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교수의 연극이야기]김수미 작 <스카프와 나이프> “상실의 위로와 치유”
<부러진 날개>(1997)로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 김수미는 <나는 꽃이 싫다>,<인생 오후 그리고 꿈>,<좋은 이웃>,<잔치>, <고래가 산다>,< 태풍이 온다>,<장미를 삼키다>,<리어, 길을 잃다>,<타클라 마칸> 등 초연작품 42편을 포함해 50여 편의 희곡 쓰기를 멈추지 않고 달려오고 있다. 때로는 부채의 역사와 인간의 깊은 심연과 현실의 부조리함을 희곡으로 마주하게 하기도 하고 삶으로 엉켜있는 다양한 인물들을 그려내고 소환해 사회현상의 빛과 어둠의 그늘로 담아내며 무대로 펼쳐온 김수미 작가의 소재는 방대하다. 이번 <스카프와 나이프>(공연배달 탄탄, 주애리 연출, 물빛극장)는 작가의 신작 초연으로 두 여자가 상실(喪失)의 내면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상실과 고독, 우울과 외로움은 섬광처럼 내면으로 박혀 심장과 살갗을 도려낼 것 같은 칼날로 다가오기도 한다. 특정한 과거 시간은 지워져야 할 삶과 인생이면서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기억의 시간이다.
연극 <스카프와 나이프>을 보는 내내 지난해 가수 전인권 씨가 인천공항을 배회한다는 기사가 스쳐 갔다. ‘의자에 앉아 오랜 시간 멍하니 있곤 한다’ ‘말을 걸어 보면 발리나 자카르타에 간다고 하는데 언급한 비행기가 없거나 실제로 비행기를 타지도 않는다’ ‘배우를 기다린다더라’ 등의 내용들로 ‘건강 이상설’이 제기된 적도 있었다. 그 후 전인권 씨는 “그때는 사연이 있었다. 이 이야기에 대해 자세히 하고 싶지는 않다”라는 말로 진화했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수는 상실로 오는 통증을 특정한 기억의 공간으로부터 치유 받고자 했던 것 같다. 이번 연극도 아픈 상처를 품고 덜어내는 두 배우의 연기는 이질적이면서도 인생의 자국들을 클래식처럼 들려주고 무대는 전인권 씨가 배회한 공간처럼 공항 출입국장이다. ‘스카프’를 매고 홀로 공항 출국장 게이트에서 죽음으로 돌아올 수 없는 막내아들을 기다리는 김화영 배우가 분하는 극중 인물의 호칭이고 가방에 큼지막한 나이프(칼)를 넣고 다니며 남편과 지난 시간으로부터 악착같이 살아왔으면서도 남편의 외도로 인생을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여자, 나이프는 배우 장연익이 극중 인물로 분하고 있다.
상실의 위로와 치유의 방법
나이프는 남편으로부터 패인 상실의 상처만큼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도 아들의 전화와 외도한 남편의 귀국을 기다리며 때로는 나이프(칼)를 꺼내 들며 너덜너덜해지고 찢긴 상처만큼 남편을 향한 복수의 분노를 들어내기도 한다. 무대는 목적지만큼 떠나고 기다려지는 교차적인 시간으로 연속되는 공항 터미널이다. 출국과 귀국 사이 여행의 시간이 교차하고 이동되는 장소에는 상실과 치유, 삶과 죽음, 일상과 행복으로 쌓이고 잊히는 무게만큼 무대는 좌우로 수북하게 쌓여 있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여행 캐리어들이 보인다. 그 사이에 일자형 철재 대기석 의자가 놓여있다. 스카프는 공항에서 매일 같이 자신의 캐리어를 찾는다. “찾을 수 없다. 처음부터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일까? 누군가 가지고 간 것일까?(중략) 시간이 묻어있는 물건에는 기억이 산다. 오래된 시간은 기억이라는 책장에서 추억을 꺼내기도 한다. 오래된 영화가 추억을 달고 오는 것처럼. 오래된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건 시간을 버리지 못하는 거다” 캐리어는 스카프의 기억으로부터 소멸하지 않는 존재의 시간이며 시간을 되돌려 머물러 있어야 될 아픈 인생의 시간이다. 공항 터미널에서 반복되는 기다림은 죽음으로부터 돌아올 수 없는 아들을 향한 모성애이기도 하고, 죽음으로부터 소멸한 시간을 회복하고 싶어 하는 집착의 욕망을 캐리어를 통해 보이기도 한다. 큰애를 낳고 5년 만에 얻은 아이는 여전히 미국 아이비리그를 졸업해 성공하고 돌아와야 할 시간으로부터 부재해 있으면서도 스카프의 내면으로부터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존재의 시간이다.
