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엘리자베스 여왕처럼 후회하지 않으려면...

장순심 2022. 12. 20.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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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 속 애버밴 참사, 우리와 꼭 닮았다

[장순심 기자]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대한불교 조계종 10.29이태원참사 희생자 추모 위령제(49재)’가 희생자들의 영정이 모셔진 가운데, 조계종 관계자들과 유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됐다.
ⓒ 권우성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49재 추모식이 지난 금요일(16일) 치러졌다. 참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고 책임을 지는 사람도 없고, 참사의 원인도 밝혀진 것이 없는 채로 시간은 어느새 많이 흘렀다. 하지만 희생자와 유가족의 시간은 참사 이후로 멈춘 듯하다.

아픔은 오롯이 유가족의 몫이 되었고 그 주변에서는 무수히 많은 책임 논쟁과 책임 회피, 책임 전가가 일어나고 있다. 내가 느끼는 이태원 참사의 장례 과정은 희생자와 가족이 철저히 가려진 의식 같았다. 광장에 설치된 분향소에는 슬픔마저 숨을 죽여야 하는 정적만 있었던 것 같다. 이제 49재를 맞아 추모제가 진행되며 비로소 희생자가 보이기 시작한 것 같고 유가족의 분노와 슬픔이 표출되는 것 같다. 

학교와 집 덮친 폐기물 더미, 사망자 144명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 시즌 3에는 1966년 웨일스 애버밴에서 일어난 붕괴사고가 나온다. 폐기물을 쌓아 놓은 봉우리가 무너지며 산사태를 일으켰고 계곡 마을에 있던 초등학교와 중학교, 인근 가옥이 파괴됐다. 이 사고로 144명이 사망했는데 어린아이 116명과 28명의 성인이었다. 

국가 석탄위원회장은 사고 당일 관련 사실을 보고받고도 국장급 인사와 수석 엔지니어를 파견하기만 하고 본인은 대학 총장 취임식에 참석했다. 임명식을 미룰 이유가 없다는 말과 함께. 사건 현장의 주민들과 유가족들이 비난하자 현장에 파견된 업체의 간부들은 구조활동을 지휘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늘어놓았고, 위원장은 사건 다음날 저녁에서야 현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사건 조사에 협력할 것이지만 사고의 책임은 전면적으로 회피하는 태도를 보인다. 지역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사고의 위험을 지적했지만 이를 외면했던 사업체와 석탄위원회는 단순 재해라고 주장한다. 

왕실에서는 빠른 대응이 필요하다며 대책을 논의하고 애도 성명을 발표한다. 그러나 영국 여왕은 군주로서의 책임감은 있지만 사고 현장을 방문하는 것은 계속 거부한다. '군주는 병원을 방문해, 사고 현장이 아니라.' 단호한 여왕의 말에 보좌진은 말을 덧붙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여왕은 유족들의 슬픔에 공감하지 못한다. 공감할 줄 모르는 지도자, 마치 우리 정치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마주하는 듯한 기시감이 들었다. 

사고를 접한 총리의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고가 난 후에야 사고의 원인에 대해 파악한다. 석탄 폐기물 산의 높이는 6m 이하여야 했지만 5배도 넘는 높이의 폐기물이 쌓여 있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된다. 참사가 정치와는 상관없다는 참모진의 말에 총리는 모든 일은 정치 문제라며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화살을 걱정한다. 

당시 정권을 잡은 집권당인 노동당의 대표인 총리는 참사로 인한 정치적 유불리를 빠르게 계산한다. 이어 지지자들로부터 자신들의 입지가 흔들릴까 걱정한다. 그는 바로 사고 현장을 찾고 언론 브리핑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난을 돌릴 방법을 찾고 참사로 인해 상대 당이 정치적 이익을 볼 것을 염려한다. 마침내 쥔 권력이 참사로 인해 흔들리면 안 되기에.  
총리 : 약속드립니다. 초고도의 독립적 조사를 실시하겠습니다. 필요한 모든 권한을 이번 조사와 관련된 모든 유관부서에 부여하겠습니다.
기자 : 관리가 소홀했나요? 전국석탄청의 책임입니까?
총리 : 제가 말씀드린 이외에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시민 : 한 발 늦으셨네요. 저 산들이 위험하다고 수년 전부터 말했어요. 불 보듯 뻔한 참사였는데 아무도 안 들어줬어요. 

총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딱 여기까지다. 시민들의 원망과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답변하지 못한다. 드라마에서는 왕실의 태도에 초점을 맞춘다. 여왕은 보도에 귀를 기울이며 사태를 주시하지만, 사태가 중하다며 현장에 방문하기를 권유하는 총리의 요청은 거듭 거부한다. 어디든 군주가 나타나면 주변을 마비시키고 한시가 바쁘게 일해야 하는 위급한 구조 현장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며. 

