했다"고 말했다.
한독협 사무국장으로 왕성한 활동력을 보이던 조영각은 일명 '반쓰봉 사건'으로 영화계에 각인되기도 했다. 2000년 표현의 자유에 관한 공청회가 열렸을 때 반바지에 샌들 차림으로 참석했던 조영각을 향해 정진우 감독은 "공청회에 '반쓰봉'을 입고 오다니..."라고 못마땅한 반응을 보인 것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이다.
조영각은 "사실 무대 올라가는지 몰랐고, 당시 독립예술제를 하고 있어 매일 비오고 그래서 반바지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며. 왜 옷차림 갖고 그러느냐 그 자리에서 세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참았다"고 회상했다. 그 이후로 영화계에선 반바지와 샌들 차림이 유행처럼 번졌다.
한독협이 결성되면서 24년 동안 한국청소년영화제로 시작해 금관단편영화제 등 여러 이름으로 개최됐던 한국청소년단편영화제(서울독립영화제)는 1999년부터는 한국독립단편영화제로 이름을 바꿔 한독협과 영진위의 공동 주최로 개최되기 시작했다.
조영각은 "1999년 이효인(경희대 교수)가 집행위원장을 맡은 이후 강한섭 교수와 함께 예심을 담당했다"며 "영진위가 사무국 역할을 맡아 신다영 이상석 등 직원들이 실무담당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효인이 2002년 그만두면서 그해 이름이 바뀐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자연스럽게 맡게 됐다"며 "한독협 준비부터 5년 정도 사무국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이를 정리하려고 생각하다가 서울독립영화제를 맡은 이후 지금의 틀을 갖추게 됐다"고 덧붙였다.
조영각은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기 전인 2002년 당시 최연소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죽어도 좋아>의 제한상영가 등급을 이유로 중도 사퇴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독립영화인의 결기와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 맹수진 평론가 |
ⓒ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제공 |
한독협이 결성된 이후 199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이들이 하나둘 영화운동에 결합했다. 2000년대 이후 보수 정권 시절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맹수진(영화평론가. 전 전주영화제 프로그래머)이 대표적이다.
맹수진은 "1990년대 초반 학생운동 과정에서 경찰에 검거됐다가 석방됐다"며 "졸업 후 비합 조직 활동을 이어가다 위험징후가 있어 집을 나와 피신한 적도 있었고, 조직 활동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건강이 안 좋아져 영화로 방향을 정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몸이 안 좋다보니 할 수 있는 것이, 책 읽고 영화 보고 글 쓰는 것뿐이었다는 것이다. 1997년 대학원에 진학해 영화를 전공한 후 2002년부터 한독협에 가입해 활동했고 20007년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을 맡기도 했다.
맹수진은 "강혜정(외유내강 대표)과 대학 동기로 같이 학생운동을 한 사이였다"며 "학과는 달랐으나 같은 단과대학에 있었기에 학내 시위나 집회 현장에서 자주 마주쳤는데,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이었을 때 다시 만났다"고 말했다. 이어 "애가 둘이라는 이야기를 얼핏 듣기는 했으나 처음에는 동명이인으로 생각했었는데, 오랜만에 재회한 순간 서로 너무 반가웠다"고 덧붙였다.
1980년대 시작된 한국 영화운동은 온갖 어려움을 뚫고 1996년 부산영화제와 1998년 한독협 결성, 1999년 영화인회의 등으로 이어지며 강고한 연대체를 구축한다. 20년 영화운동이 이뤄낸 소중한 성과물이었다.
검열과 맞서며 정치적 외압을 거부했고, 표현의 자유 확대와 외국영화에 맞서 한국영화 사수를 위해 투쟁에 온몸을 내던졌다. 이는 1990년대 후반 시작된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이어가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한국영화의 중심에 우뚝 선다. 1980년을 전후로 한 시기 한국영화의 변화와 영화를 통한 사회변혁을 원했던 젊은 영화인들의 꿈과 열정이 마침내 충무로를 주도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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