스카프의 기다림은 때로는 나이프의 캐리어가 자신의 것으로 느껴질 만큼, 정신적인 분열과 집착으로 나타나면서도 두 인물은 시간으로부터 도려낼 수 없는 아픔과 상실을 마주한다. 스카프는 기다림으로, 나이프는 남편으로 부터 손상된 통증으로 치유의 마음을 떠나면서도 ‘삶이 덕지덕지 묻은 캐리어 가방’은 찾을 수 없는, 기억으로만 쌓여가는 삶의 아픔과 행복들이 너덜너덜하게 붙어가는 시간들이면서도 치유하고 회복해 온전한 인간의 내면으로 되돌아가야 될 시간들이다. 나이프한테 결혼행진곡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이면서도 이혼서류를 던져 놓고 다른 여자랑 여행을 떠나고 돌아오는 남자를 기다린다. 그사이 뉴욕, 일본, 터키, 캐나다, 네팔, 호주로 떠나고 돌아오는 안내방송들이 흘러나와도 ‘욕망의 감옥에서 벗어나 걸을 수 있게 하는 히말라야’로도 두 사람한테는 용기를 내서 떠나지 못하고 아픈 통증을 마주하며 공항터미널에서 누군가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상실의 시간들을 보낸다.
캐리어만큼 쌓여있는 두 인물의 아픔과 통증, 상실의 시간을 치유하는 것은 남편도, 부재(不在)한 아들도 아닌 아픔의 시간을 두 사람이 꺼내 놓는 지난 시간의 대화다. 시시콜콜한 남편과 아들 얘기며, 갱년기 이야기, 나이프가 악착같이 살아온 학습지 교사, 보험설계사, 카드 상담원 시절과 위자료 이야기가 쏟아지고 두 인물의 마음이 다가설수록 약물 과다복용 심장마비로 죽은 스카프의 아들 이야기가 쏟아지면서 상처의 두 사람이 견뎌 낼 수 없는 캐리어의 무게와 부피는 덜어내어진다. 스카프가 튼 캘리클락슨(Kelly Clarkson)의 당신 때문에(Because of You)의 노랫말처럼 “난 당신이 한 것 같은 실수는 저지르지 않을거예요. 내 자신을 내버려 두지 않겠어요. 왜냐면 이미 내 마음은 상처받았거든요” 인생의 잃어버린 시간을 복원하고 피투성이로 혈전 된 내면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공감의 위로이다.
이들에게 걸려 온 전화로 사랑한다는 나이프 아들, 엄마를 기다리는 스카프의 큰아들처럼 사랑과 기다림은 가방 속 나이프를 버릴 수밖에 없는 위로이면서도 균열되고 손상된 과거 시간은 여전히 삭제되거나 치유되지 못한 기억의 무게로 버릴 수 없는 시간이 묻어 있는 물건(캐리어)들이며 소멸하지 않는 시간으로 머물러 있어야 기억들이다. 스카프의 첫 장면으로 돌아간 나이프의 마지막 장면처럼, 여전히 그 기억의 공간과 장소, 물건으로부터 배회하는 것이며 두 사람은 오늘도 공항을 배회하며 잃어버린 기억, 버릴 수 없는 시간을 찾으며 상실의 통증을 위로받고자 한다. 누군가 이 인물들처럼 기억과 시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욕망의 감옥에서 벗어나 걸을 수 있게 하는 히말라야’로 출국장 안내방송으로 들려오는 세계(世界)로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연출은 여행 캐리어를 작품 공간의 오브제로 쓰고 있는데, 캐리어는 시간을 버릴 수 없는 두 인물의 삶과 아픈 통증들의 무게들이고, 그 무개만큼 무대로 쌓여있는 캐리어들에 들어 있는 물건들은 기억으로부터 소멸되지 않는 시간의 부피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묻어있는 캐리어는 잃어버릴 수도, 찾을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삶과 욕망, 집착으로 나타나며 상실은 치유되지 못한 채로 그 기억의 시간으로부터 배회하게 된다. 두 인물의 캐리어가 다르면서도 같은 것은 죽음과 삶, 남편의 외도와 인생의 통증에서 오는 기억과 상실의 내면은 극중 인물 스카프와 나이프가 버릴 수 없는 시간이면서도 우리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에서 두 인물의 이야기를 캐리어로 은유하고 인물의 내면들이 달라지는 변화에 따라 여행 캐리어로 공간을 배치하고 활용한 것이 적절했다. 특히 2인극의 특성상 배우들의 연기와 그 연기가 삶과 인생의 통증들로 모아질 수 있도록 하는 희곡의 대사들이 때로는 한 편의 시와 시극처럼, 일상의 삶과 언어를 이동하며 ‘시간을 버릴 수 없는 삶과 인생의 통증’들을 담아내고 있는 <스카프와 나이프>의 사연들은 그만큼 희곡의 멜로디가 좋다. 무대에서 연주하는 김화영, 장연익 두 배우는 극중 인물의 기억을 버릴 수 없는 각자의 시간만큼 다르면서도 그 상실의 아픔을 공감시키는 연기로 수북한 캐리어에 담긴 삶과 상실의 무게들을 보여주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두 인물의 삶과 상실의 무게가 대화를 통한 공감으로 치유되는 시간에서 캐리어들의 배치와 변화가 인물의 내면을 더 넓게 확장했다면 어땠을까.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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