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복사지까지 아껴라”…비상 경영 속 마른 수건 짜는 재계

명순영 매경이코노미 기자(msy@mk.co.kr) 2022. 12. 20.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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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는 비상 경영 체제를 돌입하고 구체적인 ‘비용 절감’ 지침을 내려보냈다. 삼성전자뿐 아니라 SK, LG, 현대차 등도 투자를 축소하고 비용을 줄이는 분위기가 뚜렷하다. (매경DB)
삼성전자 등 주요 계열사는 최근 지역 전문가로 선발된 120명에 대해 파견 취소 통보를 냈다. 지역 전문가 파견은 삼성 계열사가 32년간 운용해온 유래 깊은 인사 제도다. 삼성SDI, 삼성디스플레이 등 전자 계열사까지 합치면 연간 100~200명이 이 제도를 통해 글로벌 인재로 육성됐다.

삼성인력개발원은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직원 안전을 우려해서’라고 밝혔다. 하지만 최근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잦아드는 추세라는 점을 고려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재계에서는 삼성전자가 비상 경영 체제의 일환으로 지역 전문가 제도 운용을 보류했다고 해석한다. 지역 전문가는 한 명당 연봉 외 1억원 이상 체류지 지원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이미 비상 경영 체제에 돌입하고 구체적인 ‘비용 절감’ 지침까지 내려보냈다. 삼성전자의 DX(기기 경험)부문은 각급 부서장에게 ‘DX부문 비상 경영 체제 전환’이라는 안내를 내보냈다. 프린터 용지를 포함한 소모품비를 50% 절감하고, 해외 출장도 절반 이상 축소하라는 게 골자다.

지난 6월 대면으로 진행했던 글로벌 전략회의가 온라인 회의로 대체된 것도 비용 절감의 일환이다. 글로벌 전략회의는 매년 6월과 12월 등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는 삼성전자의 대표 글로벌 미팅이다. 국내외 임원이 한자리에 모여 각 사업과 부문별 전략을 논한다. 코로나19 사태가 마무리되는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항공기를 포함한 부대비용을 아끼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DX뿐 아니라 TV와 스마트폰을 담당하는 MX사업부에도 비슷한 지침이 하달됐다. CES 등 글로벌 이벤트 운영비를 절반으로 축소하고, 불가피한 출장의 경우 사전에 부서장 등 지휘라인의 결재를 받으라는 것. 특히 매월 각 부문별 비용 절감 현황을 정리해 최고재무책임자(CFO)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이 밖에 시장조사기관이나 컨설팅사 자료 요청 비용을 아끼라는 주문도 떨어졌다. 전용기 운용 효율화도 비용 절감책으로 언급됐다.

5대 그룹의 한 임원은 “프린터 용지를 아끼라는 주문은 금융위기 이후 15년 만에 처음 들어보는 것 같다”며 “특히 국내 최고 기업인 삼성전자가 마른 수건을 짜내라며 구체적인 비용 절감안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정신이 번쩍 든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해외 출장 최소화

불확실한 환경에 ‘짠돌이’ 모드

비상 경영 모드로 돌입한 기업은 삼성전자뿐 아니다.

SK하이닉스는 삼성전자보다 한발 앞서 ‘짠돌이 경영’을 선언했다. 지난 3분기 기대에 못 미치는 부진한 실적을 공개한 이후 곧바로 긴축 정책을 펼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3분기뿐 아니라 4분기와 내년 실적 전망도 밝지 않다. 불과 3개월 전만 해도 올 4분기와 내년 영업이익이 각각 2조원과 9조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이제는 영업적자를 당연시하는 분위기로 돌아섰다. 일례로 현대차증권은 SK하이닉스의 올 4분기 매출은 8조9000억원, 영업적자는 1조4000억원으로 기존 전망을 크게 낮췄다.

SK하이닉스는 당장 충북 청주캠퍼스 M17에 대한 4조원대 투자계획을 전면 보류했다. 내년 10조원대로 예정됐던 투자계획을 올해 대비 50% 이상 축소한다는 방침도 세웠다. 내부적으로도 생산비용 절감을 위한 방안을 찾는 중이다. 한 SK그룹 관계자는 “그간 반도체 전문인력 확보 차원에서 인력을 많이 채용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며 “유휴 인력이 있어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고 밝혔다.

