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후보자 공보물 삭제 요청' 변협, 표현·선거운동의 자유 침해”
"2차 공보물 발송 때 삭제한 1차 공보물 함께 발송하라" 결정
[아시아경제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대한변호사협회(변협) 협회장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의 선거공보물 내용 일부를 삭제할 것을 요청한 변협 선거관리위원회의 조치가 해당 후보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와 선거운동의 자유, 소속 회원들의 알권리를 침해했다는 법원 결정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1부(부장판사 전보성)는 20일 변협 협회장 선거에 출마한 안병희 후보자(60·군법무관 7회)가 변협을 상대로 낸 선거운동 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에서 안 후보자 측 신청을 일부 인용, "채무자(변협)는 12월 23일로 예정된 대한변호사협회장 선거 제2차 선거 인쇄물 발송시 채권자(안병희)가 제출한 별지 기재 인쇄물을 함께 발송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다만 재판부는 '변협이 이 같은 법원의 명령을 위반할 경우 그 이행을 완료할 때까지 위반행위 1일당 1000만원을 안 후보자에게 지급하라'는 내용의 간접강제 신청은 그 필요성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날 법원의 결정에 따라 변협은 23일 2차 선거 공보물을 발송할 때 1차 공보물 발송시 삭제했던 안 후보자의 공보물을 함께 발송해야 한다.
변협 협회장 선거운동은 지난 2일부터 진행됐고, 투표는 내달 16일이다. 후보들이 선거운동을 위한 공보물을 파일 형태로 변협 선관위에 보내면, 선관위가 인쇄 후 3회에 걸쳐 유권자인 변호사들에게 발송하도록 돼 있다.
앞서 변협 선관위는 지난 8일 안 후보 측 공보물 시안에 대해 "변호사단체의 명예와 품위를 손상하는 행위를 금지한 '협회장 및 대의원 선거 규칙'을 위반했다"는 취지로 일부 문구의 수정과 삭제를 요구했다. 다른 후보를 언급하지 못하도록 한 시행 규정을 위반했다고도 지적했다.
선관위가 삭제를 요청한 안 후보 측 공보물엔 '지난 2년, 특정단체 출신 변호사들이 대한변호사협회와 서울지방변호사회 주요 직책을 교차로 맡아 회무를 독점하고 플랫폼, 유사직역 관련 소송 사건을 수임했고, 임원 추가실비 한도를 대폭 인상했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었다.
해당 공보물에는 이와 함께 현 변협 임원 5명이 실제 수임한 플랫폼 관련 위헌소송, 형사고발 건, 언론 상대 정정보도 청구사건 등이 표시됐고, 한국법조인협회 전현직 임원 출신인 서울변호사회 회장과, 사무총장, 법제이사, 사무부총장, 재무이사 등 5명의 임원 추가실비 한도가 월 300만원에서 월 500만원으로 66% 대폭 인상됐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또 '회원들의 회비로 사익을 추구하고, 회무를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행태는 반드시 근절돼야 한다'는 내용과 '그 외에도 특정단체에 지원금 명목으로 3000만원을 기부하는 등 대한변협과 서울회는 비정상적인 회비 사용을 일삼았다'는 내용도 있었다.
변협 선관위의 지적에 안 후보 측은 '셀프 수임'을 '수임'으로, '셀프 인상'을 '인상'으로 각각 수정하고, 임원들의 수임 기록에선 현재 직책을 삭제했다.
하지만 선관위는 9일 안 후보자의 공보물 총 12개면 중 2개면 전체를 삭제할 것을 요구하면서 12일 오전 9시까지 선관위의 요구가 반영된 수정 선거인쇄물 시안이 제출되지 않을 경우 안 후보자의 1차 선거인쇄물은 발송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통보했다.
이에 안 후보는 1차 공보물 발송 시기에 맞춰 일단 선관위가 지적한 면의 내용을 삭제한 뒤 검은 면으로 대체했고, 22일로 예정된 2차 공보물 발송 때부턴 1차 수정본을 그대로 발송하게 해달라는 취지의 가처분을 법원에 신청했다.
