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의 시시각각] 어느 TV 드라마의 인기
현실 탈출, 카타르시스 MZ 열광
기업가에 대해 달라진 시선 읽혀
‘회빙환(回憑還)’이라는 말이 있다. ‘회귀ㆍ빙의ㆍ환생’이라는, 웹소설의 흥행 공식이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거나, 다른 사람의 몸에 깃들거나, 환생해서 복수하는 이야기다. 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다는 ‘이생망’ 정서 속에서, 상상을 통해서나마 리셋하고 ‘제2의 인생’을 살아보고픈 대중의 열망을 반영한다. 마치 롤플레잉게임처럼 인생 2회차를 살게 된 주인공은 능력자가 되어 척척 문제를 해결해 나가며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수년간 웹소설에 일반화된 이 공식은 최근 리메이크 바람을 타고 TV 드라마로 옮겨왔다.
동명 웹소설이 원작인 JTBC 인기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도 그중 하나다. 재벌가 오너의 비서로 일하다 비자금 업무 중 살해당한 윤현우(송중기 분)가 재벌집 막냇손자 진도준(송중기 분)으로 다시 태어나 복수에 나서는 얘기다. 지난 18일 14회 시청률은 25%에 육박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등 올해 지상파와 유료방송 모든 드라마 중 최고 시청률이다. 1987년 민주화 시점부터 시작하는 이 드라마는 현실의 여러 기업(가)들을 떠올리게 하고 KAL기 납치 사건, 88 서울올림픽, IMF 외환위기, 2002 월드컵, 닷컴 버블, 카드대란 등 실제 역사적 사건들을 배경으로 활용해 ‘한눈에 보는 대한민국 경제사’ 같은 흥미가 있다. 한 20대 시청자는 “어렸을 때 일이라 잘 몰랐는데 카드대란으로 LG카드가 망했다는 걸 알게 됐다”며 흥미로워했다. 새로 태어난 진도준은 미래에 대한 정보를 무기로 투자의 귀재가 되고, 가족끼리 총구를 겨누는 후계 경쟁에 뛰어든다.
극 중 자수성가한 순양그룹 창업주 진양철 회장(이성민 분)은 드라마의 인기를 견인하는 중심인물이다. 대선후보들에게 고루 돈을 찔러주며 “전에는 내 주머니 돈을 노리는 놈이 군인 한 놈이었다면, 인자는 민간인 세 놈으로 는 게 민주화”라든지 “머슴을 키워가 등 따습고 배부르게 만들면 와 안 되는 줄 아나? 지가 주인인 줄 안다. 정리해고 별거 아니다. 누가 주인인지 똑똑히 알려주는 거”라고 말하는 냉혹한 자본가다. “제일 사랑하는 자식이 순양”인 그는 자신을 빼닮은 도준을 후계자로 점찍으면서도 도준이 가진 측은지심이 독이라고 경고한다. 입지전적 인물이자 나쁜 자본가의 전형이기도 한 진 회장에게 시청자들은 열광한다. 후반부 섬망에 시달리는 모습 등 인물에 입체적 깊이를 더하는 이성민의 탁월한 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의 무한 추구가 더는 악덕이 아닌 달라진 세태도 읽힌다. 순양에 대한 진양철의 사랑이 너무 지고지순 순정적이라 쉽게 단죄하기 힘든 측면도 있다.
“재벌에게 당한 도준이 그를 응징하기보다는 자기가 비판하던 재벌을 그대로 따라 하며 악행을 가린다”고 꼬집는 의견도 있지만, 재벌 비판 메시지보다 게임처럼 펼쳐지는 승계 전쟁 자체에 집중해 보는 시청자가 많다. 다음 주 2회를 남겨둔 이 드라마가 최종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던질지는 지켜볼 일이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두 장면이 있다. 회사 공금을 끌어 썼다가 날려버린 고모 진화영(김신록 분)에게 도준은 “고모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건, 딱 하나 고모가 순양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건 고모 능력이 아녜요. 행운이지. (창밖에서 시위하는)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행운”이라고 말한다. 지난주 14회 엔딩에서 도준은, 대리운전 투잡을 뛰면서 힘겹게 살아가는 현우를 떠올리며 “부를 상속받은 나, 가난을 대물림받은 너. 우린 같은 시간 같은 하늘 아래서도 다른 세계에 산다. 전생과 이번 생만큼이나 먼 궤도에서”라고 말한다. 태어나 보니 한쪽은 할아버지가 진양철 회장인 재벌 3세, 태어나 보니 한쪽은 아버지가 사채를 쓰는 흙수저. 그 선명한 대비를 가르는 것은 능력주의도 뭣도 아니고 ‘운’이었다. 그리고 요즘 흔히 하는 말대로 ‘이번 생은 망했고, 그렇다면 방법은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이 대목에서 드라마는 현실을 강력하게 소환한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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