LG그룹은 아직 비상 경영 체제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지난 12월 8일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직접 주재하는 사장단 회의에서도 현 경영 환경에 대한 위기감을 강조했다. LG전자는 “불요불급한 투자는 최소화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지난 11월부터는 각 사업부서와 본사 조직원 일부로 구성된 ‘워룸(War-Room)’을 운영 중이다.

계열사는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LG디스플레이는 수익성이 떨어지는 TV용 액정표시장치(LCD) 패널 생산 중단 일정을 기존 계획보다 6개월에서 1년 앞당길 것으로 보인다. 비용 효율화를 위해 OLED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 또한 향후 시설 투자 규모를 1조원 이상 축소했고, 발주 기준으로 시설 감가상각비가 절반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도록 기존 계획을 재검토하기로 했다.

현대차그룹 역시 이미 밝혔던 내년 투자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구자용 현대차 IR담당 전무는 지난 3분기 실적 콘퍼런스에서 “연초에 공개했던 투자 계획을 9조2000억원에서 8조9000억원으로 하향 조정했다”며 “경기 불안으로 현금 유동성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져 투자 계획을 수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아 역시 중국 사업에 대한 추가 투자에 대해 신중한 모습을 보인다. 기아는 연초만 해도 중국에서의 부진한 실적 만회를 위해 대대적인 중국 투자를 준비한 바 있다.

포스코그룹은 지난 7월부터 비상 경영 체제 전환을 선언했다. 최정우 회장 주재로 그룹 내 사장단과 전 임원이 한데 모여 ‘그룹경영회의’를 열고 사업별 리스크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아울러 현대제뉴인과 현대인프라코어, 현대건설기계 등 현대중공업그룹 건설기계 3사도 지난 9월 CEO 공동담화문을 통해 비상 경영을 선포했다.

석유화학업계에서도 대규모 투자 계획 보류 결정이 이어졌다. 올해 극심한 불황을 겪은 상황에서 글로벌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감소를 우려하기 때문이다. 한화솔루션은 1600억원 규모의 여수산업단지 내 질산유도품(DNT) 생산시설에 대한 신규 투자를 철회했다. 금호석유화학은 NB라텍스 증설 투자 계획을 뒤로 미뤘다. 현대오일뱅크는 3600억원대 신설 설비 투자를 전면 중단했다.

2008년 금융위기 때도 비용 절감

“그때보다 더 어렵다” 재계 긴장

투자 규모를 줄이고 비용 절감에 나서는 이유는 내년 경기 전망이 워낙 불확실해서다. 특히 재고가 쌓인다는 점에서 고민이 적지 않다. 매출 기준 상위 500대 기업 중 195개 기업의 재고자산 변동 현황을 분석한 결과, 지난해 말에 비해 올 3분기 재고자산은 약 36.2% 증가했다(리더시인덱스 분석).

기업들은 앞으로 닥칠 어려움에 대비하기 위해 현금을 미리 확보하는 데 힘 쏟는다. 지난 9월 말 기준 코스피 상장사 시총 상위 20사의 현금성 자산은 250조2627억원으로 지난해 말보다 28조2839억원 늘었다. 기업 대출도 증가해 10월 말 기준 은행의 기업 대출 잔액은 1169조2000억원으로, 올 들어 103조5000억원이나 증가했다.

재계에서는 2008년 금융위기 이상의 비상 상황을 대비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당시 주요 대기업은 예정된 투자액을 줄이거나 생산량을 감축하고, 허리띠를 졸라맸다. 삼성전자는 당시 메모리반도체 투자를 당초 7조원에서 6조원대로 삭감키로 했다. ‘프린터 용지까지 아끼라’는 말도 이때 나왔다.

2008년 4분기 연속 영업이익 적자를 기록했던 하이닉스반도체(현 SK하이닉스) 역시 설비 투자액을 계획보다 1조원 줄인 2조6000억원만 집행했다. 하이닉스는 ‘투자는 영업으로 벌어들이는 현금 범위 내에서’라는 초긴축 방침을 세웠다. SK텔레콤은 ‘예산 40% 절감’으로 계획을 수정하기도 했다. LG전자는 팀별로 경비 절감 계획을 마련하고, 대규모 시설 투자를 자제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위기 때 기회라는 말이 있듯, 미래를 위한 투자를 멈추기는 힘들다”면서도 “다만 미래 불확실성이 높은 만큼 경비 절감 등 경영 효율화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재계 인사는 “내년은 올해보다 경영 환경이 더 안 좋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계획했던 투자는 계속 이어가야겠지만 다른 불필요한 경비를 줄이며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89호·송년호 (2022.12.21~2022.12.2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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