희생자를 위로해주라는 총리의 말에 '쇼를 하라'는 말이냐고 되묻는 여왕의 모습에서 공감능력이 없는 지도자가 국민을 절망하게 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공감할 수 없는 지도자의 최선은 '쇼'다. 슬픔을 가장하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무표정에 억지 걸음, 어색한 위로 등의 '쇼', 언론은 여왕이 눈물을 흘렸다고 보도하지만 그게 사실이 아님을 당사자는 안다.

1966년 영국의 정치인들과... 2022년 한국의 정치인들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의 한 장면.
ⓒ 넷플릭스
 
왕실에서 가장 먼저 사고 현장에 도착한 마거릿 공주의 남편 피터(스노든 백작)는 바로 자신의 가족에게 감정을 이입한다. 멀리 떨어져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을 그는 현장에서 본다. 석탄을 캐던 손으로 자식 손에 닿으려 땅을 파는 광부들의 모습을. 진흙에 덮여 몇 시간이고 갇혀있다가 꺼내지는 시신과 산 채로 묻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죽어간 생명들의 모습. 시신 안치소에서 자식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일일이 시신을 들춰 확인하는 부모들과 주머니를 뒤져 나오는 무엇이든 적어 신원을 확인하려는 자원봉사자들의 노력을 마주한다.

직접 마주하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 현장에는 있다. 말로 표현이 안 되는 슬픔과 절망의 표정, 분노의 목소리.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현장을 찾아야 하는 이유다. 슬픔의 형태가 분노든 비명이든 욕설이든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도자는 현장에서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 분노와 격분, 온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고통을 표출하지 못하면 그들은 병들고 그들의 시간은 흐르지 못한다. 시간에 갇힐 뿐이다.

유족들의 시간이 흐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국가의 존재 이유이며 지도자의 가장 큰 역할이다. 유가족의 시간이 흘러야 상처가 아물 수 있고 비로소 떠난 이를 기꺼이 보내줄 수 있다. 죽은 사람을 붙잡고 있는 한 참사의 비극에서 우리 모두는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기에.
유족 : 두 분이 책임을 지시겠습니까?
전국석탄청 : 전국석탄청이 날씨를 책임질 순 없습니다. 이례적인 폭우로 인해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 겁니다.
유족 : 오래전부터 산 아래에 샘이 생긴 거 알았잖아. 내가 진정서도 썼어. 아무것도 안 했잖아. 그게 원인이지 폭우 때문이 아니라고. 
유족 : '산 채로 묻히다. 전국 석탄청의 피해자' 내 새끼 사망 증명서에 그렇게 적고 싶소!
유족 : 정부는 언제 개입하는 겁니까?
정부 : 분명히 말씀드리죠. 참혹한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책임을 노동당에 돌릴 수는 없습니다. 산은 1958년부터 지어졌고 그땐 노동당이 집권할 때도 아니었어요.

애버빈의 참사 후 4일이 지나서야 전국석탄청장과 주무 부서의 장관이 유족들과 마주한다. 이태원 참사를 통해 무수히 들었던 말은 무책임한 정치인들의 공식이었던 것 같다. 1966년 영국의 정치인들과 2022년 대한민국 정부의 정치인들은 그대로 닮아 있다. 정치와 권력의 속성은 시대를 초월해서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책임 회피식 발언. 축제가 아닌 현상. 이번 정부의 책임은 없고 이전 정부의 탓이라는 말까지. 

이태원 참사 초기 참사냐 사고냐 현상이냐의 논쟁을 벌였던 정치인들의 목소리와 드라마의 상황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민중은 분노하면 지도자에게 돌을 던지는 법'이다. 상처 입은 민중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던지는 돌이라도 기꺼이 맞아 주고 감싸주는 위로가 필요하다. 그것이, 원인의 규명보다 앞서는 지도자의 덕목이다.

유족의 애통한 마음에 불의의 답이 돌아오고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은 책임을 거부하는 매몰찬 상황이 지금 우리 앞에 벌어지고 있다. 이태원 참사는 그래서 더 슬프다. 경찰 조사가 끝나기를 기다린다며 그 전에는 어떤 책임도 지기를 거부하는 잔인한 지도자들의 모습에 소름이 끼친다.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 이태원 추모제의 제목이다. 49재 추모제부터가 유족들에게는 참사 후 1일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다. 2014년 세월호 참사를 전 국민이 마주했다. TV를 통해 생중계되는 참사 현장은 전 국민의 가슴 속에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2022년 이태원 참사는 세월호의 트라우마까지 한꺼번에 소환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젊은 청춘들이 아무 이유 없이 스러졌다. 지금은 그들을 기억하기 위한 시간이다.

드라마 말미에, '후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신의 늦은 대응이 군주로서 큰 후회로 남았다고 전한다. 1966년 이후 여왕은 어느 왕족보다도 더 많이 그 마을을 찾았다고도 전한다'라고 자막이 나온다. 우리 지도자들에게 이번 참사가 인생에 큰 후회로 남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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