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몸에 대한 예의
해마다 종합건강검진 안내를 받을 때가 오면, 한 해가 다 갔구나 새삼 실감한다. 검진일 전날 새벽엔 눈이 절로 떠져 벌떡 일어나 달리기도 하고, 점심엔 유기농 샐러드를 먹고, 저녁에 회사 앞 치킨집에서 맥주 한잔하러 가자는 솔깃한 제안도 거절하고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다. 마치 시험을 앞두고 벼락치기를 하는 심정이지만 너무 늦었다. 올 한 해 동안 내 몸을 생각이나 한 적이 있었나. 바쁘다고 끼니를 거르는 일은 다반사, 스트레스받는다며 술을 들이부었으며, 춥다는 핑계로 달리기를 거른 지도 한참이다. 마음 변한 연인에게 ‘앞으로 잘할게’란 말이 얼마나 초라하고 부질없는 변명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 또다시 생각한다. ‘검진받고 앞으로 진짜 몸부터 챙겨야지’.
아침 일찍 도착한 병원에는 사전 검진표를 손에 들고 접수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비장한 마음으로 가운을 갈아입고 기초검사부터 시작한다. 시력 검사표 앞에서 오른쪽 눈을 가리니 글자가 겹쳐 보이고 뿌옇다. 그래도 숫자는 분간이 될 지경이어서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는데, “양쪽 모두 1.0입니다”라는 간호사 목소리가 경쾌하게 울린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가, 시험을 보고 나면 꼭 1등부터 꼴찌까지 차례대로 불러 세우는 선생님을 미워했는데, 마치 내가 1등으로 이름을 불린 것처럼 우쭐해져서 자리에 돌아와 다음 검사를 기다린다.
이젠 건강검진에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엑스레이 찍고 초음파 검사를 위해 침대에 누울 때마다 두근거리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이런, 유감입니다’라며 난처해하는 의사 얼굴이 등장하는 온갖 의학 드라마를 떠올린다. 이리저리 검사실을 옮겨 다니며 심장, 갑상샘, 가슴, 위, 자궁 등 평소에는 잊고 있던 기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인식하며 새삼 내 몸을 생각한다. 이 모든 기관이 열심히 제자리에서 묵묵히 역할을 해줘서 회사도 다니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공부도 했다. 다행히 혈압도 정상이라 하고, 키는 줄어들지 않았으며, 몸무게도 8년째 동결이다. 한 해 동안 수고했다. 참으로 감사한다.
이제 마지막 관문이 남았다. 수면 위내시경. 침대에 어정쩡하게 옆으로 쪼그리고 누워 간호사가 입에 물려주는 마우스피스의 이질감을 느끼는 순간, “이제 주무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블랙아웃. “괜찮으세요?” 커튼을 젖히며 묻는 간호사 목소리에 잠이 깬다. 그 다정한 목소리에 마음이 놓인다. 벌써 몇백 명에게 몇백 번 하는 같은 말이겠지만, 나는 간호사 목소리에서 그래도 하루의 피곤함과 짜증을 표시 내려 하지 않고, 다정한 안부를 건네려는 노력을 발견하고는 뭉클해진다. “술 많이 드시죠? 술 많이 먹는다고 위가 다 말해줘요. 술 좀 줄이세요.”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거리고 일어나니 그제야 허기가 확 밀려온다. 벌써 12시간째 공복이다. 병원 매점 아주머니가 건네주는 따뜻한 호박죽 한 그릇을 받는다. 그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새삼스럽게 미각을 깨운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몸을 혹사하거나 혹은 혐오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몸은 심각한 무질서와 괴로움의 장소가 돼 버린 지 오래다. 고(故)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를 상담했던 정신분석가로 유명한 수지 오바크는 ‘몸에 갇힌 사람들’에서 이렇게 말한다. “몸을 우리가 달성해야 할 열망이 아니라 우리가 깃들여 사는 장소로 바꿔야 한다.”
과도한 업무나 스트레스로 건강을 잃고 난 몸이나, 대중문화가 강요하는 만들어진 몸 모두 우리가 깃들여 사는 장소는 아니다. 주 52시간에서 69시간까지 허용한다는 노동시간 개편안에 한숨이 나고, 누군가의 보디프로필 사진을 부러워한다. 우리 몸에 쏟아지는 역사상 유례없는 공격들을 막아 내기 쉽지 않지만, 육체적 기능과 정신적 쉼이 동반되는 ‘충분히 안정된 몸’이야말로 내 인생의 행복과 모험의 순간을 함께 맞이하는 동반자가 될 것이다. 1년에 한 번뿐이지만 종합검진을 받으며 새삼 몸을 생각하는 것도 몸에 대한 작은 예의가 아닐까. 호박죽 한 그릇을 다 먹고 일어나면서 생각한다. “그런데, 새해에 술을 줄여야 하나?” 아직 멀었다. 난.
최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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