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욱 칼럼] 정치 참 쉽게 한다
실망한 지지자 등 돌렸는데
지지층 결집해 위기 넘기려는
윤석열 정권 안타까워
대통령 지지율 40% 넘었지만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다
“합리적이고 온화했던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더니 극단적 발언을 쏟아내는 속내를 알 수 없었다. 터무니 없는 억지를 부린 날 잠들기 전 이불 속에서 얼마나 부끄러울지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팬덤이 원하는 말을 했을 뿐이었다.” 며칠 전 송년회에서 만난 한 친구의 말이다. 학생운동에 나름 열심이었고, 졸업 후 공무원이 돼 집 한 채 마련하고 자녀를 교육시킨 50대다. 정치를 화제로 꺼내지 않기로 약속한 모임에서 나온 규칙 위반성 발언이었다. 그런데 “좋아했던 민주당이 어쩌다 이렇게 됐냐”라고 말을 꺼내서 한번 들어보기로 했다. 개인의 정치적 취향을 밝힌, 대수롭지 않은 말을 계기로 오랜만에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게 1980년대 대학을 함께 다닌 우리가 나눠 가진 정서였다. 고향이 YS와 DJ를 갈랐지만 큰 차이는 없었다. 정치의 잘잘못을 판단하는 기준의 중심에 민주화가 있었다. 민주주의는 늘 미완이었기에 가는 길이 다르지 않았다. 20대 때는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게 최선이었고, 30대에는 정권교체를 꼭 보고 싶었다. 40세가 넘어서는 정치 기득권자를 몰아내자는 데 동의했다. 그때부터 지지하는 정당은 갈렸다. 누구는 상도동·동교동을 대체할 386에 환호했고, 누구는 산업화 계승자들의 능력과 효용성에 주목했다. 중년의 가장으로 일에 파묻혀 살았지만 늘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바뀐 건 2019년 겨울이었다. 서초동·광화문 집회를 놓고 다투던 우리는 ‘조국’ 한마디에 1만원씩 내놓는 방법으로 정치 이야기를 봉인했다.
송년회에서 성향을 잠시 드러냈던 친구들은 헤어질 때 더는 정치 이야기를 안 하기로 약속했다. 지향점 없이 권력의 유무와 크기만 따지는 지금의 정치에서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혐오가 담긴 자극적인 말로 강성 지지자를 모으고, 프레임을 조작해 상대를 악마화하는 현실 정치는 아예 무시하자는 공감대가 생겼다. 조국 사태 이후 더불어민주당에 실망한 건 결국 그 때문이었다. 혹시나 했다가 다시 실망하는 게 반복되니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아무리 외쳐도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됐다. 또 어디에 먹을 게 생겨 저렇게 목청을 돋우지 싶었다. 생각해보면 “좋아했던 민주당”이라며 운을 뗐던 친구가 주목을 받은 건 “아직?”이라는 의아함 때문이었다.
이제 윤석열 정권에 실망할 차례다. 추석 이후 연말까지 여권은 가출한 토끼를 다시 집으로 불러오는 방법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에 입당해 선거를 치렀지만 정치적 빚이 없으니 굳이 진영 논리에 빠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지지층만 바라보며 간다는 ‘집토끼 노선’은 지난 9월 유엔 총회에서의 비속어 논란 직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윤핵관의 2선 후퇴 선언이 8월 31일이었으니 3주 만의 반전이었다. 윤 대통령의 지지율이 심각한 위기 수준으로 떨어지자 정치권에는 싸늘한 냉기가 돌았다. 검찰과 감사원의 움직임은 덩달아 빨라졌다. 박진 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 국회 통과, 윤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 보이콧은 강경론자에게 힘을 실어줬다.
그러던 중 이태원 참사가 터졌다. 정권 차원의 위기는 곧바로 진영 강화로 귀결됐다. 윤 대통령이 관저에서 권성동·장제원·윤한홍·이철규 의원과 만찬을 한 것이 지난달 22일이었다. ‘총선까지 기존 지지자를 바라보며 강하게 간다. 중도층은 개혁의 성과로 품는다’는 노선이 정립된 건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제 나온 여론조사에서 윤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이 6개월 만에 40% 선을 넘었으니 1단계 작전은 성공했다. 하지만 아직은 거기까지다. 최대 성과라고 홍보했던 도어스테핑은 중단됐고, 국회는 최악이다. 150명이 넘는 젊은이가 숨진 이태원 참사를 별거 아니라고 우긴다. 소통·공감 능력에 의문 부호가 자꾸 붙는다. 지지층을 모으려면 그들이 좋아할 말과 행동을 앞세워야 한다. 상황이 나빠질수록 강성 지지층을 향한다. 극단적이어도, 터무니없는 억지여도 상관없다. 하지만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다. 평범한 50대인 내 친구는 좋아했던 민주당을 더이상 지지하지 않겠다고 고백했다. 윤 대통령이 받은 48.56% 중에서 돌아오지 않을 산토끼는 얼마나 될까. 어차피 대안이 없으니 괜찮다고? 기표소에 들어가면 또 마음이 바뀔 것이라고? 정치 참 쉽게 한다.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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