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칼춤 춰줄 망나니 필요해"…달달한 송혜교는 사라졌다
넷플릭스 첫 장르물 도전 변신 꾀해
“엄마는 내가 누굴 죽도록 때리고 오면 더 가슴이 아플 것 같아, 아니면 죽도록 맞고 오면 더 가슴 아플 것 같아?”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딸이 김은숙 작가에게 던진 질문이다. 20일 서울 동대문에서 열린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김 작가는 “그 순간 너무 충격이었는데 짧은 순간에 많은 이야기가 확 펼쳐졌다. 그 길로 작업실에 가서 쓰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SBS ‘파리의 연인’(2004)부터 tvN ‘도깨비’(2016)에 이르기까지 한국 로맨틱 코미디의 계보를 써온 김은숙이 장르물에 도전하게 된 계기다. 김 작가는 “학교 폭력 피해자들이 대부분 현실적인 보상보다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를 원한다고 한다. 인간의 존엄과 명예를 되찾고자 하는구나, 그래야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구나 싶은 마음에 ‘영광(Glory)’이라는 뜻의 제목을 붙이게 됐다”고 말했다.
‘더 글로리’는 김은숙의 장점이 여실히 드러나면서도 김은숙의 전작을 까맣게 잊게 하는 묘한 매력을 지닌 작품이다. 미혼모의 딸로 태어나 학교 폭력으로 몸이 성한 데가 없고 영혼도 부서졌지만, 부모ㆍ교사ㆍ경찰 등 사회로부터 전혀 보호받지 못한 열여덟살 문동은(송혜교)이 일생을 바쳐 계획한 복수를 서른여섯살이 되어 차근차근 완성해가는 이야기다.
“난 왕자가 아니라 나랑 같이 칼춤 춰줄 망나니가 필요하다” 등 동은이 툭툭 던지는 대사마다 가슴이 설레는 대신 아리다. 백마 탄 황제가 직접 등판한 김은숙 작가의 전작 SBS ‘더 킹: 영원의 군주’(2020)와는 대조적이다.
송혜교 “항상 고팠던 역할 드디어 만나”
이어 “어린 동은이 무방비 상태에서 상처를 받고 아픔을 받았다면, 성인이 된 동은은 오랜 시간 동안 가해자들에게 처절하게 복수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불쌍한 모습보다는 단단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오직 목표를 향해 한 치의 낭비도 없이 무표정하게 직진하는 모습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송혜교의 얼굴을 보여준다.
김 작가는 냉철한 복수극을 쓰는 것보다 달달한 로맨스가 튀어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고충을 털어놨다. 그는 “극 중 주여정(이도현)과 문동은은 연대 혹은 연애 중간 어디쯤인데 두 사람이 너무 예뻐서 대본을 쓰다 보면 자꾸 환해지고 벚꽃이 날리고 난리가 났다”고 말했다.
“초고를 보고 감독님이 ‘장르물 아니고 로코였냐’고 물으면 다시 정신 차리면서 많이 갔다가 적당히 돌아오는 작업을 계속했다”는 설명이다. tvN ‘비밀의 숲’(2017) 등을 연출한 안길호 감독은 “작품이 담고 있는 이야기의 힘이 크기 때문에 최대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로맨스가 사라진 자리는 다양한 감정을 기반으로 피어난 연대가 채운다. 병원장 아들로 태어나 ‘온실 속 화초’로 자란 주여정, 가정폭력으로 시달리는 “매 맞지만 명랑한 년” 강현남(염혜란)이 함께 칼춤을 추는 동반자가 되어준다.
가해자 무리의 중심인 박연진(임지연)을 향해 18년간 매일같이 써온 편지는 “오늘부터 모든 날이 흉흉할 거야” “우리 같이 천천히 말라 죽어보자” 등 증오와 기대, 그리움 등으로 가득 차 있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는 ‘도깨비’의 명대사나 모든 것을 다 가진 부유층 고교생들이 주인공이었던 SBS ‘상속자들’(2013)을 떠올려 보면 더욱 극명한 변화다.
김은숙 “자기복제 아냐, 체면치레 할 것”
새로운 작품을 선보일 때마다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쏟아지는 상황에 대해서도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로맨스에 천착해 온 김은숙 작가는 '도깨비'로 판타지, tvN ‘미스터 션샤인’(2018)으로 시대극까지 스펙트럼을 넓혀왔으나 ‘더 킹’으로 자기복제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김 작가는 “작품을 할 때마다 일보 일보 전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복제는 하지 말자며 조금씩 변화해오고 있던 와중에 넷플릭스가 제작비를 댄다니 지금은 장르물을 시켜줄 것 같았다”며 “다들 대본을 좋아해 주시는 걸 보니 체면치레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실패하면 다시 도전해보겠다”며 웃었다.
19세 이상 시청가 등급도 방송사가 아닌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를 선택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김 작가는 “학교 폭력 내용도 있고 욕설도 등장하지만 사법 체계 안에서가 아닌 사적 복수를 택한 만큼 ‘19금’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첫 넷플릭스 시리즈에 도전한 만큼 해외 반응도 기대를 모으는 부분이다. 김 작가는 “학교 폭력은 한국뿐 아니라 어디에나 있는 보편적인 일이기 때문에 가해자나 피해자가 느끼는 감정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며 “자랑스러운 한국 콘텐트인 ‘오징어 게임’ 다음도 좋고, 이제 복수극은 ‘존 윅’ ‘테이큰’ ‘더 글로리’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총 16부작으로 파트 1은 오는 30일, 파트 2는 내년 3월 공개 예정이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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