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뚤어진 엄마'가 어때서
[윤일희 기자]
▲ 영화 <로스트 도터> 관련 이미지. |
ⓒ 그린나래미디어 |
영화 <로스트 도터>의 주인공 레다(올리비아 콜 맨)는 아이를 두고 가출했던 심정을 묻는 니나(다코타 존슨)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너무 좋았어요." 나는 이 말에 공감한다. 엄마인 당신은 어떤가?
아이가 떠난 후의 해방감
어릴 때부터 '삼한'(삼하다는 말은 잠 잘 안 자고, 보채고, 손이 많이 가는 아이를 칭할 때 엄마가 쓰시던 표현이었는데, 내 딸이 딱 그랬다) 아이였던 딸애는 사춘기에 절정을 찍더니, 어느 날 홀연히 내 곁을 떠났다.
딸아이가 떠나고 나는 굉장한 해방감을 맛봤다. 예상치 못한 홀가분함이었다. 집안일을 하고도 오후 시간이 남는 기적이 매일 일어났다. 시간 빈곤자에서 벗어났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 시간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아이 뒤치다꺼리로 소진되었는지를.
남는 시간(본래 내 시간이었지만 상실됐던)은 꿀맛이었다. 시간이 부족해 밀쳐두었던 책을 독파하고 글을 쓰고, 혼자 여유롭게 영화관을 찾고, 동네를 산책하고, 만나지 못하던 사람들을 만났다. 그때 만난 사람들은 놀랍도록 같은 말을 던졌다. 걱정되겠다고, 쓸쓸하겠다고, 많이 보고 싶겠다고. 아이와 이별한 엄마에게 던지는 말이 한결같다는 것은 그들이 상상하는 혹은 단정하는 모성이 단일하다는 의미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전하는 위로랄까 어쩌면 부러움이랄까 하는 속내와는 거리가 먼 심리상태였다. 딸애가 걱정되지도, 쓸쓸하지도, 많이 보고 싶지도 않았다. 나 자신도 뜻밖의 감정이긴 했지만, 내 이런 반응에 사람들은 배신감 혹은 이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한 지인에게서 기어코 "무슨 엄마가 그래?"라는 야유를 들었으니 말이다.
바로 이 "무슨 엄마가 그래?"라는 힐난이 바로 모성의 지긋지긋한 질곡일 것이다. 무슨 엄마가 그러냐는 상대에게, "엄마가 어때야 하는데? 내 모성을 왜 당신이 정하지?"라고 드잡이하지 못하는 쭈뼛댐 또한 모성이 처한 지긋지긋한 곤경일 테고.
▲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 이미지. |
ⓒ ㈜영화특별시 SMC |
엄마들은 어떤 상황에서건 "무슨 엄마가 이래?"라는 폭력적 질타 앞에 작아진다. 이런 힐난은, '엄마는 이러이러해야지'라는 모성 신화에 조금이라고 어긋난 엄마에게 가해져도 된다고 허락한 사회적 승인과 결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툴리> 속 엄마 마를로(샤를리즈 테론)는 잠깐의 휴식을 위해 들른 카페에서 고작 디카페인 커피를 주문하고도, "디카페인 커피도 카페인 있다"며 나무라는 눈총을 받는다. 제멋대로인 첫째와 자폐 증상이 있는 둘째 그리고 부푼 배 속에 들어앉은 셋째로 잠시도 쉴 틈이 없는 마를로의 피로는 철저히 무시된 간섭이다. 임신한 엄마는 단지 뱃속의 아이만 소중해야 한다고 재우치는 것이다. 엄마다움에 터럭만큼이라도 위배된다고 여겨지면 가차 없이 날아드는 "무슨 엄마가 저래?"라는 화살은 자기 돌봄조차 멸시당한 엄마에게 깊은 내상을 남긴다.
