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대의 은퇴일기⑮] 걸음걸이와 삶
올바른 걸음걸이는 그 사람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첫인상을 결정하기도 한다. 청년들의 늠름한 발걸음은 활기가 넘치고, 하이힐 신은 여성들의 걷는 소리는 경쾌하면서도 멋스럽다. 나이가 들고 힘이 빠지면 오다리가 되거나 비틀거려 볼품이 없어진다. 노화로 인한 자연적인 현상이지만 “내가 벌써 이렇게 되었나?” 하는 생각에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청년들이 정장을 입고 똑바로 당당하게 걸어가는 자세는 꿈과 낭만이 가득하여 활력이 넘치고 자신감이 있어 보인다.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이를 보면 어느새 시선을 빼앗기게 된다. 어깨와 허리를 쭉 펴고 희망과 용기가 용솟음치는 것 같은 청년의 걸음걸이는 여성으로부터 호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미국의 유명한 신경-언어 프로그래밍 트레이너인 로만 브라운은 그의 저서에서 “슈퍼맨의 망토가 내 등 뒤에서 펄럭이는 기분으로 걸어라”라고 하면서 일정한 간격으로 성큼성큼 걷는 일명 ‘슈퍼맨 보행’은 상대에게 확신과 일관성을 드러내는 데 적합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사람은 매사에 강한 운이 따르고 사생활도 행복하다고 한다. 등을 세우고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걷은 사람은 인생의 기둥이 바로 선 듯 든든해 보인다.
군대에서 군인들의 힘찬 행진은 어떤 적이라도 무찌를 것 같다. 군인 시절에 추운 겨울 윗옷을 벗고 줄을 맞춰 구보했을 때가 생각난다. 춥기보다는 자신감과 활력이 넘친다. 군화 소리와 구령에 발맞추어 달리다 보면 지축이 흔들리는 듯 우렁차 자기 최면에 걸려 힘이 절로 솟는다. 전철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도 타지 않고 두 계단씩 성큼성큼 올라가는 것 보면 뭐든지 해낼 것 같은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나도 예전에는 그랬었는데’ 하는 부러운 마음과 함께 ‘내가 언제 이렇게 되었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젊은 여성들의 발랄한 걸음걸이는 보기도 좋고 상쾌하다. 운동화를 신은 발걸음은 사뿐사뿐 나비가 하늘거리며 날갯짓하는 것 같다. 치마를 입고 날씬한 다리를 뽐내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신혼 시절 아내가 생각나 기분까지 좋아진다.
아름다움을 뽐내기 위해 쭉 뻗은 다리와 미니스커트에 높은 하이힐을 신고 걸어가거나, 몸에 꽉 끼는 레깅스를 입은 자태는 뭇 남성들의 눈길을 끌 만하다. 어떨 때는 똑바로 바라보기가 민망하여 곁눈질하면서도 고개는 자꾸 돌아간다.
하이힐을 신고 보도블록이나 대리석 바닥을 걸어가는 소리는 경음악을 듣는 것처럼 경쾌하다. 글래머 여성의 하이힐 발걸음 소리는 힘이 실려 있고 높고 뾰쪽한 굽이 부러지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저 가느다란 굽이 견디는 것 보면 무슨 재료로 만들었는지 궁금해지기도 하고 치한으로 걸려 뾰쪽한 굽에 머리라도 맞으면 구멍이 뚫릴 것 같아 섬뜩해지기도 한다.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는가 보다. 젊었을 때의 발랄하고 활기찬 발걸음도 나이가 들면 힘이 빠지고 구부정한 자세가 되기도 한다. 전철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시간이 촉박하여 빨리 나가려고 하는데 나이 드신 어르신이 앞에서 느릿느릿 걸으시니 젊은이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문밖으로 나오자 모두 자기 갈 길을 찾아가느라고 바쁘다. 젊은이들은 계단으로 올라가 보이지 않고 승차장에는 어르신들의 뒷모습만 보인다.
꽉 끼어 몸매가 드러난 젊은이들과는 달리 복고풍의 풍성한 핫바지에 다리가 오자로 구부러진 분들도 많다. 늦으면 엘리베이터를 못 탈까 봐 허겁지겁 걸어가거나, 계단 난간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올라가신다. 몇 년 후의 나의 모습일지도 모르는데 아직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어르신들도 젊었을 때는 노인들을 보고 나와 똑같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가끔 어머니를 뵈러 갔을 때 보행기를 밀며 산책하는 모습을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팠었다. 젊었을 때는 탱탱한 종아리로 물이 찰랑거릴 정도로 담긴 물동이를 이거나, 지게에 짐을 가득 지고 가는 어머니였는데 이렇게 되다니.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식들 눈에 어머니와 같은 모습처럼 보일 텐데’하는 생각이 스친다.
얼마 전에는 뒤따라오던 아내가 “당신 다리가 오다리가 되었다며 똑바로 걸어 보라”고 한다. 신경을 쓰고 걸어봤지만, 걸을 때 무릎이 붙지 않는다. 내 다리가 오다리가 되다니! 볼품없이 걸어가는 노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니! 충격이었다. 젊었을 때는 “당신 걸음걸이는 힘이 있고 참 멋지다”라고 칭찬하던 아내였는데 그동안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변한 것이다. 마음은 아직 청년인데 몸은 나이에 발맞추어 달려가고 있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몇 년 전에 허벅지 뼈가 부러져 2년 동안 철심을 넣고 고정했다 제거한 것이 원인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해 본다.
우리의 삶도 걸음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이가 들더라도 초라하고 미약한 것이 아니라 당당하고 사뿐한 발걸음을 갈망하지만, 힘이 빠지고 오다리가 되더라도 자연적인 현상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가슴속에 남아있는 젊은 혈기로 행동하다가는 다치기에 십상이다. 어르신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우리 모두 가진 것, 바로 두 다리로 걸어 다니지 못할 때 많은 것을 잃게 된다. 공원, 음식점을 못 가는 것은 약과다. 일상생활을 하고 화장실 이용하는 것도 큰일이다. 자존감이 낮아지고 삶의 만족이 떨어져 희망이 없고 인생 전체가 무너질 우려가 있다. 적절한 운동과 조심스러운 행동만이 노후를 즐겁고, 보람되게 지낼 수 있는 지름길이다.
조남대 작가 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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