법원은 안 후보자가 변협 선관위의 요청에 따라 삭제한 1차 공보물을 2차 공보물 발송 때 함께 발송해줄 것을 요구하는 가처분을 구할 피보전권리와 보전의 필요성이 소명된다고 판단했다.
먼저 재판부는 안 후보자의 공보물에 기재됐다가 삭제된 표현들이 변협이나 서울변호사회 소속 변호사들에게 공통된 관심사이거나 공적 이해관계에 속한 사항이어서 후보자로서 충분히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내용들이기 때문에, 변호사 및 변호사단체의 명예와 품위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표현이라거나 위법한 표현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어떠한 단체의 선거와 관련해 선거운동의 자유는 자유롭고 공개적인 정치적 의사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므로 그 자유는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며 "선거운동의 주체, 시기, 방법 등을 제한하는 것이 불가피한 면이 있으나 이러한 규제는 그것이 지나칠 경우 선거운동의 자유에 대한 침해의 위험성이 있으므로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규제로 그쳐야 한다"고 전제했다.
재판부는 변협이 안 후보자의 공보물 발송 거부 사유로 '대외적으로 변호사 및 변호사단체의 명예와 품위를 손상시키는 행위'라는 점을 든 것과 관련 "그 문언 자체가 추상적이고 평가를 수반하는 것이어서 불명확한 면이 큰 반면, 선거운동의 자유가 가지는 앞서 본 의의를 고려하면 어떠한 선거운동이 위 규정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할 때 명예와 품위를 손상시키는 행위라고 쉽사리 인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이 현재 집행부가 시행하는 제도를 비판하고 이를 개혁하겠다는 내용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것은 선거의 본질상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이라며 "그러한 비판을 백안시할 것이 아니라 신의칙과 사회통념에 비춰 상당성이 인정된다면, 허용 가능한 선거운동의 범위 안에 있다고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재판부는 "협회장 선거 과정에서 제작된 별지 기재 인쇄물 시안 내용은, 현 집행부가 유사직역과 관련한 소송사건들을 다수 수임하고 채무자 협회 소속 서울회 집행부의 추가실비 한도를 대폭적으로 인상했다며 그 구체적인 내역을 밝히는 것"이라며 "시안 내용이 채무자 임원들의 명예 또는 채무자 소속 서울회에 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채무자 협회의 성격 및 회원 구성에 비춰 볼 때 채무자 회원들에게 공통된 관심사이거나 공적 이해관계에 속한 사항이어서 후보자로서 충분히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따라서 별지 기재 인쇄물 시안 내용은 신의칙과 사회통념상 허용 가능한 범위 내의 비판으로서 이를 두고 대외적으로 변호사 및 변호사단체의 명예와 품위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표현이라거나 위법한 표현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강조했다.
또 재판부는 변협 선관위가 최종적으로 공보물 시안 중 2개면의 삭제를 요청하고,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공보물을 발송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안 후보자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와 선거운동의 자유, 그리고 소속 변호사들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로, 선관위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채무자는 채권자가 제출한 1차 선거인쇄물 시안을 검토한 후 일부 표현의 수정 내지 삭제 등을 요구하다가 최종적으로는 채권자가 제출한 총 12면의 1차 선거인쇄물 시안 중 2면 전체의 삭제를 요청하면서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선거인쇄물 발송이 불가하다고 통보했고, 결국 채권자는 당초 제작했던 1차인쇄물 시안 총 12면 중에서 2면 전체를 삭제한 1차 선거인쇄물을 제작했다"며 "이는 채권자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와 선거운동의 자유 및 회원들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선거관리위원회에게 부여된 선거관리권의 한계를 벗어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고 지적했다.
안 후보자 측은 이날 결정이 나온 직후 보도자료를 통해 법원의 결정 내용을 알리면서 "이로써 대한변협 선관위가 현 대한변협 부협회장 출신의 후보들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하도록 선거 인쇄물을 사전 검열한 행위가 부당했음을 법원으로부터 판단을 받으며 일단락이 됐다"며 "그러나 이 과정에서 대한변협 현 집행부 일원이 안 후보가 가처분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보도한 언론사 기자들을 상대로 폭언을 하고 법적다툼을 예고하는 등 잡음이 발생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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