연년생 딸 둘을 키우며 학업을 이어가야 했던 레다에게도 세상 모든 눈초리는 "무슨 엄마가 그래?"라며 날아드는 화살 같다. 아주 잠깐도 엄마를 가만두지 않는 두 딸은 매일 엄마의 한계를 시험한다. 아무리 치워도 잠깐 사이에 방안 가득 늘어놓이는 장난감과 잡동사니들, 뽀뽀해 달라 안아 달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칭얼댐, 뒤돌아서면 돌아오는 밥때 앞에서 레다는 얼마간의 집중이 있어야만 가능한 학자로서의 길을 이어갈 수 없다. 절망한다. 그녀의 번뜩이는 지성은 아이들을 돌보느라 한없이 무뎌지고, 더 이상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아 전전긍긍한다. 불안은 그녀를 더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은 점점 미궁에 빠진다. 불능이다.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데 엄마 노릇은 왜 학문처럼 진척되지 않는 걸까. 반복되는 아이들의 소요는 왜 매일 예상을 벗어난 다른 버전으로 자신을 좌절시키는 걸까. 무한 반복의 가사노동과 돌봄에 레다는 질식할 것만 같다. 숨을 쉬기 위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집을 떠난다. 살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그녀는 아이를 버린 몹쓸 엄마가 되었다. 몇 년 후 다시 아이들 곁으로 돌아갔지만 이 시간들이 상처가 되지 않기란 어렵다. 엄마와 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생겨서가 아니다. 엄마에겐 딸을 버린 나쁜 엄마, 아이들에겐 엄마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아이들이라는 낙인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레다는 얼마 후 딸들에게 돌아갔지만 그렇지 못한 엄마들도 있다. 엄마로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악녀여서가 아니다. 엄마라는 일이 이토록 숨 막히는 배역인 것을, 역할이 오기 전엔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 <디 아워스>에서 엄마 로라(줄리안 무어)는 엄마의 자리를 떠나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엄마로 사는 동안 그녀는 해낼 수 없는 막중함 때문에 늘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둘째 아이를 낳고 집을 떠났다. 그 둘째 아이가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다 끝내 자살하고 만다는 비극을 설정함으로써 영화는 떠날 수밖에 없던 엄마의 곤경을 냉혹하게 단죄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희생하라고 강요하는 모성 이데올로기는 문제되지 않은 채, 어째서 엄마답지 않다고 단정된 모성은 단두대로 보내지는가?
'엄마로 사는 이는 한 번쯤 혹은 자주 엄마 됨을 후회한다. 첫 후회는 아이의 탄생과 함께 온다. 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젖을 빠는 아이의 생명력은 곧 이 아이에게 내 모든 걸 내주어야 한다는 희생을 각인시킨다. 뭐든 아낌없이 다 내놓아야 얻을 수 있는 자리가 모성이라는 충격적 인식은 이전 자아를 소멸시켜야 얻을 수 있는 대가가 아닌가. "후회는 내면의 불안과 자신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동반하는 감정상태"지만, 후회하는 엄마는 불온한 존재일 뿐이다. 후회는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곤경이지만, 수용되지 않는다. 엄마됨을 후회한다는 것은 신성한 모성을 배교하는 반사회적 행위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 (<엄마됨을 후회함> 참고)
미국의 저명한 시인이자 페미니스트인 에이드리언 리치는 시를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동료 시인의 물음에 아이를 낳지 말라고 조언했다. 리치는 아들 셋을 키우며 걸출한 페미니스트 시인이 되었지만, 모성이라는 종교를 배반하느라 수많은 시간 분열했다. 분열은 에너지와 시간의 막대한 소모다. 소모되며 자신을 잃지 않는 일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그는 주장했다. 관계로서의 모성과 제도로서의 모성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독박 돌봄에 지쳐 엄마됨을 후회하는 감정은 다른 차원이라는 말과도 통할 것이다.
레다는 자신의 엄마됨에 대해 "삐뚤어진 엄마"라고 자백한다. 나는 "삐뚤어진 엄마"라는 그녀의 인정에서 오히려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말해버리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삐뚤어진 엄마니 어쨌다는 것인가. 그렇다고 아이들이 소중하지 않은 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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